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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붐 Aug 01. 2023

1. 본영

눈을 뜨자 본영의 시야에 확실히 들어온 건 두 가지였다.


더 이상 눈이 부실 수 없게 반짝이는 바다의 푸른빛,  

모래의 색 보다 더 진한 황갈색, 고동색 피부의 사람들.

모두 본영 자신과 마찬가지로 모래사장 위에서 덩그러니 어딘지 모를 이 낯선 풍광에 아연실색, 오리무중이었다.


검회색 아스팔트와 빌딩 그리고 골목으로 점철된 서울의 월세방에 사는 본영으로써

일상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풍경에서 불시에 눈을 뜨게 된 것부터가 어리둥절할 수밖에.

야자수와 에메랄드 색 바다, 소금을 머금고 불어오는 짜디짠 공기가 생활 반경에 없었던 게 분명한 황갈색과 고동색의 저들도 본영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해변에 즐비하게 늘어져있는 사람들도 잠에서 깼는지 다소 인상을 찌푸린 채 꿈틀대고 있었다. 눈 떠보니 완전히 뒤바뀌어있는 광경에 소리치며 기겁하기도, 아무 말 없이 휘둥그레진 눈을 상하좌우로 굴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사람도, 이게 뭐냐고 대체 어디냐고 하늘 위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소리치는 듯한 사람까지.

시끄러운 소리에 본영의 미간이 다소 구겨졌다.


'무언가 있다. 이 많은 사람을 이곳에 모아놓을 정도의 거대한 뭔가가, 틀림없이 있어.'  본영 자신 또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기억을 더듬고자 지난밤을 되짚었다.


분명히 의뢰를 받아 찾아간 집의 거대한  대문을 열고 들어섰고,

집사로 추정되는 몹시 예의 바른 남자의 안내를 받아 방 한편에 앉아 내담자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역시 높다란 담으로 둘러싸인 집의 규모에 걸맞게 격식 있고 단정한 차림의 집사가 차가운 식혜를 건넸고 간단한 다과도 곧 가져다주겠다던 참이었다.

그가 식혜를 따르며 건넸던 말이 기억의 장막을 찢고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렴풋한 기억이 튀어나왔다.


"구 선생님 맞으시죠. 사장님께서 오래도록 꼭 뵙고 싶어 하셨습니다."

지금껏 이름으로만 불렸는데 삽시간에 구 선생님으로 불리다니. 인생 참 재밌다- 하는 생각을 했던 게 어렴풋하게 기억났다. 그 후로 어떤 기억도 없다. 꿈의 흔적도 없는 완연한 침잠의 잠으로 빠져든 것이다.

본영에게는 그런 종류의 잠이 없었다. 적어도 기억하는 한에서 그런 티끌 하나 없는 깊고 순수한 잠을 잔 일이 없었다. 마치 애초에 '숙면'이라는 기능이 없는 사람처럼.


'그 인간 뭔가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여기저기 우왕좌왕 꿈틀대며 돌아다니는 사람들 속에서 본영만은 홀로 자리를 잡고 앉아 생각에 몰두했다.

그 집사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과 뉘앙스를 간간이 풍기며 본영과 대화했다. 그리고 그게 본영의 뇌리에 남아있는 마지막 기억이고. 어째서, 어떻게 이곳에 널브러져 있는지에 대한 일말의 단서조차 없고 주변에 있는 존재라고는 모두 자신과 같거나 훨씬 더한 상황에 놓인 말조차 통하지 않을 게 분명한 이국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본영의 머리를 쓰다듬었으나 본영은 그런 한가한 바람의 손길을 느낄 새가 없었다. 평소 같았다면 바람에 몸을 맡겨 즐겼겠지만,

발톱 사이에 낀 모래알처럼 성가신 무언가가 본영의 머리를 떠다니고 있었으니까.


그 순간, 고동색 피부를 갖고 키가 큰 한 사람이 모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글자들은 한글이었다. 한글이라면,

드디어 한국어 대화가 가능한 사람을 찾은 것이나 다름없었다만

본영은 곧 반가움에 동그래진 눈동자만큼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행동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모래사장에 쓰이던 글자는 분명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조합한 글자였지만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문장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지헾츄모라이프꽈림'...


본영의 마음은 마치 스프링의 작용 반작용처럼 반가웠던 만큼 큰 실망이 터져 나왔고, 소리 내 탄식이 내뱉어질 지경이었다.

본영은 탄식하며 주변을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이 '모름', '알 수 없음'으로 가득 차 있는 해변을 어서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손에 들려있던 전자기기들도 전부 사라진 상태였고, 이곳이 어디인 줄 알아낼 방법은 그저 몸을 일으켜 눈으로 보고 유추하고 추측하는 것뿐이었다. 해변가에 널브러져 있는 저들 틈에서는 해답을 찾아낼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하늘에 무언가 떠있는 게 본영의 눈에 들어왔다.

멀리 보이는 헬리콥터이거나 새 같기도 했는데, 새라기엔 움직임이 희한했고 헬리콥터라기엔 소리가 너무 작았다.

