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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코로나 수동 감시자의 엄마입니다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아이 키우기

by 룰루박

1. 문자 한 통

예준이가 다니던 수학학원 선생님께 문자를 받았다. 내용은 자신이 코로나 확진자가 되었으니 번거롭지만 예준이와 부모님 모두 검사를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자신이 확진자가 되어 미안하다는 선생님의 장문의 문자를 받고 기분이 씁쓸했다. 그녀 역시 병에 걸리려고 걸린 건 아닌데 자신의 병을 타인에게 미안해해야 하는 그녀의 상황이 어쩌면 잠정적으로 나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괜찮다 몸조리 잘하셔라는 답문을 보내고 나니 오후 12시, 다음 미팅은 3시였다.



2. 교대역 10번 출구

외부 미팅이 연달아 두 건이 있었다. 1시 미팅은 취소하고 3시 미팅은 서류만 전달하자 결심하고 시계를 보니 12시, 나는 교대역 10번 출구 앞에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원래는 스벅이라도 가서 점심을 때우며 노트북으로 업무라도 볼 셈이었다. 그렇게 계획했던 게 불과 몇 분 전인데 선생님의 문자 한 통으로 내 몸뚱이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는 바이러스가 찝찝해 쉽사리 어느 곳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12시부터 3시, 이 3시간을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가방 속에 들어있는 노트북이 벽돌처럼 느껴졌다.




3. 길에서 콧구멍을 쑤시자

3시 미팅에서 간단하게 서류만 전달하자 했지만 여전히 사람을 접촉해야 했다. 이 미팅도 취소해야 할까? 그냥 서류만 전달하면 되는데 내가 너무 오버하나?



교대역 10번 출구 앞에서 15분간 서성거리며 내적 갈등을 겪는 나에게 꽂히는 빅이슈 판매 아저씨의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순간 타인의 시선에 민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여유가 있다는 뜻이겠구나 싶은 잡생각이 들기도 한다.


살짝 도른자처럼 왔다 갔다 하는 나는, 친정엄마의 전화를 받게 된다. 학교에서 급하게 조퇴하고 나온 아이가 반차를 쓰고 급하게 퇴근하던 아빠를 기다리며 집에 있다가 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어 상황설명을 꽤 자세하게 한 모양이다. 걱정스러워 하는 엄마에게 교대역 10번 출구 앞 나의 난감한 상황을 설명하자 약국 코로나 진단 키트를 사용하라는 아이디어를 건넨다. 나는 가장 가까운 약국으로 검색되는 서초역까지 걷기 시작한다. 약 700미터 앞 목표지점이 생기니 심란했던 마음이 잔잔해지고 한편으로 미션을 수행하는 게임 속 캐릭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진단 키트는 2회분에 16,000원. 그런데 진단 키트의 설명서 위 면봉으로 코를 휘젓는 그림을 보고는 또 당황한다. 약국에서 파는 진단 키트는 왠지 우아한 방법으로 검사할 수 있을 거라는 나의 편견 자체가 이상했던게지.



12시 30분이라는 시간의 특수성상 점심을 먹으러 나온 수많은 직장인 인파를 피할 곳은 그 어느 곳도 없어 보였다. 나는 또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약국과 점심을 먹으러(혹은 먹고 나오는) 인파 사이를 서성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좁은 골목 하나가 눈에 띈다. 또 심한 내적 갈등이 올라왔다. 그러던 중 진단 키트에 쓰여있는 15분 뒤에 결과를 알 수 있다는 문구를 발견한다. 그래 15분 뒤, 나는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나는 인파를 등지고 골목을 향해 쭈그려 앉아 키트를 뜯었다. 면봉으로 콧안을 10번 정도 휘젓기까지 약 10초도 안 걸릴 텐데 그 10초의 수치심을 감수하면 15분 뒤 내가 획득할 수 있는 안도감과 내가 오늘 계획한 to do list를 해치울 수 있다는 욕심이 수치심을 이겼다.



4. 애플 와치 피트니스 링 채우기

진단 키트에 그려진 선명한 줄, 음성이라는 사인을 보고도 여전히 나의 마음은 평안해지지 않았다. 정식 코로나 검사를 받고도 음성이지만 나중에 또 양성으로 나온 사람도 있는데, 길에서 스스로 시행한 이 진단키드의 결과지를 100% 신뢰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시계를 보니 1시 15분이었다. 약속시간까지 약 2시간 남짓 이렇게 미심적인 마음으로 아무 커피숍이나 들어갔다가 불특정 다수에게 민폐를 끼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자마자 기분이 끔찍해졌다.



