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소외감
불완전하지만 인간의 순수한 흔적을 나타내는 자연스러운 이 도시의 색감과
그 흔해빠진 프랜차이즈 하나 없으며, 네온빛 자본주의, 술 그리고 희로애락이 없는 이 고요한 도시는
놀고 싶지만 자야만 하는 일요일 밤 같다.
특히 평소 도시를 좋아하는 나는 일요일 오후 2시처럼 지루하고 쳐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이 지루함은 개인주의에 지배된 내가 사람을 찾게 만들었다.
이런 행동은 그동안 고집했던 나의 본질에 모순점을 찾게 만들며
타인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좋은 무대를 제공한다.
얌생이처럼 내리는 빗속에서 습한 과일 냄새가 코를 찌른다. 골목을 마주하고 처음 맞이 한 프레임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순수한 파란색과 낡은 돌벽 사이, 편의점에서 팔 것 같은 우산을 들고 있는 귀여운 아이와 빵을 담아주는 누군가의 손 밖에 안보였다. 수줍게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금액을 확인하는 아이의 모습은 디즈니 영화를 연상케 했다. 평소 사람이 붐비던 이 평범한 거리는 이 순간만큼은 완벽한 영화 세트장 같았다.
도시 특유의 파란색을 내기 위해서는 걸쭉한 물감, 세월 그리고 인간의 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정교하지만 서툰 파란색을 볼 때마다 페인트칠을 하는 사람들의 과정을 상상하곤 했다.
기분 탓인 걸까? 인도의 조드푸르도 그렇고 쉐프샤우엔도 마찬가지로
도시 특유의 파란색은 참 희망적이다.
배를 채우기 위해 들어간 밥집 메뉴판을 펼친 순간, 평소 편식을 심하게 하던 나에게 고문 같은 글자들 밖에 안보였었다. 여기도 채소 저기도 채소.. 강렬한 육식주의자인 난 초록색을 보고 벌벌 떨었다. 하지만 그 순간 메뉴판 구석에서 빛나는 감바스라는 단어를 발견했고, 고민 없이 바로 웨이터에게 주문했다. 배가 고팠던 나는 음식이 나오자마자 이성을 잃었으며, 훈련소 첫째 날 먹었던 석식처럼 레몬즙을 새우에 뿌려댔으며 삐쩍 마른 레몬껍질을 입에 물며 조금의 과액도 남기지 않고 다 씹었다.
다 말라비틀어진 감자튀김은 그 어느 미국의 맛보다 맛있었으며, 대충 오븐에 구운 닭다리는 뉴델리에서 먹던 탄두리치킨보다 맛있었다. 참고로 저 당근, 고수 그리고 올리브 같은 음식은 이쁘게 남기고 나왔다.
하루에 5500원 정도 했던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고 굽굽했던 게스트하우스에서 비를 털어내고 공용 테라스에 나갔을 때다. 개운한 몸을 이끌고 비 내리는 산맥을 바라보며 소파에 앉아 영화 저수지의 개들에 나오는 마이클 매드슨처럼 담배를 꺼내 고독한 마초남처럼 불을 붙이며 빗줄기를 바라봤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꿀맛이었었다.
아무튼 얼마 이후 한 모로코 친구가 샌프란시스코 한 복판에 있는 듯한 유창한 영어발음을 하며 나에게 악수를 건넸다. 뻔하디 뻔한 스몰톡을 하며 호구조사를 마친 뒤, 이 친구는 힘들어서 움직일 수 없던 나에게 저녁식사 제안을 했다. 게스트하우스 호스트에게 근처 괜찮은 식당을 물어보려던 찰나에 시장에 가서 재료를 구입해서 집에서 해 먹자는 말을 듣고 너무나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이 약한 난 반 강제적으로 또다시 비를 맞으며 그를 따라 시장에 갔다.
첨벙첨벙 싸구려 나이키 에어맥스에 흙갈색 패턴이 생겼을 무렵, 그 모로코 친구의 양손에는 감자, 파프리카, 토마토 그리고 향신료가 있었으며, 재료들을 본 난 즉각적으로 큰일 났음을 인지했다. 아무튼 돌아와서 나는 자연스럽게 가방 속에서 라면을 꺼냈다. 다행히 그가 만들어준 타진에는 소량의 닭가슴살이 들어가서 조금 위안은 됐다. 식사를 마치고 김정은 이야기만 2시간을 한 뒤 그와의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었다. 밤이 깊고 눅눅한 침대에 누워 어김없이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행복한 소외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비둘기보다 고양이가 많은 도시는 처음 봤다. 글을 쓰며 한숨 돌리기 위해 앨범을 뒤지던 중 쉐프샤우엔의 방범대들의 모습이 귀여워서 사진을 추가했다.
새벽 2시쯤인가, 저녁에 마신 맥주 때문에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방을 나왔다. 테라스에서 들려오는 아마추어의 선율을 따라가 보니 디카프리오 느낌만 나는 친구가 곰방대에 담배를 태우며 기타를 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인사하며 옆에 앉아 헤비 스모커처럼 담배를 피우며 그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캐나다에서 온 이 친구는 인도 푸쉬카르에서 많이 봤던 히피였다. 진보주의적인 사상을 갖고 있던 이 친구는 신청곡을 요구했으며 나는 레이디가가의 'Born this way'를 요청했다. 경멸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다른 곡을 신청하길 부탁했고, 음악은 충분히 들었으니 그 곰방대나 같이 태우자고 했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다른 도시로 출발해야 했던 나는 이 자유로운 친구와 새벽 4시까지 이야기하며 새벽을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모로코 친구도 깨는 바람에 세 명이 모여 몰래 맥주를 마시며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아침 6시, 테라스 소파에서 잠든 이 친구들을 뒤로한 채 방으로 들어가 짐을 싸고 배낭을 챙겼다. 그들이 깨지 않게 그 건물을 나오면서 구석에 있던 먼지 쌓인 지역 신문지 모서리 부분을 찢은 뒤, 00 정형외과 홍보용 볼펜으로 누구보다 쿨한 표정으로 'always wish your best'를 적어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날아가지 않게 재떨이로 눌렀다.
또다시 혼자가 됐다. 이제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경계선이 허물어지고 있다.
언제나 늘 그랬듯이 유일한 친구들인 이어폰을 귀에 꽂고 무거운 배낭을 등에 업은 채 다음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걸었다. 얼간이들의 대화, 담배 그리고 맥주로만 지새웠던 지난밤은 마치 꿈을 꾼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만남 뒤 이별할 때의 소외감은 나를 시니컬하게 만들었다. 웃고 있었던 나의 미소는 점점 쳐진 옆구리 지방처럼 아래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버스에 타고 한 2시간 갔을까 whats app으로 2개의 문자가 와 있었다. 얼간이들의 장문의 편지, 다음의 기약 그리고 그들의 사진을 첨부했다. 그걸 본 난 다시 미소를 띨 수 있었고 행복한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