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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경아 Feb 29. 2024

23. 여행의 중도

@룩소르 카르낙 신전 & 호텔

산해진미라도 우리가 소화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서 먹으려고 하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중도를 지키기는 쉽지 않다.

사람과 상황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달라지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그 순간을 무슨 수로 안단 말인가?

부딪히고 실수를 반복하며, 경험치로 축적되면 그때야 중도를 지키는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행의 중도를 찾아야 하는 나와 Yul은 아직 한참 초보다.


룩소르의 백미라는 카르낙 신전과 룩소르 신전만 가면 이날 원데이 투어는 마무리된다.

호텔에 들러 화장실도 가고 재정비도 했으니 다시 힘을 내본다.

가이드 재키는 유적지 들어가기 전 입구 근처에서 역사 배경과 꼭 봐야 할 것 등을 먼저 전달하고, 

안에서는 설명을 최소화하는 스타일이다.

혼자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이 스타일이 나는 좋다.


재키는 거대한 카르낙 신전을 축소해 만든 모형 앞에서 설명을 시작한다.

“카르낙 시전은 신들의 신인 '아몬 라’와 그의 와이프 ‘무트 신’을 모시는 곳이야. 

처음에는 이렇게 크지 않았는데, 파라오마다 조금씩 증축하고 보태면서 이렇게 커졌어. 

완공에 2,300년이 걸렸다고 해. 

여기 이쪽까지는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었고, 

그 안에 있는 이 공간은 귀족들부터, 

그리고 맨 끝에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은 파라오와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어. 

그리고 매해 나일강이 범람을 시작할 때 아문 라와 무트신 석상을 배에 싣고 이 길을 통해서 룩소르 템플로 옮겼다가, 11일간 머무른 다음 나일강을 통해 다시 카르낙 시전으로 가져왔어.”

“왜?”

“고대 이집트에서는 나일강 범람이 파라오의 왕권을 뒤흔들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어. 

그래서 신들에게 나일강 범람이 잘 돼 땅이 기름지게 해달라고 비는 의식이었던 거야.”

2,300년을 쌓아 올린 그곳은 모든 게 거대했다.

중도의 미학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규모로 호소하는 간절함만은 대단해 보인다.


7층 건물 높이 정도 돼 보이는 람세스 석상을 지나면 귀족 계층만 들어갈 수 있었다는 공간이 나온다.

그곳은 Yul 가슴 높이만 한 기초 석 위에 얹어진 133개의 거대한 기둥이 빽빽하다.

기둥에는 히에로글리프가 새겨져 있는데, 대부분이 람세스 2세에 관한 내용이라고.

재키는 카르낙도 그렇고, 룩소르 신전도 람세스 2세 관련 벽화와 조각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대석주실 끝에는 오벨리스크가 보인다.

투트모세 1세와 핫셉수트의 오벨리스크, 

그리고 지진으로 잘려 키가 작은 또 하나의 핫셉수트 오벨리스크가 있다.

원래 오벨리스크는 쌍으로 만들어 신전 입구에 설치했는데, 

투트모세 1세의 나머지 오벨리스크는 터키 이스탄불에 있다고 한다.


파라오와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다는 성소에 발을 들여놓으니, Yul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한 것 같다.

“엄마, 이제 호텔 가자.”

“엥? 아직 룩소르 신전은 가지도 않았어.”

“여기랑 다를 게 없다며. 다 람세스 2세라며. 그리고 거기 어젯밤에도 갔었잖아.”

“재키, 우리 룩소르 신전은 가지 않고 그냥 너한테 설명만 들으려고 하는데…”

“음… 여기랑 비슷해. 람세스 2세 석상이랑 기둥들, 그리고 람세스 2세 때 만든 오벨리스크가 있어.”

아주 간단한 설명이다.

어른도 하루에 다 소화하기에 벅찬 일정이긴 했다.

물리적으로는 가능해도 반나절에 둘을 다 본다는 것은 마치 불국사 구경하고 바로 통도사 가는 격이다. 

