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소르 왕들의 계곡
각자의 인생에 우선순위가 다르듯, 여행도 마찬가지다.
고대 유적의 도시 룩소르에서 내 여행 우선순위는 ‘알고 보는 것’이었다.
알고 난 후에는 자전거로 다시 음미하며 돌아보는 여행.
그래서 돈 조금 아끼겠다고 몸을 혹사하거나,
잘난 척하고 내 지식만을 의지해 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알고 보기 위해 대가를 치르고 필요한 도움은 받아야 마땅하다.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이에게 지식을 얻기로 한 룩소르 원데이 투어의 지식 제공자는 재키(Jackie)다.
그리고, 드라이버 이름은 오사마(Osama).
세기의 패션 아이콘이자 모나코 왕비 재클린과 세기의 테러리스트 오사마가 함께하는 기념비적 여행이 예상된다.
재키는 차에 타자마자 이집트 지형과 역사 지식을 전한다.
“여기가 나일강이야. 나일강 길이는 6,500km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어. 첫 번째는 아마존강이고. 나일강은 에티오피아부터 카이로까지 쭉 연결돼 있어.”
“어머 길다! 그런데 이집트는 더운 줄 알았는데, 너무 추워. 24도인데도 한국 초겨울처럼 춥다.”
“이집트 겨울은 하루 안에 사계절을 다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 있어. 한낮에는 덥고, 아침저녁은 상당히 추워.”
“어머, 그 말이 딱 맞네.”
하루 중 아직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입춘 무렵 왕의 무덤이 모여있는 ‘왕들의 계곡’에 도착했다.
노란 돌산 뒤로는 빛의 아우라로 장엄해진 해가 올라오며 언 땅에 봄을 뿌린다.
사각뿔 형태의 피라미드는 ‘여기 보물이 가득해요’라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니, 이미 고대에 도굴꾼에게 다 털렸다고 한다.
그래서 왕의 무덤이 점점 산속으로 숨어들게 됐다고.
정말 이 산속에 있었다면 도굴당하지 않았겠다 싶은 곳이다.
하지만 이곳 역시 대부분이 무덤을 건축한 인부들과 건축가들에게 도굴당했는데, 투탕카멘의 무덤만이 1922년 11월 4일 영국인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가 원형 그대로 발굴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도 재위 8년 만인 18세에 죽은 어린 왕이 가여웠던 게 아닐까?
Yul의 궁금증은 집요하다.
“엄마, 그거 물어봐!”
“뭐?”
“그, 투탕카멘 잃어버린 반지.”
“아! 재키, 이집트 박물관에서 투탕카멘 전시관에 열 손가락 반지를 봤는데, 그중 오른손 네 번째 반지만 없었어. 어디 간 줄 알아?”
“도둑맞았겠지.”
“누가?”
“발굴 당시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기념으로 몰래 가져가지 않았을까?”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대답이다.
우리는 Yul의 강력한 바람으로 세 개의 무덤에 입장할 수 있는 표 하나와, 투탕카멘 무덤 입장권을 추가로 구매했다.
재키는 63개의 무덤이 모여있는 왕들의 계곡에서 세 개의 무덤에 들어갈 것을 아래의 이유로 추천했다.
람세스 4세 : 입구와 복도, 미라를 안치한 현실까지 약 88m의 긴 무덤의 모든 구역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당시 왕이 재위하면 바로 무덤 건축을 시작했는데, 6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통치 기간에도 불구하고 긴 무덤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게 기적이다.
람세스 9세 : 람세스 9세는 통치 기간이 약 18년으로 이집트에서 세 번째로 재위 기간이 길었지만, 무덤이 완성되기 전에 죽어 미완성된 채로 매장됐다. 그래서 중간에 경사로는 벽화가 없다. 현실은 미라 제작 기간인 70일 동안 급하게 완성했기에 람세스 4세 무덤과 이 부분을 비교해 보는 것을 추천. 또 입구 벽에는 아랍어 낙서가 많이 보이는데, 오스만 제국 시대에 이슬람교 전파를 위한 역사 문화 파괴 행위 흔적이라고 한다.
람세스 1세 : 미라를 안치한 석관이 있는 현실이 가장 잘 보존됨. 그러나 19년 통치 후 갑자기 죽으면서 복도 장식은 왕의 사후 제대로 되지 않음
재키의 설명대로 벽화가 없는 공간도 있고, 급하게 완성해 띄엄띄엄 그림이 그려진 곳도 있었지만, 세 무덤은 모두 화려하고 정교한 벽화로 장식돼 있었다.
“벽에 있는 그림이 어떤 내용인지 알겠어?”
“음… 왕의 일생에 대한 내용? 아니면, 왕이 사후 세계에 잘 살기를 바라는 기원?”