하나인 줄 알았던 그것들은 공중에서 두 개가 되더니 간격을 넓혀 멀찍이 열을 맞춰 공중에 떠있었다. 이렇게 보니 '드론' 외에 다른 이름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본영이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 해변에 있던 영문을 모르는 무지렁이들도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했고 그들 모두가 고개를 위로 들어 드론을 바라봤다.


드론은 그대로 공중 위에서 정지해 있었는데, 어느 정도 이목이 집중되자 마치, 이제 말할 준비가 되었다는 듯 두 드론은 허공에 빛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면을 쓴 한 사람의 홀로그램이 허공에 완성되었고 커다랗고 분명하며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본영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인 한국어와 영어는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고동색 인간들은 말을 알아듣고 놀란 듯 입을 떡하니 벌린 채 고개를 끄덕이거나 휘젓고 있었는데, 한 단락마다 언어가 바뀌고 있는 듯했다.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전달하고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도대체 왜?

생각하는 순간, 한국어 음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많은 국가가 그렇듯, 대한민국 또한 모든 난민을 수용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우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매일같이 고갈 되어가며, 토지도 해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있지요. 삶의 터전을 떠나 이곳까지 찾아와주신 분들을 거절할 수만은 없어 난민심사에 부적합 판정을 받은 여러분께도 다시금 기회를 드리고자 하니, 즐겁게 경쟁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사상 최초로 실시되는 <섬 탈출 게임> 경쟁의 무대로 선정된 곳은 평화의 섬이라 불리우며 대중의 사랑을 받는 제주입니다. 해수면 상승으로 원 면적의 절반 가량이 가라앉았지만 경쟁을 펼치기에는 충분한 공간이 될 것입니다. 국적 불문 난민 신청에서 아쉽게 누락됐던 300명의 난민이 참가합니다.

경쟁의 모든 과정은 실시간 생중계 되고 있으며, 불시에 미션 혹은 아이템이 부여될 수 있습니다. 곧 대한민국의 국민이 될 당신을 환영하며, 응원하고 있겠겠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소리로 가득했던 한국말 방송이 끝나자 영어의 차례였다.

듣자하니 같은 내용의 메세지를 모두 다른 언어로 지껄이고 있는 것 같았는데, 중요한 건

본영 스스로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간혹 TV 프로그램 편성 예고편에서 이런 컨셉의 서바이벌 버라이어티를 방영할 예정이라고 하는 건 봤지만, 왜???


본영은 태어날 때 부터 한국인이었고 단 한번도 한국인이 아니었던 적이 없으며 한국을 벗어난 적도 없는 토종 200% 한국인인데, 왜?

대체 왜??


왜를 거듭 생각하다보니 왜가 왜 왜인지 조차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어디서 부터 잘못이 시작된 것일까, 기억이 끊긴 그날 그 고풍스런 집의 집사가 건네는 음료를 잘도 받아마신 탓일까, 그렇다면 그 작자는 대체 왜.


본영이 왜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동안

난민으로 가득한 해변에는 종전과는 달리 긴장이 역력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모두가 '어떤 경쟁'을 하게된다는 걸 알게 되었고, 공통의 것을 공유하는 자들끼리 힘을 합치고자 모이는 분위기였다.


서로 언어가 어느정도 통하는 같은 언어권 난민별로 친목을 하며 뭉치고 있었다.

본영은 어느쪽으로도 붙을 수가 없었다.

스와힐리어, 아랍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영어 정도가 그들의 소통 언어였고

딱히 할 수 있는 외국어라곤 영어 정도인데, 그마저도 영어권 국가의 유치원생 정도였으니까.


본영은 절망이 자신을 향해 잔잔히 밀려오고 있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아시아인이 그렇게 많은데, 중국인 일본일 한국인이 얼마나 많은데,

이 수많은 난민 중 한명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말이 되는 일일까.


그때, 본영의 귀에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지난 몇년간 듣지 못한 소리였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미이인-" 판판한 해변에서 그나마 좀 높이가 있는 돌 무더기 위에서 뒷꿈치를 들고, 누군가  소리치고 있었다.

지민이라고 자신을 칭하는 사람은 이제는 없었다. 그렇게 부를 만한 사람은 단 한명이었다.

태국에서 한국에 왔다가 한국에서 인생의 결정적인 기로로 들어서게 되었던던, 그리고 돌연 사라졌던.

외모가 몰라보게 바뀌어 어딘지 낯설었다.

그러나 저 몸짓, 이를 선명히 드러내보이며 웃는 환한미소를 보니 분명 이화였다.


이화는 반가운 듯 본영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본영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몇년 생사도 알지 못한 채 지냈던 그들의 사이는  점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본영은 수많은 난민 속에서 비슷한 피부색을 가진 동아시아인을 만나 소속감에서 느끼는 기쁨인지,

그게 이화이기 때문인지 아직 감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곧 시작될 경쟁이라는 것의 정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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