두 번째는 감흥이 반 이상 떨어질 것이라 우리는 과감히 룩소르 신전을 일정에서 뺐다.

전날 저녁에 다녀오길 참 잘했다.

나와 Yul은 그렇게 우리만의 여행의 중도를 찾아가고 있었다.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Yul은 다시 생기가 돌며 수영장을 가겠다고 한다.

아이에게 물놀이만큼은 중도가 없다.

나는 수영복은 입지 않겠다며 끝까지 버티고, 책과 상어 장난감을 들고 수영장으로 갔다.

물에 가라앉는 상어 장난감 세 개를 내가 물 이곳저곳에 흩어서 던지면 Yul이 찾아오기를 반복한다.

나는 Yul이 상어를 찾는 시간만큼 자유를 얻는다.

전날 마신 것과 같은 샤르도네 한 잔도 주문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낮술을 하니 취기가 빠르게 올라온다. 

이제는 상어를 던지는 것도 귀찮아진다.

때마침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아이 하나가 수영장에 뛰어든다.

그 아이가 Yul과 함께 상어를 찾아다니기에, 나는 상어를 그 아이에게 주고 네가 던져 보라고 했다.

이렇게 나는 물놀이에서 해방됐다.

둘은 상어를 던지고 찾기를 쉬지 않고 반복한다.

동물 조련사와 천방지축 강아지 같다.

한참 보고 있으니 얼굴이 거무스름한 곱슬머리 아이의 국적이 궁금해졌다.

“너 어느 나라에서 왔어?”

“영국이요!”

“이름이 뭐야?”

“아씬(Assin)!”

“Yul아, 형아 이름이 아씬이래. 얘 이름은 Yul이야. 우린 한국에서 왔어.”

이렇게 뒤늦은 통성명을 주선하고, 다시 선베드에 누워 상어가 숨겨지고 찾아지는 것을 지켜본다.

이때쯤 끊어주지 않으면 저녁 식사도 잊고 계속할 기세다.

나는 Yul의 물놀이 패턴에는 빠삭하니 중도를 잘 잡아서 끝낼 시간임을 알렸다.

그런데 만난 것도 인연인데, 헤어지기 아쉬워 아씬에게 물었다.

“우리 이제 들어갈 건데, Yul이랑 사진 한 장 찍을래?”

난감한 표정의 아씬이 대답한다.

“아니요!”

“응, 그래. 우리 갈게. 또 봐!”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나는 많이 당황했다.

'보호자가 함께 있지 않은 상황에서 미성년자에게 사진 찍자고 하면 안 되는 거였나? 

요즘 SNS에 무단으로 올라가는 사진이 많아서 아무나 하고 사진 찍지 말라는 교육을 받은 건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계단 아래 선베드에 있던 아씬의 부모가 아씬에게 묻는다.

“무슨 일이니?”

아씬은 수영장 밖으로 나가 부모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내 상상으로 대화를 구성해 본다.

‘저기 어린애랑 같이 놀았는데, 한국 사람들이래요. 같이 사진 찍자고 해서 싫다고 했어요.’

‘그래, 배운 대로 잘했구나. 모르는 사람이랑 사진 찍으면 안 된다.’

그렇게 ‘아무나’가 된 나는 과한 친근감을 드러내 부족하니 못한 상황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씬의 부모가 그렇게 가르친 게 맞다면, 

디지털 연결 사회를 사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교육이라는 생각과 함께 

점점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방에 가서 씻고 한숨 돌린 우리는 저녁도 이탈리아 레스토랑 ‘올리브’에서 먹기로 한다.

맛에 있어서만은 모험보다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Yul이다.

나는 양갈비와 볼로네제 스파게티, 케이프 베이 레드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엄마, 이거 최고!! 최고야!”

“그렇게 맛있어?”

“응, 나 내일 이거 또 먹을래.”

