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힐튼 룩소르 리조트의 크리스마스 디너
자신을 특별하다고 착각하면, 특별함을 위해 진정한 자신을 감추거나 그 위에 분칠 하게 된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인 출혈은 피할 수 없다.
반면, 자신의 평범함을 인정하면 더 나은 삶을 위한 행동에 당위성이 더해진다.
또, 평범한 삶에서 찾은 소소한 즐거움이 쌓이면 단단한 정신적 자산이 된다.
전자는 내가 탈출한 지난 나의 모습이고, 후자는 내가 시작하며 막 그 즐거움을 알게 된 인생이다.
나의 과거와 미래를 한 공간에서 마주한 마법 같은 시간으로 이집트에서의 마지막 밤은 흘러간다.
12월 24일 밤, 호텔에서 크리스마스 디너파티를 연다.
디너 비용은 호텔 예약 시 필수 포함이었다고 하니 참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호텔 직원은 전날부터 파티 자리를 예약받았고, 나는 무대와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좌석 두 개를 맡았다.
내가 앉을 직사각형 테이블의 나머지 자리는 이미 꽉 찼다.
누구와 크리스마스 파티를 함께 하게 될지 궁금하다.
Yul 또래의 아이가 있는 가족이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오후 5시부터 시작된 칵테일 리셉션이 한 시간 반 만에 끝나고, 야외에 꾸며진 디너파티 장소가 문을 열었다.
나와 Yul이 우리 테이블을 찾아가니, 함께 식사하게 될 네 명은 이미 와있다.
어색하게 눈인사하고, 우리는 가장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Yul 옆에는 브라질에서 온 30대 백인 남자 에드먼드가, 오른쪽 끝에는 미국에서 온 제이크, 그의 맞은편은 고등학교 졸업반인 제이크의 딸 새미, 내 옆은 새미의 엄마인 매건이 앉았다.
역시 모두 코캐시언이다.
“와인 주문하실래요?”
직원이 와인리스트를 건네는데, 에드먼드가 받아 든다.
“이 멜롯 한 병 주세요. 오늘은 제가 이 테이블에 와인 살게요. 원하시는 분들은 드세요. 저와 함께 오늘 멋진 저녁을 함께해 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의 선물이에요.”
크리스마스이브에 두 가족과 함께 하게 된 에드먼드가 왠지 안쓰러운데, 물에 둥둥 뜬 기름 같은 텐션이다.
“저는 사실 크리스마스를 일 년 중 제일 싫어해요. 제가 가장 질색하는 날 그래도 이렇게 멋진 분들과 함께 보내 영광입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누군가와 함께 보내는 건 처음이에요.”
그가 우리를 보며 말하는데, 나는 모노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다.
에드먼드는 미국 TV 시리즈에 한 명씩 꼭 있을법한 염세적인 성격의 캐릭터로 분한 것 같다.
나와 매건은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 보며 미소 짓는다.
“좋아하는 건 뭐예요? 요즘 즐겨하는 거요.”
매건이 화제를 전환하려고 질문을 하는데, 이 드라마 주인공은 이번에도 장황하다.
“그림 보는 걸 좋아해서 다양한 나라를 다니며 전시 관람하고, 공연 보러 다녀요. 요즘 미술 시장은 많이 왜곡된 것 같아 아쉽죠. 차라리 예전이라면, 블라… 블라… 블라..”
“그럼, 요즘은 어떤 문화에 관심이 있어요?”
제이크가 다시 긍정적인 화제로 전환하려는 것 같다.
“오! 요즘은 한국 문화에 관심이 아주 많아요.”
‘오! 노!!! 나를 그 대화 안으로 끌어들이지 말아 줘!’ 나는 속으로 절규한다.
“한국 영화가 요즘 내 감성을 자극해요. 숨은 보석 같다고 할까… 한국 영화, 시리즈는 감정에 깊이가 있고 표현이 풍부해요.”
“고마워요. 극찬이네요.”
나는 엮이고 싶지 않아 간단한 대답으로 마무리했다.
다행히 식사는 뷔페식이라, 우리는 음식을 가지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비큐 스테이션에 줄을 서 있는데, 바로 뒤에 에드먼드가 있다.
“오! 이세이미야케. 난 이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디자인을 무척 좋아해요. 드레스가 참 아름답네요.”
“아! 고마워요. 그런데 이거 이세이미야케 아니에요.”
여러 문화권으로 자주 여행 다닌다는 에드몬드는 보고 들은 건 많은데, 그 지식이 대화를 풍부하게 한다기보다는 분위기를 어색하게 하거나 차갑게 식히는 말을 잘한다.
그는 이세이미야케의 아이코닉 디자인인 플리츠 가공을 한 긴 재킷을 보고 넘겨짚은 것이다.
서로 민망한 상황이다.
자리에 돌아오니 매건은 먼저 식사 중이다.
“고등학교 졸업반인데 새미는 부모님이랑 여행 왔네요? 한창 또래 친구들이랑 노는 걸 좋아할 때 같은데..”
“새미는 친구들보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해요. 매해 우린 가족 여행을 다녔는데, 올해가 마지막이겠죠.”
“아쉽겠어요.”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요. 지나 보니 함께 추억할 거리를 많이 만들기를 잘했다고 생각해요. 아이에게 가족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는 소속감을 주는 게 중요하죠. 저와 남편은 계속 일을 했는데, 이걸 위해 우리 가족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온 한 가지가 있어요. 매일 저녁 꼭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죠.”
