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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붐 Feb 25. 2024

이바노프와 정신위생

 몇일 전, 삶의 권태와 복잡함 앞에 완전히 몰락해버리는 어느 지주의 이야기를 그린 러시아 작가 안톤체홉의 '이바노프', 그리고 한국 작가 손창섭의 '잉여인간'을 함께 각색한 연극 '잉여인간 이바노프'를 봤습니다. 

단순히 몰락해간다는 말에 그 쇠퇴의 복잡다단함을 욱여넣기는 어려워요. 그는 드물게 유태인 아내와 결혼했고, 그 재산을 노려 결혼한 것이라는 소문이 오래도록 따라다니고 있었어요. 정말 사랑했으나 결혼 5년 차에 접어든 지금, 그에게는 공허와 극심한 피로만이 남았어요. 그 피로의 원인으로 말 하자면 대략 이런 것들..이라기 보다는 이 모든 것이 쏟아지듯 몰아닥치는 복합체로 작용했을 겁니다. 일년 간 내려야 할 비가 일주일 안에 다 쏟아지는 현상 처럼요. 그는 공허와 허무, 권태라는 물에 잠겨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말이죠.




유태인 아내와 결혼했고, 재산을 노려 결혼했다는 소문이 늘 따라붙었습니다.

결혼 5년차, 이미 아내를 향한 마음은 죽어버렸는데 아내는 늘 사랑을 갈구해요. 은근하게, 또는 대놓고. 게다가 폐결핵에 걸렸군요. 깊은 슬픔을 느끼지만 그 감정의 근원이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친구에게 빌린 돈의 이자를 친구의 아내에게 줘야하는데, 돌려줄 돈이 없습니다. 친구는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비상금을 쥐어주려하지만 이바노프는 더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며 거부합니다.

20살을 맞은 친구의 딸은 이바노프를 사랑한다고 끈질기게 고백해오고, 아픈 아내가 있는 집에까지 찾아옵니다.

같은 지방에 사는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친척 형은 늘상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합니다.

다 늙은 삼촌은 이바노프가 외출하려하면 늘 심심하다며 따라붙죠.

아내를 치료하러 오는 젊은 의사는 병들어 죽어가는 아내를 돌보지 않는 이바노프를 좇아다니며 질책합니다.

아내는 결국 폐결핵으로 죽게되고 일년 후 이바노프는 친구의 딸 사샤와 결혼을 준비하게 됩니다.




음.. 저는 그가 자신을 잃어버린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현재의 자신은 이미 없고, 늘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에 대한 생각에 젖어있는 사람. 삶의 중심이 과거에 쏠려있는. 그러니까 과거의 자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이바노프를 보며 저는 -일부분이지만- 제 모습을 봤어요. 저는 한때 주변 사람 중에서 열정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활력을 갖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시들시들해지더니 웬 다발성경화증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병을 진단받기에 이르렀죠. 벌써 그 후 햇수로 10년이 지났습니다. 내가 시들시들해진 게 먼저인지, 다발성경화증이 먼저인지는 알지 못해요. 닭이 먼저일까요 알이 먼저일까요. 닭과 알은 같이 찾아 온 거라고 생각해요. 


지난 10년 간 저는 무엇도 꾸준하고 근면하게 행하지 못했어요. 그럴 수 없는 상태였죠. 컨트롤하기 힘든 생리현상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몸의 중심이 불안해져 자주 비틀거렸습니다. 남과 다른 나를 배척하 듯한 타인의 눈빛 혹은 말 끝 어미에 상처가 생기곤 했어요.

무언가를 해보자! 도전하는 게 눈에 띄게 줄어들었어요. 스스로를 내놓기 두렵고 그런 내 모습이 수치스러워 세상으로부터 숨어들었습니다. 집 근처 반경을 벗어나지 않았고 기회만 생기면 어디 저기 남쪽 끝 같은 시골에 숨어들었어요. 자연을 벗하며 혼자를 지켰죠. 누구도 내게 상처 주지 않는 곳에서. 그 기간 저의 삶엔 어떤 손님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늘 나 혼자였죠. 간혹 찾아오는 감사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존재의 위안을 공유할 수 있을 뿐 그 외의 어떤 유익함도 발생시키지 못했어요. 그렇게 점점 혼자가 익숙했습니다. 불과 2,3년 전 까지만 해도 말이죠. 


지금은 더이상 숨어들지 않고 밖으로 나와있습니다. 언제 또 거북이가 껍질 안으로 들어가듯 숨어들지는 모르지만, 이제껏 충분히 해 봤던 것이기에 더는 택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2년 전 부터 일을 하고 있어요. 몸이 지나치게 편하고, 이렇다할 업무랄 것도 많지 않았기에 어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퇴직을 택하고 다른 일을 준비 중입니다. 동년배 친구들에 비하면 너무나 뒤쳐진 느낌이 들지만 어쩌겠나요, 하나하나 해나가야죠. 


숨어드는 쪽에서 바깥을 향해 나섰지만, 혼자를 지킨 10년이란 시간은 거대한 산맥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그 산맥이 유독 거대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세상과 제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존재처럼 느껴질 때. 다른 사람들이 저 멀리 정말 멀리 앞서있다는 걸 느낄 때 말이죠. 스스로 하는 일들이 모두 무용해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느껴질 때가 간혹 덮쳐옵니다.


경제면에서도, 관계면에서도 말이죠. 그런 걸 생각하다보면 스스로를 잃어버릴 때가 있어요. 나보다 어떤 면에서 훨씬 더 앞서나가고, 저 멀리 나아가고있는 이들을 볼 때면 그래요. 지금 제게는 거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느껴진다는 게 함정이에요. 

말도 안되는 불안과 우울이 덮치기 참 좋은 시절인거죠. 그런 순간이 잦아지는 시점을 돌아보면, 책이나 글쓰기 등 어떤 것에 온전히 집중하지 않을 때가 그랬다는 생각에 닿았습니다.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행위 중 최고봉으로 말하자면

명상, 독서, 글쓰기, 수영, 느린 조깅, 농구 드리블 연습 .. 등이 이 있네요. 물론 제게만 해당될 지 모르지만, 또 많은 이들이 해당될 지도 모를 일이군요.


그 중 특히나 책,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는 '내 스스로 하는 내면의 말'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 같아요. 점검하고, 수정보완 할 수도 있고 말이에요. 외부 세상 자극에만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내 스스로 하는 말이 쉽게 무너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내 스스로 하는 말에 의해 결정되고요. 또 선택과 행동에 의해 우리의 삶은 결정되겠죠.


쌀포대 끌듯이 질질 끌어서 하고자하는 말은요, 그러니까

유튜브, 숏폼컨텐츠 보다는 내 생각이 피어날 여백이 존재하는 것들을 하자는 거에요. 책을 읽는다던지, 낙서를 한다던지,멍때린다던지. 네, 아무래도 책을 읽는 게 가장 좋겠네요. -일단 스스로 부터. 습관을 들일 일입니다.


아무튼,

잉여시간에는 책 한 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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