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소르 핫셉수트 장제전 & 멤논의 거상
엄마가 된 후에야 비로소 남의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Yul이 태어나기 전에는, 어린아이의 재롱을 보며 ‘귀엽다’라는 말은 해도 숨은 뜻은 ‘아이가 왔군요’ 정도였다.
지금도 아이 하나가 어른 모임의 분위기를 송두리째 휘두르거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환경은 몹시 불편하다.
그래서 룩소르 투어는 단체가 아닌 프라이빗 투어를 선택했다.
가이드인 재키는 두 아이의 엄마였고,
Yul의 체력에 맞춰 속도를 조절하고 목적지를 변경하는 게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육아 동지에게 이해를 구하며 우리의 템포에 맞는 여행을 했다.
하루에 네 계절이 다 있다는 룩소르의 겨울, 우리는 봄의 한가운데쯤 핫셉수트 장제전에 도착했다.
거친 돌산 아래 들어앉은 현대적인 느낌의 3층 건물이 인상적이다.
재키는 입장 후 우리를 오른쪽 구석 벤치로 안내하고 핫셉수트 여왕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핫셉수트는 아들이 없었어. 그래서 조카인 투트모세 3세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나이가 어려 핫셉수트가 대신 22년간 통치했어. 그런데 50세에 살해당했어.”
“누구한테?”
“누구인지는 몰라. 그런데 투트모세 3세라는 주장이 가장 우세해. 이후 투트모세 3세가 55년간 이집트를 통치했는데, 후대에 그를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러. 영토를 확장하고 군사적으로도 엄청 강성했거든. 그리고 저기 조각상들은 핫셉수트 여왕 석상인데, 얼굴은 다 파손되고 없지? 투트모세 3세가 그렇게 했을 거야.”
핫셉수트는 수렴청정하다 이를 못 견딘 장성한 어린 왕에게 죽임을 당했던 거다.
물러날 때를 알고 잘 넘겨줬더라면, 꽤 아름다운 그림이었을 텐데, 역시나 인간의 탐욕이 만든 비운의 역사는 반복된다.
“3층 복원은 미국이 도와줬는데 기둥 두 개를 가져가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어.”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신전의 돌조각들이 한쪽에 모아져 있다.
오른쪽 자칼을 모시는 곳, 왼쪽 소를 모시는 곳 그리고 핫셉수트 여왕의 석상 등 봐야 할 것들을 기억하고 들어가려는데, Yul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다.
“엄마, 나 도저히 못 가겠어. 쉬고 싶고, 배가 너무 아파.”
“뭐? 아침부터 너무 돌아다녔나? 설사나 토하고 싶지는 않고?”
“응.”
얼굴색이 약간 창백한 게 쉬어야 할 것 같다.
Yul은 그간 피로가 누적돼 긴 시간 관광이 힘든 상황이었고, 다행히 두 아이의 엄마인 재키에게 안심하고 Yul을 맡기기로 했다.
재키는 기념품 가게 옆 매점에서 Yul과 쉬고, 나만 장제전으로 향했다.
Yul 없이 혼자 돌아다니니 허전한데 한 편으로는 편한 게 ‘시원 섭섭’하다.
하루 24시간 7일을 꼬박 붙어있다 보니, Yul과 나는 혼자만의 휴식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재키 덕에 하셉수트 장제전의 세 개 층을 꼼꼼히 둘러보고 나왔다.
매점에는 망고주스를 마시는 재키와 얼굴이 편안해진 Yul이 마주 앉아 이야기 중이다.
“무슨 얘기 중이야?”
“핫셉수트 발음을 어려워해서 ‘핫치킨수프’로 말하면 된다고 얘기해 줬어.”
딱 Yul 눈높이에 맞는 교육이다.
“그런데, 네 딸들은 학교 갔다 오면 뭐 해?”
“큰 애는 매일 휴대폰만 해. 손에서 잡고 놓질 않아.”
“한국이나 여기나 똑같구나. 아직 Yul은 휴대폰은 없는데, 그래도 태블릿이나 닌텐도 게임만 하려고 해서 걱정이야.”
“둘째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종이랑 연필 있으면 혼자 한참 잘 노는데, 이미 스마트폰 사용을 시작한 첫째는 그게 안 되나 봐.”
“무조건 늦게 시작하는 게 좋겠다.”
“응, 최대한 늦게 사줘.”
비행기로 17시간 걸려 넘어온 이곳에서도 엄마의 고민은 별반 다르지 않다.
배 아프다던 Yul은 이제 배고프다고 성화다.
재키는 다음 행선지인 ‘멤논의 거상’을 보고 보트를 타고 나일강 동쪽으로 넘어가 밥을 먹을 예정이라고 한다.
룩소르 여행 사진에서 보던 그 거대한 돌상을 보지 않고 지나갈 수 없어 잠깐만 보자며 Yul을 억지로 설득해 데리고 갔다.
이 거대한 두 개의 조각상은 신전 앞을 지키는 신과 파라오였는데, 사암으로 만든 신전은 나일강이 크게 범람했을 때 떠내려갔다.
재키는 Yul이 이해할 수 있게 ‘투탕카멘 할아버지’가 파라오일 때 만든 것이라 설명한다.
또, BC12세기에 지진으로 ‘멤논의 거상’에 틈이 생기며 바람이 불 때마다 ‘휙~휙~’ 휘파람 소리도 났는데, 로마제국 시대에 로마인들이 구멍을 막아 이제는 더 이상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고.
“나는 로마인들이 시끄러워서 구멍을 막았을 거로 생각해요.”
