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펑샨 호커센터
호커센터는 싱가포르의 개방형 푸드 코트입니다. 호커센터에서 만난 싱가포르를 글로 남깁니다.
85 Bedok North Rd, Singapore 460089
싱가포르에서 혼자 다녔다.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처럼 홀로 식당을 찾았다. 호커센터에서 말없이 낯선 음식을 음미하길 좋아했고, 덕분에 ‘싱가포르스러움’을 만끽한다고 믿었다. 외국인이 놓치고 갈 현지인의 음식과 공간을 경험한다는 생각에 남몰래 뿌듯해하곤 했다.
기숙사 옆 방에 Eugene이라는 친구가 살았다.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그간 함께 학교 밖에 나가 밥 먹은 적이 없었다. 학기가 끝나가던 어느 주말, 그가 나를 동네로 초대했다. 내가 호커센터를 좋아하는걸 알곤 싱가포르 최고의 호커센터를 간다며, 친구들과 저녁을 먹자고 했다. 그가 말한 곳은 펑샨 호커센터였다. 이곳은 주소 때문에 버독 85라고도 불리는데 오래된 맛집이 많기로 유명하다.
기꺼이 펑샨 호커센터에 따라갔고 Eugene의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은 살기 싫은 싱가포르에 온 걸 환영한다며 나를 반겼다. 말도 많고 까불거리는 녀석들이었다. 싱가포르에서 뭐하고 노냐 묻기에 준비된 대답, 호커센터를 말했다. 이어 내가 펑샨 호커센터에 처음 왔다 하니 뭐랑 뭐를 꼭 먹여야 한다고 지들끼리 신나게 떠들었다. 얜 우리와 어울릴 수 있겠다는 만족감이 그들 얼굴에 비쳤다.
자신들 스타일대로 주문하겠다며 가만히 기다리랬다. 동네 친구들끼리 모이면 늘 먹는 게 있단다. 바비큐 스팅레이(가오리)부터, 삼발 소스에 볶은 캉콩(공심채), 오이스터 오믈렛, 피그 포리지(죽)와 박쵸미(고기 국수) 그리고 사테(꼬치구이)를 시켰다. 여기에 슈가 케인 주스까지, 혼자 와선 결코 시키지 못할 양이었다. 놀라는 내게 친구들은 ‘얘가 아직 뭘 모르네’라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팅레이나 캉콩이 다른 곳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데 반해, 펑샨 호커센터의 박쵸미는 특별하다. 호커센터들에 국물 없이 나오는 박쵸미는 많은데, 이곳처럼 국물(수프)로 나오는 가게는 몇 안된다고 한다. 짭짜름한 고기 완자와 맑고 칼칼한 육수가 어울린다. 여기에 칠리 파디(동남아 고추)까지 넣으면 싱가포르 스타일의 이열치열이 완성된다. 노란 면을 건져 올릴 때 으깬 고기가 묻는데, 매운맛 사이로 그 고소함이 혀를 잡아끈다.
함께 음식을 먹으며 자리에 스며들었다. 어색함을 느낄 새가 없을 만큼 유쾌한 친구들이었다. 한국인과 싱가포리언이기 이전에 같은 또래였다. 취미와 연애부터 취직 등 딱딱한 주제까지 자연스레 이야기가 오갔다. 시답잖은 농담에 핀잔을 줄 땐 오래된 친구 같았고, 어느덧 질펀한 욕을 주고받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호커센터에서 질세라 떠들다 보니 다들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피그 포리지가 마지막으로 나왔다. 한 친구가 이 역시 펑샨 호커센터의 명물이라고 소개했다. 하얀 죽 위로 날계란이 풀려있고 안에는 요우티아오(밀가루 빵)와 돼지고기, 센츄리 에그(피단) 등이 들어있었다. 밍밍하지 않게 간이 되어있는데, 무엇보다 양이 어마어마하다. 박쵸미와 다른 음식들부터 비우고 피그 포리지를 먹는데 양이 쉽게 줄지 않았다.
우린 식사를 마치고도 일어날 줄을 몰랐다.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앉은자리에 한참을 있었다. 이런 자리가 있으면 일찍 불러줬어야지 않냐는 내게 Eugene은 웃으며 또 오라 말했다. 돌아가는 막차를 타야 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났고, 또 보자는 인사로 친구들과 작별했다. 고독한 미식가를 흉내 내며 혼자 호커센터를 다니다 처음으로 싱가포리언들에 섞인 날이었다.
그로부터 한 보름 뒤 한국으로 떠났다. 돌아와 싱가포르가 생각나면 가끔 사진들을 뒤적인다. 다행히 아직은 호커센터 사진으로부터 음식들과 냄새가 옅게나마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펑샨 호커센터는 친구들의 표정과 몸짓, 웃음소리까지 뒤섞인 채 진하게 남아있다. 늦게 발견한, 어쩌면 가장 ‘싱가포르스러운’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