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운명, 다른 운명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우리는 흔히 같은 뜻을 가졌거나 반대의 뜻을 가진 단어, 즉 동의어(同義語:synonym)와 반의어(反意語:antonym)를 함께 공부한다. 매우 유용한 방법이지만, 의외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는 방법이다. 사실, 단어를 공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한 단어를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그 단어가 가진 여러 가지 뜻에 해당하는 예문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그 단어와 연계해서 사용되는 단어들을 함께 익히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무턱대고 사전이 제공하는 동의어나 반의어를 외우다 보면 외어야 할 단어의 양이 늘어나서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것도 문제지만, 의미가 비슷해 보여도 용법이 다른 단어를 같은 단어인 양 착각하게 되어서 단어들 간의 미묘한 차이를 간과하게 되는 것도 문제다. 동의어라고 무심코 단어를 바꾸어 썼다간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가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Q] fate와 같은 뜻의 단어는?
① destiny ② boy ③ girl ④ adult ⑤ 보기에는 답이 없음
대부분은 이걸 문제라고 내냐는 듯 피식 웃으며 ①번을 고른다. 당연하다. fate도 ‘운명'이고, destiny도 ‘운명’이니. 그런데, 과연 fate와 destiny는 같은 뜻일까?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를 쓴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가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19세기 말 영국의 시인이며 문예지 편집인이었던 어니스트 헨리(William Ernest Henley, 1849-1903)의 시 〈무적의 태양신(Sol Invictus)〉에 나오는, ‘운명’과 관련된 유명한 구절이 있다.
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
내 운명의 주인은 나,
나는 내 영혼의 선장.
fate는 "신께서 말씀하시길(God say)"이라는 뜻의 라틴어 ‘fatum’에서 유래한 말이다. 신의 명령이니 인간으로선 피할 수 없다. 그리스신화에는 운명을 관장하는 세 여신이 나온다. 인간의 생명줄을 잣는 클로토(Clotho), 그 줄의 길이를 정하는 라케시스(Lachesis), 그리고 그 줄을 끊는 아트로포스(Atropos) - 통칭 ‘모이라이(Moirai)’라고 부르는 이 운명의 세 여신은 각각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리킨다. 이 운명의 여신을 영어로 표기할 때 흔히 ‘the Fate’라고 쓴다.
The Fate was not harsh on me that day.
운명의 여신이 그날은 내게 가혹하지 않았다.
* harsh 거친, 가혹한 ▶ be harsh on ~ : ~에게 가혹하다
The Fate was kind to me that day.
운명의 여신이 그날은 내게 다정했다.
* be kind to ~ : ~에게 친절하다/다정하다
신의 명령이니 피할 수 없다는 뜻이 내포된 ‘fate’는 죽음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래서 우리말로는 운명보다 ‘숙명(宿命)’에 가깝다. 인간은 여기에 굴복하거나, 끌려 다니거나, 받아들이거나, 맞서 싸운다.
그렇다면 ‘destiny’는 ‘fate’와 무엇이 다르고, 얼마나 다르고, 어떻게 다를까?
A person's destiny means everything that happens during his or her life, including what will happen in the future, especially when it is considered to be controlled by someone or something.
한 사람의 ‘destiny’는 미래에, 특히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에 의해 통제된다고 여겨지는 때에 일어나게 될 것들을 포함해, 그 혹은 그녀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fate가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안겨준 초월적 존재(신/자연)를 부각시킨다면, destiny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 인간의 의지에 주목한다. 이런 점에서 destiny는 명확히 정해진 것이기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확실성이 배제된’ 운명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통제하고 싶어 한다(=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통제권 안에 두고 싶어 한다),”란 문장을 영어로 옮긴다고 한다면 ‘운명’에 해당하는 단어는 fate가 아니라 destiny를 사용해야 한다.
She wants to be in control of her own destiny.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길 원한다.
* be in control of ~ : ~을 관리/제어/통제하다
어떤 단어든 그것이 가진 의미가 모든 상황에 적용되진 않는다. 상황에 따라 쓸 수도 있고, 쓸 수 없기도 하다. 가령, ‘멀다’와 ‘크다’가 결합한 ‘원대(遠大)하다’란 단어는 “그는 참으로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와 같이 희망이나 계획에 사용하는 것이지, 어떤 나무의 뿌리가 크고 멀리 뻗어나간 것을 보고 “저 나무의 뿌리는 참으로 원대하구나”라고 쓰지는 않는다.
이 두 개의 문장을 영어로 옮길 때 같은 단어나 표현이 사용되지 않는 사실을 통해 차이를 알 수가 있다.
His dream is truly grand.
그는 참으로 원대한 꿈을 가졌다.
The roots of that tree are so big and extend far away.
저 나무의 뿌리는 아주 크고 멀리 뻗어 있다.
* extend 길게/넓게/크게 만들다; 연장하다; 뻗치다
* far away 멀리 떨어져, 멀리에, 멀리까지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