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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스토끼 Apr 22. 2019

제노바 백반집

제네바 가는 거 아니야?

                                                                                    

남편에게 처음 제노바를 들리겠노라 선포했을 때 들었던 질문이다. 제네바는 스위스, 제노바는 이탈리아에 있는 도시로 제노바는 이탈리아 여행 루트를 짤 때 흔히 선정되는 곳은 아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제노바라는 곳을 처음으로 찾아보았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고향이자 이탈리아 제 1항구. 인터넷에서도 많은 정보가 나와있지 않은 생경한 도시를 일정 사이에 살짝 넣어두었다.


몬테로소 알 마레 역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지났을까. 역시나 제노바 역에서 내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물며 어느 여행지든 적어도 한 명은 볼 수 있는 한국사람도 이곳에서는 볼 수 없었다. 이럴 땐 내가 콜럼버스가 된 것처럼 새로운 미지세계를 탐방하고 있다는 일종의 희열이 느껴진다. 좋아. 이곳을 탐험해보자 하는 마음.





숙소는 역 근처로 잡아두었는데 구글맵이 하나도 먹히지 않는다. 구글맵에 따르면 말도 안 되는 가파른 경사를 올라가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그곳에는 호텔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내리쬐는 8월의 태양 아래에서 큰 캐리어 3개를 끌고 -다음부터는 절대 짐을 많이 가져오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어디 있을지 모르는 숙소를 찾는 일은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게 만들었다. 결국 찾아낸 호텔은 역에서 직진만 하면 되었으며, 놀랍게도 이 더위에 선풍기만 있는 방으로 예약이 되어있다고 말했다.


- 에어컨이 있는 방으로 업그레이드할래?

- 얼마를 더 추가하면 될까?

- 20유로


20유로의 추가 지출이 있었지만 방은 넓고도 시원했고, 이제는 밥을 먹으러 가볼까 하는 의지가 생겨났다. 근데 정말 제노바에 대한 정보가 아무 곳에도 없었다. 인터넷에 쌓인 여행지 맛집을 모두 믿는 편은 아니지만 참고를 할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초록창을 뒤로하고 YELP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YELP가 이탈리아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제노바 백반집을 소개해준 것은 운명의 데스티니였다.



제노바 백반집


점심때가 지날 듯 말 듯 한 시간에 현재 열려있는 레스토랑 중 이탈리안을 먹을 수 있는 가까운 곳은 많지 않았다. Ostera la commenda는 좋은 평도 나쁜 평도 함께 있었지만 거리적 이점을 무시할 수 없어 목적지로 선택했다. 지중해성 기후 덕분에 그늘에 가면 시원했지만 땡볕 아래에서는 사막만큼이나 죽을 것 같은 더위였다. 배를 부여잡고 도착한 레스토랑에는 기다리는 사람들 두세 그룹과 빈자리 여러 개가 있었다.


다행이야! 우리 들어갈 수 있겠어!라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예약은 했나요?"라는 질문이 훅 들어왔다. 물론 예약을 하지 못했다. 안에 자리가 많이 있으니 충분히 웨이팅을 해도 점심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헌데 앞의 그룹이 다 들어가고, 자리가 비어있음에도 우리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 우리 지금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거야?

- 일단 기다려보자.


쉽게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나와는 달리 차분한 성품의 여행 메이트와 함께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수많은 이태리어가 오가는 사이에서 이곳의 웨이팅을 더 기다릴 것인가 말 것인가 내적 고민이 극에 달할 찰나에 우리 자리가 났다며 테라스 자리로 안내했다.




두 번째 난관에 봉착. 메뉴판이 전부다 이탈리아어. 영어로 설명해주는 배려 따위는 전혀 없다. 전식, 메인, 와인, 물, 커피를 포함한 가격이 12유로라는 것 외에 알 수 있는 단어가 1도 없었다. 구글 번역기를 켜놓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주문을 하려 하니 옆의 식당 직원이 아주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듯 옆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불평의 말을 하고 -내 기분 탓일지 모르지만- 있었다. 옆 테이블의 부자지간이 시킨 참치 요리가 맛있어 보여 물어보니 그건 이미 솔드아웃이란다. 대체 그럼 되는 게 뭔지. 남편은 한국에서도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 아니고서야 실제 우리나라 사람들이 맛집이라고 여기는 곳들의 대부분은 영어메뉴판이 없음을 상기시키며 여기 또한 제노바의 백반집이 아니겠냐고, 그래서 그런 걸 거라고 나를 이해시켰다.


일단은 해안가에서 무조건 시켜야 한다는 해물 튀김(Frito misto) 그리고 홍합찜을 시켰다. 메인은 링귀네 봉골레와 스파게티 봉골레. 이제사 링귀네와 스파게티의 차이가 면의 굵기 차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때 알았더라면 다른 메뉴를 시켰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와인은 물론 화이트로. 병에 담겨 나오는 화이트 와인을 보고 와이너리에서 떼 오는 와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 보니 하우스 와인을 병에서 따서 주는 시스템. 맛은 일품이다. 친절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맛있으니 까방권을 갖고 있다는 건가.



여긴 내가 먹어본 이태리 음식 중 최고야!


감히 얘기할 수 있는 제노바 백반집. 홍합과 해물 튀김 위에 레몬즙을 쭉 짜서 먹으니 비린내는 온데간데없고 재료 본연의 맛만 남았다. 무심하게 만든 것 같은 플레이팅의 봉골레는 여름토마토의 풍미와 조개의 조화로움으로 이 세상의 맛이 아니었다. 여기에 화이트 와인이라니. 게임 끝이다. 동양인을 무시하는 것 같아 열 받았던 마음도, 배가 고파 죽겠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이태리어만 오고 가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기다림의 시간도 모두 보상받는 것 같았다.


아. 이 정도의 내공이 있는 집이라면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겠다. 물론 여기에 이방인에 대한 친절함과 상냥함이 더해졌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여행지에서 친절을 바라는 마음도 사치이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몇 번씩 이야기가 나오는 제노바 백반집. 이곳만을 가기 위해서라도 제노바에 다시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집에서 나와서 땡볕을 걸어 다니다 여행 메이트는 더위를 먹어 오후 내내 잠을 잤어야 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숙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우리의 제노바라는 여행지가 매력 있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행과 음식은 늘 세트라고 생각하는 여행자에게는 감히 추천하고 싶다. 이태리의 콧대 높은 불친절함을 감수하고 해안가 지방의 백반을 먹고 싶다면 꼭 이곳으로 향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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