“그거 정말 어려운 일일 텐데요.”
“맞아요. 우리가 정말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매년 가족여행을 다니며 우리만의 소소한 전통도 만들었어요.”
“뭐예요?”
“모든 나라에 그 나라만의 도넛이 있다는 거 알아요?”
“어머! 그렇구나.”
나는 깜짝 놀라 말하는데, 새미가 디저트 바에서 가져온 설탕 시럽으로 코팅된 작은 링 모양의 빵을 들어 보인다.
“여기 이집트 도넛도 있어요. 이거 정말 맛있어요.”
“그 나라 도넛을 찾아서 먹어보고, 맛을 비교해 보는 게 우리 가족만의 여행 전통이에요.”
“멋져요! 저도 Yul과 우리만의 의식을 만들어 봐야겠어요.”
“한국도 도넛이 있죠?”
나는 개성 주악을 떠올렸다.
“네, 있어요. 이집트 도넛만한 크기이고 꿀을 발라 달콤해요. 찹쌀로 만들어서 쫀득한 식감이에요.”
새미와 매건은 마주 보며 미소 짓는다.
어느 나라든 전통 도넛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또 하나의 케이스를 알게 돼 즐거운 것 같다.
“그런데 새미는 스마트폰 없어요? 테이블 위에 휴대폰도 없고, 식사 동안 휴대폰 꺼내는 걸 한 번도 못 봤어요.”
“있어요. 그런데 별로 즐겨하지 않아요. 17살인데 나이에 비해 조금 느린 편이에요. 15살 같은 17살이에요. 성격이 저를 닮아 내향적이고 수줍음이 많아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요즘 스마트폰이 가정마다 문제인데, 정말 잘 키우셨네요. 배워야겠어요.”
“스마트폰보다 더 즐거운 걸 함께 하면 돼요. 저희는 주말이면 꼭 가족 보드게임 시간을 가져요.”
“부모가 노력해야 하네요.”
한국의 내향인 모자인 나와 Yul이 미국의 내향인 가족 매건과 새미, 제이크를 만난 건 행운이다.
과장되지 않은 그들의 대화 방식이 안정적이고 편안했다. 그 안정감은 오랜 기간 쌓아온 그 가족의 단단한 연결에서 온 내공 같다.
“Yul은 뭘 좋아해? 악기 배우는 거 있어?”
“피아노요.”
Yul이 수줍게 대답하니, 에드먼드가 호들갑이다.
“피아노! 미래의 모차르트? 나는 기타를 오래 쳤는데 악기는 배워두면 좋지.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하나쯤 있다는 건 정말 좋은 거야. 모두 이집트는 처음인가요?”
“네, 저는 내일 떠나요. 아스완은 여정에 있었는데 장염에 걸려서 못 갔고, 룩소르 오기 전에는 카이로에 갔고 사막투어를 했어요. 사막여우랑 북극성, 별똥별 본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저희도 처음이에요. 내일 나일강 크루즈 타고 아스완 가는데, 장염 조심해야겠네요.”
“저는 이번이 이집트 열네 번째죠. 이집트 장염, 너무 잘 알죠. 그거 알아요? 이집트 장염에는 이집트 약국에서 산 약이 제일 잘 듣죠. 약국 가서 000 달라고 하세요. 정말 빨리 나아요. 이건 진리예요. 장염 걸리면 꼭 000 사세요.” (약 이름을 흘려들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에드먼드는 아는 게 많은데, 그가 주는 도움 될 만한 정보는 그가 본인의 특별함을 드러내려는 대화 방식 때문에 묻히게 된다.
게다가 중간중간 농담이랍시고 찝쩍대기도 서슴지 않는다.
‘당신 남편만 지금 내 옆에 없었다면, 나는 당신한테 데이트 신청을 했을 거예요’ 같은 식이다.
미국 TV 시리즈에서 많이 들어본 대사를 내 앞에서 보다니, 입 안에 와인 뿜을 뻔했다.
새미 가족은 다음날 일찍 크루즈를 타야 해서 먼저 가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 정말 고마워요. 오늘은 제 인생에서 최고의 크리스마스이브예요. 멋진 여행 되세요!”
에드먼드는 마지막 인사마저 영화 주인공을 연기하는 듯 예사롭지 않다.
Yul은 그런 에드먼드가 재미있는지 피아노와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나도 빨리 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어 Yul에게 가자고 할 타이밍을 재고 있다.
최고의 크리스마스이브라고 했는데, 나와 Yul마저 자리를 먼저 비우면 에드먼드가 너무 비참해질 것 같다.
그래도 염세적인 30대 남자와 수줍은 여덟 살 아이의 어색한 대화를 더 보기는 힘들다.
“저희도 먼저 일어날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리고 덕분에 와인도 잘 마셨어요. 메리 크리스마스!”
“굿 나잇, 예쁜 아가씨!”
하얀색 테이블보를 씌운 6인용 식탁에 에드먼드는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됐다.
그는 또다시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에 비극적인 크리스마스이브 장면을 추가했을 것 같다.
에드먼드가 빨리 그 특별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빠져나오길 바란다.
특별하려고 하면 더 소외되고 초라해질 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면 종국에는 누구나 특별하다고 인정할 만한 단단해진 자신을 마주할 것이다.
새미의 가족처럼, 17년간 부모의 꾸준한 노력으로 쌓아온 이 가족의 끈끈한 유대는 매우 특별해서 환하게 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