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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경아 Mar 02. 2024

25. 나일강의 무지개

@ 룩소르 힐튼 호텔 앞 거리

아이들은 투명하다.

아직 감추는데 서투르고 다른 색으로 덧칠하지 않아, 타고난 기질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열 명의 아이를 관찰하면, 열 명 모두 다른 색을 선명하게 뿜어낸다.

나일강 변에 사는 아이들은 어떤 색일까?

그들과 교류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하루만 더 자면 이집트를 떠난다.

마지막 여유 시간을 이용해 호텔 근처 우체국을 가려고 나섰다.

호텔에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 우체국이 있다.

관광하러 나갈 때마다 그곳을 지나는데, 우체국까지 가는 길에는 동네 아이들이 골목마다 삼삼오오 모여 노는 게 보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줄 학용품과 간식을 잔뜩 챙겼다.

목적지는 우체국이지만, 외출의 목적은 동네 아이들과의 만남이다.


호텔 로비에서 입구까지 나가는 길은 200m 정도 되는 잘 닦인 가로수 길이다.

이탈리아 시골 마을, 영주의 성으로 진입하는 길 같다.

그렇게 푸르르고 목가적인 길이 끝나 호텔을 나서면 극적인 변화를 마주한다.

흙먼지가 날리고 곳곳에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는 얼룩덜룩한 회색 아스팔트와 군데군데 시멘트를 드러낸 누런색 벽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길 한쪽에는 당나귀가 오렌지를 잔뜩 실은 수레 앞에서 꾸벅꾸벅 존다.

그 앞에는 열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녹이 잔뜩 슨 자전거를 타고, 그의 친구 두 명은 그 주변을 배회하며 길거리를 누빈다.

“살람 알리쿰!”

별 반응이 없다.

아이들 마음을 여는 데는 간식만 한 게 없다.

빈츠와 캐러멜을 내밀었다.

“이거 먹을래?”

순식간에 세 아이 모두 모여든다.

어김없이 당나귀 옆 과일 행상하는 어른도 손을 뻗는다. 이젠 어른의 큰 손이 불쑥 들어와도 놀라지 않는다.

간식을 나누며 이야기하고 싶어도 언어의 장벽이 높다. 갖고 있던 연필과 지우개도 나눠 줬다.

그런데 한 아이가 끈질기게 계속 쫓아온다.

아랍어이지만 손가락으로 숫자 3을 보여주는 것 봐서는 더 달라는 얘기다.

캐러멜도 연필도 세 개씩 더 줬다.

다시 우체국을 향하는데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렇게 몇 개를 더 주었는지도 모르게 많은 간식과 학용품을 한 아이에게 넘겼다.

Yul은 그게 못마땅한 듯하다.

“저 형아, 진짜 욕심쟁이야.”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회답하고 Yul과 우체국으로 들어갔다.


우체국 직원은 우표를 팔지 않는다고 말한다.

호텔 프런트 직원도 택시 기사도 우표는 우체국에서 판다고 했는데, 우체국에서는 우표가 없다고 한다.

누군가 한국에서 어디서 우표를 사는지 물어보면 나도 당연히 ‘우체국’이라고 했을 거다.

그런데 정작 우체국에서 우표를 산 기억은 아득하다.

우체국 등기나 택배를 보낼 때도 우편물의 무게와 목적지를 입력하면, 우표를 대체하는 가격이 찍혀있는 스티커가 프린트되어 나온다.

우표는 이제 관광지 기념품숍에서나 구할 수 있는 역사 속 물건이 됐다.


빈손으로 우체국을 나오는데 우체국 옆 정육점 앞에 회색 갈라비야를 입은 남자아이가 두 명 앉아 있다.

형인 듯한 아이는 80cm 정도 높이의 식재료를 담았을 것 같은 하얀색 플라스틱 원통을 뒤집어서 앉았고, 동생인 것 같은 아이는 갈색 사각 플라스틱 박스에 앉았다.

형은 슬리퍼를 동생은 앞이 막힌 구두를 신었는데, 앉은자리도 신발도 형이 동생을 많이 배려하는 것 같다.

그 모습이 너무 선해 보여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살람 알리쿰! 너희 여기서 뭐 해?”

형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활짝 웃는다.

동생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첫째의 의젓함, 둘째의 귀염성이 표정에 보인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눠 줬다.

그러자 옆에서 거대한 고기를 손질하고 있던 아빠가 활짝 웃으며 본인을 소개한다.

“살람 알리쿰! 부처스, 부처스!”

