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종이가 아까운 글은 쓰고 싶지 않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무들은 시시각각 베어지고 있으며 디지털- 인터넷 상에 부유하는 데이터 또한 '무제한'인 듯 여겨지지만 딱히 그렇지는 않으며 그 많은 데이터를 보관하기 위해 우리가 찾아볼 수 없는 어딘가 거대한 데이터 저장공간과 그게 과열되지 않게 냉각시켜줄 수 있는 설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요.
그러니까, 아무곳에도 쓰잘데기 없는 잡다한 허섭스레기 같은 배설물을 뿌려대고 싶지는 않다고요. 무한한 것은 없으니까요. 용량이 천배도 넘을 이미지/영상의 시대에 그깟 글자 쯤이야 뭐가 대수겠냐마는, 어쨋든 그닥 당기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쓰는 글의 내용이란 것은 고작 다음과 같은 카테고리를 벗어나지 못하니까요.
가장 힘차게 출발해야하는 20대의 어느 시점에서 발목이 꺾인 듯 오래 주저앉아있어야만 했던 나 자신,
나의 몸,
나의 몸 안에 있는 다발성경화증 이라는 괴랄한 증상,
내 삶을 지속적으로 아프게한 나와 내 주변,
몸 컨디션을 지속적으로 끌어내렸으나 약을 끊으니 좋아지기 시작한 몸,
약이라는 밧줄에 목을 걸어넣어 목숨을 부지하려는 환자들,
치료는 없고 표면적 증상완화만 있는 현대의학,
오래도록 낫지 않는 병과 약의 관계,
내가 먹는 것과 나의 관계,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인생 새출발을 하는 듯한 내 이야기,
출발선에서 발이 걸려 넘어져 그 주위에서 계속 맴도는 나의 연극 이야기,
이제 갓 30대에 접어들었을 뿐인데 급속도로 침침해지고있는 눈,
아득바득 글을 쓰려 하지만 이미 뇌의 일부가 고장났다는 체험 하나가 목 어딘가에걸린 듯 내가 글을 어떻게 쓰나 하는 식의 상념 같은 것들 밖에 없었으니까요. 음?
잠깐만요, 제 안에는 쓸 것들이, 써져야 할 만한 가치있는 것들이 차고 넘치고 있었네요. 어쨌든 어떤 식으로든 시작을 하면 무언가 나오는군요. 글.. 일단은 쓰고 볼 일이라는 생각이 더욱 강해지는 요즘입니다. 매일의 일관된 기록 속에 묻어나는 이야기 꾸러미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했던 것이 될 수도 있고, 어느 글에선가 좋은 재료로 활용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나의 볼품없는 기록이 모여 인생이라는 단단한 결합으로 모일 날도 있겠죠. 그렇게 믿고 매일 샤워하듯, 물 마시듯, 운동하듯 써볼 생각입니다.
오늘은 일찍이 집에 찾아온 여자친구와 함께 점심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밥을 할 때 콩나물을 잔뜩 넣고 표고버섯을 다수 넣었습니다. 다진마늘과 파를 썰어넣고 들기름을 더한 양념장을 뿌려 먹었습니다. 다발성경화증에 걸린 아들의 건강한 식사를 돕기위해 굳이 일주일에 한번씩 식재료를 배달해주시는 어머니 덕분에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곧 60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운전해서 반찬을 날라다 주고 돌아가실 때면 늘 감사함과 그 두배쯤 되는 부끄러움이 피어오릅니다. 하루 빨리 스스로 돈을 충분히 벌어들여 건강하고 좋은 식재료를 스스로 구해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어쩌겠나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기 위해,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좀 많이 느리더라도 말이지요.
여담이지만, 오늘은 데드스탁이라는 보물같은 빈티지 의류 사이트에서 꽤나 마음에 드는 옷 4벌이 4만원 정도에 배달왔고, 기분이 썩 괜찮군요. 데드스탁 득템을 두번 즈음 경험하면 일반 옷가게는 갈 수 없습니다. 보스 정장 자켓을 만원에 건지기도 하니까요. 무엇보다 저는 현재 주머니 사정이 녹록치 않고, 이럴때 빈티지는 패션의 자존을 지켜주는 튼튼한 동아줄에 가깝습니다. 또 데드스탁은 빈티지계의 레알마드리드, 파리생제르맹, 토트넘 이라고 할 수 있고요.
일을 나가지 않은 지는 좀 되었습니다. 작년 말 까지 1년 반 동안 출근하던 전시장에는 사람도 거의 방문하지 않아 사회적 단절이 컸고 젊음을 싼 값에 낭비하는 것 같았습니다. 늘상 탈출하고 싶었지만 막상 수입이 끊기니 좀 곤란하더군요.
매일 글 쓰고 운동하며 3월부터 출근할 다른 곳(비건 레스토랑 겸 바)에서 잘 해나갈 수 있는 체력을 기르는 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활발히 일하고 놀러다닐 수 있었을 가장 푸르를 청춘 10년 간 다발성경화증으로 골방에 틀어박혀 그것만은 무엇보다 분명하게 배운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기 다른 인생의 무늬가 있으며 무늬의 생성 시기 또한 각기 다르다는 것'
그러니 타인이 지금 어떻든 곁눈질 할 것 전혀 없다고.
그래서 이제는 조바심 내지 않고 차분히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 운동과 글쓰기를 합니다. 돈을 버는 건 그것 만큼 중요한 일이지만 그걸 위한 기반이 필요합니다. 건물을 올릴 때 기반 공사부터 하듯 늘, 언제나, 무엇에서건 기반을 잘 닦는 게 가장 중요하다 느낍니다. 상습적으로 몸이 무너져 무엇도 이어갈 수 없는 반복 속에 살아보니 말이지요. 몸의 항상성을 만드는 게 우선입니다. 꾸준함은 어디서든 꼭 필요한 덕목이며 꾸준함은 항상성에서 나옵니다. 항상성을 받쳐주는 건 건강이라고 씨-게 배운 10년 이었습니다. 최소한 건강에 휘둘리지 않는 상태를 만들어야겠죠.
지난 시간 무언가를 향한 믿음이 퍽 많이 무너졌지만, 기반을 닦는 게 중요하다는 것, 순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믿음으로 자리할 성 싶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행동 속에서 어떤 믿음을 만들어냅니다. 혹은 믿음에 의해 살아갑니다. 오늘 당신이 생성할 믿음은, 당신이 따르는 믿음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연속이 모여 2030년이라는 내일도 금새 현관 앞에 도달해 문을 두드리겠죠? 2024년 2월 20일 이라니 말도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