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포터
이 책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은 책 제목을 포함한 총 10편의 단편 모음집이다.
동일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장편에 비해, 각기 다른 캐릭터와 공간이 나오는 단편의 경우, 책을 읽고 난 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어 곤혹스러웠는데, 이 책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이 증상이 더 심한 편에 속했다. (읽을 때 분명 좋았는데 읽고 나서 뭘 읽었는지 모르겠다는 증상)
기억에는 보통 논리가 없이, 당시 사건과 내 감정 그리고 주위의 배경이 반자동적으로 한 데 뭉쳐 머릿속에 박혀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어느 특정 시점의 기억을 1인칭 화자가 회고하고 있는 이 책의 경우 뇌리에 남는 것이 특히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단순히 기억을 복기하는 것을 넘어 그 기억으로 인해 맞닥뜨리는 상호 모순적일 수도 있는 감정들을 서늘하고 담담한 문체로 그려냈다는 점을 두 번쯤 다시 읽으며 새롭게 발견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어떤 미래의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할 것 같지만 이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어쩌면 과거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서 나의 결핍을 메꾸고자 하는 욕구가 생각보다 강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가지고 있었지만 잃어버린 것이라던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인연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후회라는 것이 생각보다 굉장히 강렬한 감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머리가 깨진 아미쉬 부족 남자아이, 친했던 친구가 구멍에 빠져 죽은 일, 자신의 형이 겁탈했던 (했을 수도 있는) 여자의 모습 그리고 엄마의 동성 연인 같은 어쩌면 꽤 트라우마적인 사건을 꽤 담담하면서 묘하게 아련함을 자아내는 톤으로 묘사한다. 현재의 내가 아직 극복하지 못한 것 같은 상처에 가까운 기억을 꽤 담담한 톤으로 회고하는 화자에게서 서늘한 슬픔의 기운을 느꼈는데 그 사실이 동시에 꽤 고상하고 세련된 느낌을 받기도 한다. 고상하게 과거 상처를 더듬어 보고자 하는 화자라면 분명히 현시점에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은 아닐 거란 뜬금없는 생각이 들어서다.
현재 내가 행복하지 않을 때 유독 과거 어느 시점에 느꼈을 사랑, 애틋함, 그리고 친밀함 등을 그리워하게 되는 인간의 본성을 빌어 10편의 단편에서 나오는 1인칭 화자들의 과거를 회상하는 톤 앤 매너에서 우울감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 또한 흥미로운 점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이 책 어때? 물어본다면 서정적이고 우울한 기운을 뿜어내는 고상한 유화 같은 소설이라고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이 소설의 작가 특유의 작법이라고 해야 할까?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지만 과거 특정 시점의 배경과 행위를 담담하게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현재 화자가 느끼는 상실감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뇌리에 남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우리가 혼자된 세월 동안, 이 풍경은 내게 이상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때로 다른 시대 다른 삶에 속한 풍경 같았다. 나는 아직도, 어린 시절 누나와 함께 그 잔디밭에 앉아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거의 매일 밤 그곳에 나가 앉아 있곤 했다. 해는 숲가로 떨어졌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서 아련해져 갔다. 우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웃고 떠들면서, 길가 저 아래서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보이기만을 기다렸고, 그 불빛이 보이면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을, 우리가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며 두려워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어, 마음을 놓곤 했다.
<폭품>
아버지가 너무 그립다는 표현 대신, 과거 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안의 풍경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화자가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데, 이는 감정을 꽤 세련된 방법으로 전달하는 것 같아 나도 언젠가 사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10편 모두 작가가 이야기 속 캐릭터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해석해주는 대신 모든 감상과 결말을 독자에게 맡겨버리는데, 나는 내게 맡겨진 소설의 결말보다는 오히려 이 책의 작가가 궁금해진다. 수록된 단편에 나오는 화자는 모두 성별과 연령은 다르지만 모두 1인칭 시점이었기 때문에 결국 작가가 사념이 반영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되었고 이런 고상하고 서정적이면서 가슴 서늘한 소설을 쓰는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사람일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작가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작가 소개는 별로 없고 내년 새로운 단편 소설을 낸다고 하니 기대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