“아! 그렇군요. 아이들이 얌전히 앉아 있네요. 얘들 이름이 뭐예요?”

“아임 부처스! 부처스!!”

안타깝게도, 아빠가 아는 영어 단어는 ‘부처스’와 ‘예스’가 전부인 듯했다.

“얘 이름은 Yul, 얘네 이름은?”

“예스”

“이름, 이름이 뭐예요?”

“예스, 예스. 아임 부처스.”

손짓 발짓으로 물어보며 겨우 통성명했다.

“큰 애는 애담, 작은 애는 블러”

“살람 알리쿰, 에담, 블러! “

내친김에 나이도 알아보려 했다.

“몇 살? 나이.”

“예스”

“나이, 나이. 얘는 여덟 살.”

손가락으로 8을 보여주며 설명한다.

그러자 키를 물어보는 줄 알았는지 두 아이는 차려 자세로 입을 앙다물고 벌떡 일어선다.

그 모습이 너무 천진난만하다.

“노, 키. 나이. 여덟?”

나는 온몸으로 최대한 표현하며 말한다.

큰아이를 가리키며 물었는데, 대답은 ‘예스’다.

그럼 작은 아이는 일곱 살일까?

작은 아이를 가리키며 다시 여덟 살인지 물었다.

“예스”

이런, 큰아이 작은 아이 모두 몇 살인지 정확하지 않겠구나 싶다.


이 아이들은 아빠가 일하는 곳에서 하염없이 앉아있다가 신기한 구경을 하게 된 게 마냥 신이 난 듯하다.

나도 아이들이 예뻐 계속 웃음이 나오는데, 아이들의 밝은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한 번씩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댄다.

이 귀여운 형제에게 천 필통에 연필과 지우개, 펜을 가득 담아 하나씩 선물했다.

웃으면 복이 온다!

그렇게 ‘부처스’를 외치던 그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다.


“블러 너무 귀여워.”

“그래? 엄마도 저 둘이 참 좋았어.”

그렇게 Yul과 나는 밝은 에너지를 느끼며 길을 걷는데, 아까 그 욕심 많은 남자아이가 다시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랍어로 뭐라고 말하는데, 선물을 더 달라는 거다.

Yul은 계속 그 아이가 불편하다.

그 아이는 한쪽 손으로 오른쪽 골목을 가리킨다.

좁은 골목 깊숙이 세 살에서 다섯 살쯤 돼 보이는 꼬마 아이들이 네 명 정도 모여있다.

아이들 손에는 우리가 나눠준 캐러멜과 과자가 들려있다.

“시스따 브르아아다!”

그제야 알았다.

그 아이는 동생들의 형이자 오빠였다.

나는 다시 간식과 학용품을 넉넉히 꺼내 그 아이에게 건넸다.


Yul은 얼굴을 구기며 내 옷자락을 잡아끈다.

발걸음을 옮기는데 Yul이 투덜댄다.

“저 형은 진짜 욕심쟁이야. 엄마는 왜 또 줬어?”

“저 형이 우리 눈에는 욕심쟁이로 보였을지 몰라. 그런데 저 형은 어린 동생들이 네 명? 다섯 명 정도 있어. 그래서 동생들을 챙기고 싶어서 우리한테 더 요구한 거야. 그렇다면, 저 형은 욕심쟁이일까?”

“형이 동생이 있어? 어떻게 알았어?”

“엄마도 정확히는 몰라. 아까 골목에 있던 꼬맹이들이 형 동생들인 거 같았어. 형한테 준 간식을 먹고 있었거든.”

“아!”

“네가 동생이 있으면, 저 형처럼 할 수 있을 거 같아?”

“아니…”

“동생들에게 저 형은 자기들을 위해 용기를 내준 ‘생활력 강한 고마운 형, 든든한 오빠’이겠지?”

“응.”

신기하다.

한쪽 면에서 보면 남색인 것이, 다른 면으로 가서 보니 노란색이 돼 있다.

그리고, 그 아이의 끈기와 고집 덕에 다른 면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호텔 입구에 도착하기 100m 전, 아직 약간의 간식과 연필, 펜, 책갈피가 남았다.

그때 앞에서 하교 중인 여자아이 무리가 보인다.

정확히 다섯 명이다.

“살람 알리쿰!”

여자아이들은 수줍은지 서로 보고 웃으며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쿠키 프롬 코리아?”

그제야 용기를 낸 한 아이가 밝은 얼굴로 다가오고, 다른 아이들이 뒤따른다.