서류를 전달하기로 한 장소는 선릉이었는데 카카오 맵으로 검색하니 서초에서 선릉까지 일직선의 길이었고 도보로 약 1시간 10분이 정도. 날이 생각보다 춥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그냥 걸어갈까 라는 미친 생각이 든다. 그 미친 생각이 어쩌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스스로가 납득되는 데까지 1분. 시간을 때울 수도 있고 또 ‘그간 매일 실패하던 애플 와치의 피트니스 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절호의 기회이지 아니한가’라는 어디 있었나 싶었던 긍정적인 생각을 조각모음 하여 걷기 시작한다.




5. 한 시간 반의 매몰비용

천천히 걸어 시간을 때우고 서류를 전달한다. 그런데 커뮤니케이션에 미스가 있어 다음 주에 만나기로 다시 약속을 잡는다. 3시 미팅에서 서류만 전달하면 오늘 나의 일은 끝이다라는 일념 하나가 소멸되고 오늘 나의 행동이 무용해지는 감각이 소스라치게 싫었다. 안 되겠다 싶어 최소한 이거라도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에 대치동 쪽에 있는 세무사무소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칼을 뽑았는데 정말 무라도 썰자는 심정으로 세무사무소에 서류를 넘기고 대망의 마지막 코스, 코로나 검사를 위해 대치동에서 강남보건소까지 걷기 시작했다. 약 800미터..



하나 간과한 것은 나의 체력(스테미너)이 몇 시간 전보다 현저히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보 800미터는 택시를 잡을까 말까 망설이길 네 번 정도 하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결국 강남보건소에 걸어 도착하게 되고 멀리 보이는 보건소 간판을 발견하고는 희열이 1초 정도 올라왔을 때 보건소 앞쪽으로 구만리 늘어져있는 대기 인원을 보고 바로 기가 질려버린다. 뉴스에서 계속 떠들어대던 확진자 7천 명 시대를 목도한 느낌이었다.



줄이 길지만 빠르게 줄어드는 걸 발견하게 된다. 올해 여름에 방문했던 서초보건소 대기 줄이 도통 줄어들지 않아 꽤 괴로웠던 기억이 떠오르고 그때보다 지금이 상대적으로는 좋은 상황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며 기분을 끌어올렸다.



빠르게 줄어들던 대기줄만큼 나의 핸드폰 배터리도 빠르게 줄어있었다. 하두 전화를 하고 카톡을 해서인지 배터리는 또 10퍼센트가량 남았었는데 검사를 다 받고 집에 갈 때 카카오 택시를 부를 정도의 배터리만 남아있으면 오늘은 12월 중 가장 운이 좋았던 날로 기억하겠다고 다짐을 한다.



6. 치킨, 아이

하루에 두 번이나 긴 면봉으로 콧구멍을 휘젓고 약 10킬로를 걷고 난 뒤, 카카오 택시 안에서 나는 기절하고야 만다. 눈만 살짝 감았다 떴다 싶었는데 집 앞이었다. 떡국을 끓여달라는 해맑은 예준이 말이 기억나 근처 슈퍼에서 떡국떡을 사서 집에 도착하니 갑자기 만사가 귀찮아진다. 떡국떡 봉지를 그냥 식탁 위에 올려두고 배달의민족에서 교촌 허니콤보를 시킨다.



떡국을 먹을 줄 알았던 예준이는 치킨을 보고 원래도 해맑은 아이가 더욱 해맑아진다. 그 찰나 보건소에서 예준이는 수동 감시자라는 문자를 받는다. 처음에 한국말이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가 한 번에 되지 않아 네이버에 <수동 감시자>라는 단어를 검색해본다. 하나같이 나처럼 혼란스러워하는 뉘앙스의 글들이 많았지만 결론은 확진자 접촉 이후 10일 동안 일상생활은 가능하되 코로나 검사만 2번 받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예준이에게 바로 전달할까 하다 치킨을 너무 맛있게 먹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살짝 망설인다. 뜯고 있는 저 치킨 닭다리만 다 먹으면 코로나 검사 한 번 더 받아야 한다고 얘기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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