“그렇게 많이 생각하는데, 사후 세계라고 부르기보다는 제2의 인생이라고 불러. 그리고 그 긴 벽에 새겨진 벽화와 글씨들은 죽어서 제2의 인생으로 가는 여정을 새긴 거야.”
“그게다?”
“응, 죽어서 배를 타고 심판을 받으러 간 뒤, 제2의 인생으로 가는 길은 엄청 험난하고 고된 여정이거든. 그 과정을 다 그려 놓은 거야.”
“어쩐지, 비슷한 그림들이 많더라.”
“응, 모든 무덤에는 태양선이라는 배에 파라오와 그를 사후 세계로 안내하는 여러 신들이 함께 타고 있는 그림이 있어. 그리고 해당 무덤의 주인인 파라오 이름이 히에로글리프에 아주 많이 등장해.”
“색도 엄청 화려한데, 너무 잘 보존돼 있어서 놀랐어. 어떻게 몇천 년이 지났는데도 그렇게 선명하게 색이 남아있어?”
“무덤에 쓰인 색은 검정, 회색, 초록, 빨강, 노랑, 파랑, 이렇게 여섯 가지인데, 모두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아주 오래 가.”
무덤에 들어가기 전 각 무덤의 주인인 왕에 대한 설명과 그 무덤에서 꼭 봐야 할 것을 설명 들었고, 모든 무덤을 관람한 후에는 세 무덤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제2의 인생이 있다면, 고대 이집트 인들의 상상처럼 거기까지 가는 길은 그리 녹록지 않을 것 같다.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지금 생의 가치도 한없이 가벼워지겠지.
고대 이집트인은 고되고 험한 제2의 인생길을 통해, 지금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보여주려 한 게 아닐까?
Yul은 첫 무덤에서 벽화에 그려진 뱀과 태양선, 스키라베를 찾아가며 흥미를 보이더니, 두 번째부터는 비슷한 그림이 가득한 길고 경사진 길을 오가는 게 버거운 듯하다.
다행히 세 번째 들어간 곳은 투탕카멘 무덤이다.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현실에 전시된 미라가 보인다.
유리관 안의 18세 왕은 까맣게 변한 발과 머리를 제외하고 온몸을 하얀 천으로 가렸다.
Yul은 처음 보는 미라가 충격적인지 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본다.
나 또한 오묘한 기운에 얼빠진 느낌이다.
영화에서나 보던, 미라를 감싸고 있는 연기 모양의 기운이 유리관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 같다.
Yul은 아직도 이집트 여행의 베스트를 꼽으라면 투탕카멘 미라를 본 것이라고 한다.
화려하지도 장엄하지도 않은 보잘것없는 검게 변한 미라는 어린아이의 혼을 제대로 사로잡았다.
유난히 짧고 얕은 투탕카멘의 묘에는 미라를 안치한 현실을 제외하고는, 복도에 벽화가 없다.
재위 기간이 짧은 데다 너무 어린 왕이라 무덤 건축을 서두르지 않았었나 보다.
그런데 사후세계로 가는 길이 없어서인지 투탕카멘의 혼은 아직도 미라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나와 Yul이 느낀 이날의 기운이 내 엉뚱한 상상을 자극한다.
이 년 전쯤 염세적인 성격의 Yul 친구 엄마가 공감 가는 얘기라며 한 말이 생각난다.
“글쎄,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 뭐로 태어나고 싶은지 물었는데, 아는 사람이 ‘돌’로 태어나겠다고 했어요. 정말 그 말이 정답이다 싶었어요. 이 꼴 저 꼴 다 싫고 그냥 돌로 살고 싶대요.”
투탕카멘의 인생은 알려진 게 거의 없으나,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추측이 많다.
그런 그도 돌로 태어나고 싶다는 그 사람과 비슷한 심정이지 않을까?
제2의 인생길이 없는 묘에서 영원히 죽은 육체에 붙어, 자신을 기억하러 오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영혼이 있을 수도!
제2의 인생이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갈지 생각해 본다.
‘모든 존생은 고통이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떠올리니 이번 생이나 제대로 살고 미련 없이 가고 싶다.
그런데, 다시 한번 Yul의 엄마가 될 수 있다면, 어떤 힘든 길이라도 뚫고 제2의 인생을 얻고 싶다.
그러고 보니, 지금 옆에 있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해야겠다는 다짐으로 귀결된다.
제2의 인생으로 가는 길은 사자가 길고 고된 과정을 감내해야 하는 길도, 영혼이 이승을 떠돌게 된 이유도 아니다.
그 길은 지금 제1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인생의 소중한 가치를 시사하는 고대 이집트인이 만든 지혜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