나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고, 학용품도 꺼내 보여줬다.

“어머! 딱 다섯 개 있네? 하나씩 가지면 되겠다.”

아이들은 서로 한복 저고리 모양의 책갈피를 갖겠다고 한다.

기가 센 두 아이가 책갈피 한쪽씩 잡고 놓지 않는다.

이러다 내가 싸움의 불씨를 던진 셈이 되겠다 싶었다.

“얘들아, 가위바위보로 순서 정하자.”

나는 손으로 가위바위보 시늉을 하며, 아이들을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게 했다.

가위바위보는 만국 공용인지, 금세 알아듣고는 결의에 가득 찬 표정으로 나의 구령을 기다린다.

“바위, 가위, 종이!(rock, scissor, paper!)”

1등 한 아이는 신이 나서 책갈피를 가져간다.

차례로 라인 프렌즈의 개구리 캐릭터가 고무 모형으로 붙어 있는 펜, 끝을 돌리면 나오는 지우개, 연필이 선택된다.

남자아이들과 달리 여자아이들은 마지막까지 인사를 잊지 않고, 가는 길에는 자기들끼리 받은 물건을 돌려 보며 꽁냥 거린다.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연필 한 자루와 지우개 하나를 들고 호텔 입구까지 왔다.

호텔로 들어가려는데, 우리가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달콤한 간식과 학용품을 나눠주고 있는 것을 지켜본 한 아이가 조심스레 다가온다.

친구가 없고,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 같았다.

맨발인 아이의 발은 까맣게 물들어 딱딱하게 굳어 있다.

옷은 구멍이 숭숭 나 있고, 얼굴은 찌든 땟자국으로 얼룩덜룩하다.

그 아이가 머뭇머뭇 자신 없는 눈빛으로 나에게 ‘자신도 뭐 좀 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나와 Yul은 난처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본다.

“어쩌지? 지금 우리 이것밖에 없는데.”

나는 연필과 지우개를 내밀었다.

“이거라도 가질래? 이것밖에 없어.”

그 아이는 얼른 낚아채듯이 연필과 지우개를 받아 간 뒤, 손가락으로 1을 표시하며 입을 연다.

“원 달라.”

남은 현금이 있다면 주고 싶었지만, 내일 택시비를 제외하면 돈이 한 푼도 없다.

“노 머니.”

해줄 수 있는 게 없던 나와 Yul은 무거운 걸음을 떼며, 유럽 정원 같은 호텔 입구로 들어갔다.


그렇게 선택받지 못한 선물이 그 아이에게 간 게 꼭 아이 처지를 반영하는 것 같아 더 짠하다.

방에 들어오더니 Yul이 말한다.

“엄마, 나 이집트 와서 거지 두 명 봤어.”

“응?”

“그 카이로 지하철역 앞에 이불 덮고 누워있던 아줌마랑 오늘 그 신발 안 신은 형아.”

“그러네. 그 형은 어른들이 돌봐주지 못해서 그렇게 된 걸 테니 더 안타까워.”

“내 크록스 그 형 줄래.”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내일 공항 가는 길에 보이면 택시 잠깐 세우고 주자.”

나는 다음날 떠날 채비 하며 Yul의 크록스를 비닐봉지에 따로 넣었다.


이날 저녁은 호텔에서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었다.

파티의 하이라이트는 지역 사립학교 합창단 아이들의 캐럴 공연이다.

사십 명 정도 되는 아이들은 산타 모자와 빨간 망토를 입고 선생님의 지휘에 맞춰 영어로 캐럴을 부른다.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친다.

이 아이들의 공연을 보는데, 낮에 길에서 만난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머릿속에 스쳐 간다.

동생들 간식을 악착같이 챙겨 간 맏이, 아빠의 일터에서 얌전히 기다리던 형제, 마음에 드는 학용품을 차지하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진지하게 하던 꼬마 숙녀들, 그리고 맨발로 1달러를 요구했던 아이까지….

나일강 강가에 사는 각기 다른 매력의 무지갯빛 친구들에게, 나와 Yul과의 만남이 우리가 준 선물처럼 달콤한 기억으로 남았으면 한다.

그리고, 이 아이들과 좀 더 즐거운 시간을 갖지 않은 게 아쉽다.

또다시 여행이 허락된다면, 줄넘기 줄을 종류별로 챙겨 가서 ‘꼬마야 꼬마야’와 ‘줄넘기’ 정도 같이 해보고 선물로 주고 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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