어린양의 갈비인지, 사이즈는 한국에서 먹었던 것의 반인데 육질은 훨씬 연하다.

Yul은 갑자기 먹방을 찍겠다고 한다.

“여러분, 이거 진짜 맛있어요. 

음~ 이거, 소고기 진짜 좋은 걸로 만들었나 봐요. 

스파게티도 나왔습니다. 

음~ 최고야! 여러분, 한번 먹어 보겠습니다. 

음~ 여러분 이거 진짜 너무 맛있어서 목이 터질 것 같아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터질 것 같아요. 

여러분 그럼 맛있게 봤으면 구독 좋아요 눌러 주시고, 여러분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구독자 없는 먹방을 찍으며 입가에 고기 먹은 흔적을 잔뜩 남긴 Yul이다. 


우리는 스파게티 소스까지 싹 긁어먹고, 계산서를 받았다. 

그런데 계산이 잘 맞지 않는다. 

내가 주문한 레드 와인은 한 잔에 275파운드인데, 그랑 마르퀴스 옆에 375파운드라고 적혀있다.

“여기, 계산서 잘못 왔어. 나는 레드 와인을 시켰는데, 그랑 마르퀴스가 청구됐어.”

“그래, 네가 시킨 케이프 베이.”

“응? 그렇지 내가 시킨 건 케이프 베이지. 근데 여기 그랑 마르퀴스라고 쓰여 있고 그 가격이 적혀 있네.”

“응, 네가 시켰잖아. 레드 와인.”

젊은 남자 직원은 계속 엉뚱한 소리를 한다. 

그리고 술은 현금으로 계산해야 한다니, 그제야 속셈을 알 것 같다. 

나는 우리에게 서빙해 주던 나이 지긋한 직원을 불렀다. 

그러니 이 젊은 직원이 계산서를 휙 가져가 버린다. 

한참 후에 정정한 계산서를 다른 직원이 아무렇지 않게 들고 온다. 

다들 암암리에 해오던 수법인 것 같다. 

이게 5성급 호텔 식당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지만, 화가 나지 않고 ‘속아줄 걸 그랬나’라는 생각도 한다. 

Yul은 양갈비가 아쉬웠다며 다음 날 점심에 다시 오자고 한다. 

다음날 저 청년을 만나면 팁이라도 쥐여 줘야겠다고 다짐한다.


두 개의 거대한 신전을 반나절 안에 보지 않기로 한 판단은 적절했고, 

추억을 남기고 싶어 제안한 사진 촬영은 아씬에게는 밀어내야 할 친밀함이었으며, 

올리브 레스토랑의 작고 맛있는 양갈비는 Yul을 감질나게 했다. 

또, 그곳 직원의 과한 욕심은 여행자의 지갑을 여는 데 실패했다.

오늘 내 여행은 적당함과 과함, 부족함이 혼재돼 있었다. 

그중에서 ‘과함’은 겪지 않았으면 몰랐을 세계에 눈을 뜨게 해 줬지만

이불킥할 만큼 창피한 경험이기도 하다. 

정말 ‘과함’은 ‘부족함’만 못하다. 

Yul은 이날도 ‘한참 부족한’ 식단 일지로 마무리한다. 이것만은 과해도 괜찮다, 아들!


12월 23일 토요일 Yul의 일기 (Yul이 쓴 그대로 옮기면 도저히 알아볼 수 없어, 철자법은 고쳐서 기재한다.)

오늘 아침엔 뷔페에서 먹었다.

맛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출발했다.

그리고, (람세스) 4세와 9세 1세(의 무덤)를 봤다.

그리고 진짜 미라를 봤다.

신기했다.

그리고 오늘 점심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수영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이 Best!!!

평가 ★★★★★★★★★★


좌) 람세스 2세 석상, 중앙) 지진으로 잘린 핫셉수트 오벨리스크, 우) 카르낙 시전의 대석주실
좌) 아씬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호텔 수영장, 중앙) 올리브 레스토랑의 양갈비, 우)  Yul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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