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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스토끼 Sep 02. 2019

38도 피렌체의 야외 테라스

여름 이탈리아 여행은 잘못된 선택인가?


7말 8초에 이탈리아 여행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지만 딱 한 도시에서만은 후회했다. 바로 피렌체. 누군가에게는 '냉정과 열정사이'의 도시인 피렌체가 이태리에서도 원탑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에겐 더위와 갈증의 도시로 기억된다. 피렌체 역 바로 앞의 숙소에서 두오모를 보러 가는 길부터 난 알 수 있었다.


- 망했구나.  



내리쬐는 햇볕. 하루 중 가장 덥다는 오후 2시에 두오모를 보러 나가는 길. 사진으로도 표현이 차마 안 되는 이곳의 온도는 38-9도를 웃돌고 있었다. 태양뿐만이랴.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아.. 무엇을 위해 피렌체를 왔는가. 나는 왜 여행 계획을 짜는 것만 좋아했지 날씨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못했는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 어려울 땐 어쩔 수 없지. 맥주다.


이탈리아는 참 특이하다. 와인을 찾기는 그 어느 나라보다 쉽지만 맥주를 찾기는 제법 어렵다. 그냥 보이는 레스토랑 아무 데나 마구잡이로 들어갔다. 계획한 곳만을 가는 나답지 못했다. 무더위 속 맥주 한 잔으로 80% 올라온 짜증을 쓸어내렸다. 지금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누군가가 여름에 이탈리아만을 간다고 하면 한번 더 고민해보라고 얘기할 것 같다. 다만 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럭저럭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진짜 피렌체는 석양이 진 뒤



점심시간의 고된 행군을 만회하기 위해 Yelp를 뒤적거렸다. 전혀 번화가가 아니었던 Osteria santo spirito가 오늘 우리의 픽! 산토 스피리토 광장에 있는 이 레스토랑의 평가를 보니 제법 괜찮군. 점심에 미리 예약을 해두었기에 슬슬 숙소를 떠났다. 석양이 비추는 강변은 여행 메이트의 땀이 나는 손이라도 꽉 잡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낮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강변을 함께 걸었다. 나는 로컬들이 가는 음식점을 좋아하지만 이곳은 정말 한국인이 단 한 명도 없었고 꽤나 외진 곳이라 구글맵이 나를 옳은 곳으로 인도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마침내 도착한 Osteria santo spirito는 예약자들도 줄을 서있어야 하는 그런 곳이었다. 오-예스. 내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우리가 왔음을 알리고 자리를 주기 전까지 기다리는데 미처 예약을 하지 못한 관광객들이 웨이팅 리스트에라도 이름을 올리기 위해 분주했다.


- 자리는 가게 안과 테라스가 있어. 어디로 할래?

- 당연히 테라스지!


식사를 하는 동안 해가 질 예정이고 그렇다면 이 무더운 피렌체라 하더라도 야외 테라스 자리가 옳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먹는 내내 하나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즐겁게 식사를 하는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테라스 자리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트러플 뇨끼가 매우 우수하다는 평과 모든 파스타를 반 접시씩 시킬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파스타를 반씩 시킬 수 있다니 신박하다 신박해. 오늘은 스테이크랑 파스타니까 레드와인으로. 와인 가격대가 합리적이라 바틀을 시키지 아니할 수 없었다. 한국 절반 값도 안된다. 이태리 만세.  


Tagliata di manzo con rucola e scaglie di grana
Gnocchi gratinati ai formaggi morbidi al profumo di tartufo / rigatoni napoletani


파스타는 말해 무엇하나. 파스타에 대해 내가 논할 자격이 있는가. 파스타의 고장 이탈리아에서. 모든 메뉴는 반씩만 시켜서 여러 가지를 맛볼 셈이었는데 성공도 이런 대성공이 없다. 이 레스토랑만을 위해서라도 피렌체는 꼭 오고 싶을 정도가 되었으니 말이다. 


여행을 다닐 때 관광지로 유명하지 않은 레스토랑을 방문하면 절반의 실패와 절반의 성공이 기다리고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나는 아주 가끔 안국역에 가서 시장길을 둘러보며 가장 좋아하는 주꾸미 볶음집을 향해 간다. 2차는 방송에 나오기도 한 유명한 해산물을 파는 곳에 가서 소주를 마실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엔 연남동에 기사식당으로 가 여행 메이트와 막걸리에 보쌈과 감자탕을 먹을 수 있겠다. 아차. 월급날이라면 홍대에 있는 소곱창집에서 쏘맥을 말아 볶음밥까지 야무지게 먹고 오겠지. 지금 위에 언급한 곳들은 외국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많은 그런 곳. 난 여행을 다니면서 현지 사람들이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들과 어딘가를 가고 싶을 때 기억나는 음식점을 가고 싶다. 


아마도 이 음식점은 38도의 햇볕과 그 무더운 공기 속의 습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추억될 것이다. 여행은 준비하면서 설렘을, 여행 중에는 여러 가지 생각을, 여행이 끝난 후에는 기억과 추억을 준다. 육아로 발이 묶여있는 지금, 저 파스타 한입만 먹으면 힘이 솟아날 것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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