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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스토끼 Aug 28. 2019

몬테로소 알 마레와 7번 국도  

해안도로와 친퀘테레


엄마는 내가 기억이 날 즈음부터 나와 동생을 데리고 여행을 다녔다.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아빠의 고향인 경주에 가는 길을 선택하라고 형광펜을 쥐어줄 때였다. 지금처럼 모바일 지도나 네비가 없었던 어렸을 때, 전국 각 지역의 길이 나와있는 두꺼운 책은 늘 차 뒷좌석에 놓여있었고, 부록으로 들어있던 전국지도는 방에 상비되어있었다. 우리 집은 특이하게도 상비약처럼 상비 지도가 있는 집이었다. 


지도를 보며 길을 만들 때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엄마가 정한 명소 -예를 들면 제천 의림지, 안동 도산서원, 울진 성류굴 등- 를 꼭 넣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을 미리 동그라미 쳐놓고 난 후 경유지를 들러 경주에 가는 길을 동생과 내가 정했고 그 루트를 최대한 존중하며 가주는 것이 엄마의 방식이었다. 


아빠는 꽤나 이 과정들을 귀찮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열정이(고집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아 가끔 고마운 마음이 든다. 친퀘테레를 정했던 이유는 7번 국도가 기억나서였다. 동해를 옆에 끼고 태백산맥을 따라 우리나라의 등줄기를 내려가는 7번 국도. 교육열 또한 높았던 엄마의 라디오 팝송 녹음 신공으로 만들어진 테이프 사이로 흘러나오는 수잔 잭스의 'Evergreen'을 흥얼거리며 바다를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동해안 어딘가에서 민박에 갑자기 들어가 라면을 가족끼리 끓여먹었던 기억도 좋은 감정으로 남아있다. 친퀘테레와 7번 국도의 공통점은 해안도로인 것 밖에 없지만 이태리의 해안도로라니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 마을 중 왜 몬테로소 알 마레? 


이태리에서의 일정을 마친 후 스위스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그중에서도 몬테로소 알 마레 역이 밀라노로 바로 갈 수 있는 기차가 정차하는 역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이곳에서 하루 지내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다섯 개의 마을 중 하나를 정하라고 하면 마나롤라를 정한다. 대한항공 CF에 나와서 유명하기도 하고 색색깔의 예쁜 집들이 둘러서 있는 곳에서 보는 야경이 멋지다고 소문났기 때문이었다. 이미 1박씩 메뚜기처럼 점프 뛰기를 하고 온 친퀘테레라 다섯 마을을 다 다닐 힘과 여유가 없는 우리는 몬테로소 알마레만 들리기로 했다. 피렌체-피사-라스페치아를 지나 도착한 그곳은 해안가 느낌이 물씬 나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현지인들에게도 휴가철인 때라 숙소를 구하기 매우 어려웠고, 좁고 비쌌지만 이렇게 바가지도 써보는 거라며 서로 얘기한 후 짐을 풀고 해변가로 나갔다. 우리나라에서는 빼꼼 나온 내 뱃살이 신경 쓰여 입지 못했던 비키니도 자신 있게 입고 활보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는 자유로움, 신경 쓰지 않음의 미학. 맥주를 한 병씩 사서 해변가에 자리를 잡았다. 해수욕도 한번 해볼까? 하고 들어간 바다는 부드러운 모래밭이 아닌 자갈밭이었다. 자연 지압으로 발이 따끔을 넘어서 욱신거렸고, 최악은 파도 사이를 헤집고 바다에서 나올 때였다. 


- 자갈 바다는 처음이네. 


하면서 웃어주는 여행 메이트가 있어 발바닥은 아팠지만 행복했다. 


한 여름밤의 카르파쵸 


- 8시로 예약해주세요. 


낮잠을 한 숨 자기 전에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을 검색한 뒤 예약을 먼저 했다. 나는 이탈리어를 못하고, 종업원은 영어를 잘 못했다. 내가 예약한 내용을 잘 숙지했을지 궁금했지만 '안되면 말지 뭐'라고 생각하며 꿀 같은 낮잠을 청했다. 



숙소와 정반대에 있는 Da eraldo는 걸어서 족히 20분은 걸릴 만큼 멀었다. 오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아직 다 넘어가지 못한 태양이 구름에 걸렸는지 핑크빛 바다 하늘이 무척이나 예뻤다. 레스토랑에 간다며 머리를 몇 번이나 묶었다 풀었다 반복을 했고, 시덥잖은 얘기를 하며 걸었다. 길의 끝에는 레스토랑으로 통하는 터널이 있었다. 분수도 있고 가게도 많은 이곳은 몬테로소의 시내였다. 워낙에 작은 마을인 탓에 레스토랑을 찾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식사시간이 임박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대기 중이었다. 유럽에서는 대기가 늘 일상이다.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기다리지 않으면 화가 나기 참 쉽다. 느긋함의 미학을 어쩔 수 없이 배우게 되는 몬테로소의 밤. 시작은 화이트 와인으로. 여행 이후 여름=이탈리아=화이트 와인 공식이 생겨버렸다. 



한 여름밤의 카르파쵸. 화이트 와인과는 안성맞춤이었던 메뉴 선택. 그 전날 피렌체에서는 바깥쪽이 무지하게 더웠던지라 여기서는 안쪽 자리를 달라고 했는데 여긴 또 안이 무지하게 덥다. 바깥쪽으로 자리를 바꿔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하여 테라스 자리로 옮겨왔다. 한결 나은 기분. 더위도 참으면 익숙해질 수 있는 종류인가 고민해보았다.



이태리 음식점에서는 전채-본식-후식의 순서로 보통 먹게 마련인데 우리는 그 모든 코스를 먹기에는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빼놓지 않은 것이 있으니 바로 후식. 여기서 이 아이스크림을 안 먹으면 엄청나게 후회할 것 같았다. 둘이서 찜질방에 온 것처럼 땀을 삐질거리면서도 행복했다. 좁은 골목마저도 사랑스러웠고 조금만 나가면 해변을 볼 수 있는 것 또한 낭만적이었다. 


해외여행을 많이 해보지 않았던 여행 메이트가 이제 와서 말한다. 여행은 다녀온 이후에 더 생각이 난다고. 그때 느꼈던 공기의 감촉과 분위기가 여행지에서의 설렘을 되새기게 해 준다고. 무더운 여름이 되면 화이트 와인과 카르파쵸가 생각이 나서 사진을 들춰보고 노래를 틀어놓는다. 마음만은 늘 몬테로소 알 마레에 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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