“그건 아니고, 구멍이 있으니 잘 고쳐 놓으려고 막은 거였어. 지금도 독일인들이 복원 중이야.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작업을 못 하고 겨울에만 하고 있어.”
내가 없는 사이 Yul과 재키가 서로를 많이 파악한 것 같다.
“점심은 뭐 먹어요?”
“치킨이랑, 스파게티, 밥… 뷔페식이야.”
“와! 스파게티!!! 치킨!!”
나는 이번에도 향신료가 강한 현지화된 치킨과 스파게티를 상상하며, Yul의 환호가 실망으로 귀결될 것을 예상했다.
재키가 안내한 식당은 나일강변에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뷔페 음식점이다.
떠돌이 손님이 대부분이다 보니 음식 퀄리티는 그렇게 높을 필요가 없고, 메뉴 대부분은 현지 색을 줄이고 누구 입맛에나 맞을 수 있는 튀김이나 기본 소금 간 위주로 조리한 것들이다.
내 예상과는 달리, Yul에게는 최고의 식당이었다.
Yul과 ‘섬세한 요리’를 내는 비싼 레스토랑을 방문하려는 누군가에게 나는 항상 ‘Yul은 비싼 레스토랑 필요 없어. 돈만 아깝지. 그냥 돈가스랑 자장면이면 돼’라고 말한다.
재키는 그런 Yul에게 딱 안성맞춤인 식당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Yul은 치킨과 밥, 스파게티를 허겁지겁 먹더니, 내일 또 오자고 한다.
나도 모험하느니 여기 한 번 더 오는 게 낫겠다 싶어 명함을 요청했다.
역시나, 여행사와 연계해 손님을 받는 이곳은 주소가 표기된 명함이 없었다.
대신 사장 명함을 줄 테니 그 번호로 전화해서 기사를 바꿔주면 이곳에 올 수 있도록 안내해 주겠다고 한다.
명함을 받긴 했는데, 다시는 안 오게 될 거라고 예상했고 결국 다음날 또 오는 일은 없었다.
“식사 다하면 리뷰 먼저 써줄 수 있을까?”
“응? 무슨 리뷰?”
“오늘 투어에 대한 리뷰를 '트립 어드바이저'랑 ‘겟유어가이드'에 남겨주면 돼. 내 이름도 꼭 써주고, 다 남기면 캡처 화면을 왓츠앱으로 보내줘.”
아직 원데이 투어의 반도 넘기기 전이고, 피평가자 앞에서 평가를 남기라니 당황스럽다.
게다가 평가 결과를 공유하라는 건 또 무슨 경우인가?
대부분 투어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면 가이드나 여행사에서 왓츠앱으로 리뷰를 부탁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조금 쉬고 남기려고 시간을 끌면, 한 시간마다 리뷰 작성을 재촉해 귀찮게 한다.
그런데 투어 중간에 이런 요구는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응’이라고 대답했는데 식사 내내 약간 불편하다.
그런데, 그녀도 누군가에게 고용된 워킹맘이고, 그녀의 이름이 들어간 소비자의 평가 결과는 그녀의 KPI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식사 중간에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할 리가 없다.
이 시스템을 만든 고용주의 문제인데,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려는 사명감이나 의협심은 없다.
내 앞에 그녀가 편한 마음으로 투어를 잘 마무리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두 플랫폼에 모두 후기를 남기고 재키의 왓츠앱으로 캡처 화면을 보냈다.
식당에서 일어나려는데 Yul이 똥 마려운 표정으로 말한다.
“엄마, 나 화장실.”
“화장실 저기 있어. 갔다 와.”
“아니, 나 호텔 가서 화장실 가고 싶어.”
이런, 진짜 똥이 마려운 게 맞았는데, 도시 남자 Yul은 극구 호텔 방 우리의 화장실로 가겠다고 고집이다.
기브 앤 테이크라고, 나도 당당하게 재키에게 요구했다.
"카르낙 신전 가기 전에 잠깐 호텔 들러서 재정비하고 나올게. Yul이 화장실도 가고 싶다고 하는데 호텔로 돌아가고 싶대.”
난감한 표정의 재키는 생각하는 듯하더니, 기사와 통화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의 ‘쾌변'을 위해 호텔로 향했다.
아마 둘 중 하나라도 아이가 없이 이렇게 만났다면, 부딪힐 상황이 많았을 거다.
다행히 우리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공감하고, 마뜩잖지만 눈 감아주는 부분도 많았다.
억지로 이해하고 참은 건 아니다.
엄마의 세계에 들어서며 자연스럽게 둥글어진 것이다.
아이가 필수가 아닌 요즘, 미혼이거나 아이가 없는 신혼부부가 종종 질문을 한다.
아이를 낳아야 할지, 낳으면 뭐가 좋은지.
밑 빠진 독이지.
인풋은 있는데 아웃풋은 기대하면 안 되는 밑 빠진 독.
그래도, 아이가 나를 제대로 살게 해 줬어.
애가 없을 때는 그냥 살았는데,
애가 자라는 걸 보면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
예를 들어, 예전에는 누군가 시키니까 분리수거를 했다면,
지금은 내 아이가 살 지구라는
생각으로 하게 돼.
‘세상을 보는 내 시야를 넓혀준 게’ 아이가 준 가장 큰 선물이야.
돈으로 살 수 없는 거잖아.
그래서 밑 빠진 독인 줄 알면서도 거기 들어가는 건 아깝지 않아.
오히려 항상 아이에게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