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타임용이건, 시간을 내서 보건 한국의 상업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다수가 말하듯 (믿고 거르는 한국영화) 수준 미달의 영화도 많지만, 그런 영화들을 거치다보면 사막 속에 묻힌 보석 같은 영화들도 으레 발견하게 된다. <내 깡패같은 애인>, <스카우트>, <천하장사 마돈나> 같은 영화들이 내겐 그런 작품들인데, 뭐 대단한 작품들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유쾌하고 솔직한 한국 영화 특유의 질감이 묻어나는 작품들이라서 아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남자사용설명서>는 수많은 수준 미달의 작품들을 견디고 또 한 번 찾아낸, 재밌는 상업영화의 발견이었다. 젠더 감수성(?)이 한참 모자라 보이는 제목, 도무지 손이 안가는 포스터, 오정세와 이시영이라고 하는 어딘가 무게감이 부족한 배우들. 이런 이유들로 이 영화의 존재를 알고도 여러 번 미뤄둔 게 사실. 그러던 중, b급 감수성을 찾아 헤맨 나의 상황과 이 영화를 향한 호평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비로소 꺼내든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 매력이 보통이 아니다. 감독의 톡톡 튀는 연출, 영화에 착 들어맞는 배우들의 연기, '로맨틱'과 '코미디' 를 표방하는 장르의 충실함까지. 무엇보다 재밌고 독특하다.
이 영화의 매력을 딱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역시 배우 오정세다. 다소 저렴(?)해 보이는 외모와 그간 오정세라는 배우가 가진 코믹하고 주변부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이 영화에서만큼은 슈퍼스타다. 도무지 슈퍼스타같지 않은 오정세가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덕에, 다소 평이하고 밋밋해보일 수 있는 영화의 전체 줄거리는 새롭게 피어난다. 오정세가 영화 속 내내 찌질함을 담당하고 b급 유머를 건네는 동안, 상대적으로 진지하고 무거운 캐릭터인 이서영의 성장 서사가 힘을 받는다. 오정세와 이서영. 두 상반되는 캐릭터의 시너지를 통한 웃음과 서사의 반복, 그렇게 b급 코미디 영화는 로맨틱 멜로 영화로 마무리하며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도무지 진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영화가 결국 성공적인 로맨스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건, 뒤틀리고 어설픈 유머 속에 묻어나온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한없이 웃기다가도 그 안에서 솔직함을 뽑아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캐릭터를 만든 배우 오정세는 정말 발군이다. 이 영화에서 오정세를 대체할 만한 배우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다. 그만큼 배우 오정세의 연기와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그냥 오정세라는 배우만이라도 보러가시라, 말씀드리고 싶을 만큼 강렬하다.
감독의 연출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극한직업>의 b급 유머가 대중적으로 큰 조명을 받고 있지만, 글쎄, <남자사용설명서>에 비하면 <극한직업>은 참으로 얌전한 영화라 하겠다. 영화의 웃음은 오정세의 연기와 더불어 감독의 '약 먹은 듯' 한 연출에 있다. 발가벗고 운전하다가 음주측정을 마주한 슈퍼스타, 오열하며 몸부림치는 오정세를 감싸며 흘러나오는 가곡. 이 얼마나 미친 상황과 음악인가. 유치한 농담이나 오버스러운 분장 같은 어설픈 b급이 아니다. 철저히 b급 코드에 맞는 관객만 웃겨보이겠다는 고집스러운 코미디다. 얕은 물에 송사리 몇 마리를 잡기보다, 심해의 대어 한 마리를 노리겠다는 뚝심이 보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잘 보이기 위해 향수를 잔뜩 뿌린 오정세를 향해 휘발유를 뿌렸냐며 경멸하는 이서영의 눈빛이 생각나, 키득거리고 있다.
좀 더 수려한 표현과 논리로 이 보물 같은 영화를 추천하고 싶지만, 나는 그런 능력이 없거니와, 그렇게 소개해서도 안 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미장센이니, 카메라 워킹이니 복잡하고 어려운 용어로 이 영화의 매력을 설명할 수 없다. 거칠고, 유치하며, 어설프고, 사소하다. 하지만 쉽고, 유쾌하고, 솔직하며 무엇보다 웃기다. 내가 한국의 상업 영화들을 사랑하는 건, 이런 사소한 이유들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같은 기념비적인 걸작도 좋지만, 가끔 우울한 날에 홀로 키득댈만한 유쾌한 농담이 가득한 영화들도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남자사용설명서>는 충분히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