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이집트 여행 준비물
이집트 여행을 했거나, 주변에 다녀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장염약은 꼭 챙겨가세요! 물갈이로 엄청나게 고생했어요.”
알았다고 하면서도 흘려들었다. 나는 어느 나라를 가도 물갈이가 거의 없었던 터라 걱정되지 않았다. 평소 외출을 해서도 항상 뭔가 준비가 덜 돼 궁여지책으로 주변에서 빌리거나 불편함을 감수하는 나다. 반면, 아이와 외출할 때 휴지, 물티슈, 간식, 여벌 옷, 수저까지 챙겨가는 형님을 보며, ‘참 유별나, 주변은 편하지만, 본인 인생은 피곤할 거야.’라고 생각한다.
내 게으름과 덤벙거림을 방어하기 위한 나름의 논리도 있다.
‘아이를 전혀 불편함 없이 키우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기를 수 있을까? 휴지가 없으면 종이를 비벼 쓰거나, 수저가 더러우면 새것을 요구하던지 물에 담가 쓱쓱 닦아 쓸 줄도 알아야지!’
이 생각으로 아이가 불편하다고 말할 때까지 작아진 신발과 옷을 그대로 입히기도 한다. 남편은 그런 나의 육아 방식이 마뜩잖다.
“옷 좀 많이 사서 자주 좀 갈아입혀. 그리고 얼굴에 뭐 묻었으면 바로 닦아주고.”
“얘들 금방 큰다. 그리고, 자장면 먹으면 닦아도 다시 묻을 텐데 다 먹고 물로 한 번에 닦는 게 낫지, 뭐 하러 형광증백제를 계속 얼굴에 문질러.”
Yul은 이런 내 영향을 더 많이 받은 듯하다. 출국 면세점에서 Yul이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입에 쓱 집어넣어 나를 기겁하게 하기도 했다.
이런 나에게 이집트 여행에 장염약, 항생제, 심지어 필터 샤워헤드까지 꼭 챙겨가라는 조언이 먹힐 리가 없다. 그런데 생각보다 여행 가는 날이 넉넉하게 남았다. 11월 하릴없이 휴대폰을 뒤적이는데, 무슨 무슨 데이라는 이름으로 할인 마케팅을 하는 광고에 눈이 갔다. 마케터가 소재를 잘 만들었는지, 연상 효과 때문인지 모르겠다. 샤워헤드와 필터 다섯 개를 묶음으로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는 광고였다.
‘이 가격이면 한 번 사볼까?’
충동구매 후 여행 짐 한쪽에 구겨 넣었다. 내 덤벙거림을 알기에 꼭 필요한 여행용품은 생각날 때마다 정리하고 구매해서 서랍에 모아놓고 있었다. 아이와 여행한다고 나름 이례적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이번 여행 후 필터 샤워헤드는 앞으로 내 여행 필수품 목록에 들어갔다. 샤워헤드가 투명해 안에 필터가 보이는 제품이었는데, 모든 숙소에서 한 번 사용에도 필터가 탁한 누런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어떤 호텔에서는 형광 초록색 불순물까지 필터에 낀 게 보였다. 한국의 상수도 시스템에 경의를 표한다. 나는 정말 좋은 나라에 살고 있는 행운아다. 여행 후 집 샤워헤드도 같은 제품으로 교체해 사용했는데, 삼 주쯤 지난 지금도 하얀색 그대로다.
그런데, 알수록 피곤한 게 인생이다. 몰랐을 때가 더 속 편했을 것 같기는 하다.
장염약과 항생제 역시 나 혼자 가는 여행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준비물이다.
그때는 공교롭게, 지금 생각하면 다행하게도 이집트 출발 당일 한국에 돌아오는 일정의 일본 출장이 잡혔다. 김포공항에 열두 시쯤 떨어지면, 급히 집에 와서 짐을 정리하고 저녁 여덟 시에 인천공항으로 출발하는 스케줄이다.
“테일러 스위프트급 일정이네요!”
회사 동료의 말을 생각하며 피식 웃고, 짐을 다 정리하니 오후 세 시다. 시간 여유가 생긴 김에
아이 손을 잡고 병원에 갔다. 현실감 없던 내가 병원에 들어가니, 혹시나 아이가 아파 호텔에서 요양만 하다 오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여행 상비약 처방받으려고요.”
“어디로 가세요?”
“이집트에 십일 정도요.”
“어떤 약 드릴까요?”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이라 그냥 들었던 것들을 읊었다.
“장염약, 항생제… 거기가 물이 안 좋아 장염에 잘 걸린대요. 열흘 치 약 주세요.”
그렇게 Yul 상비약에 내가 먹는 피부과 약까지 넣으니 여행 가방의 20%는 약이었다. 상비약을 쓸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으로 약들을 천덕꾸러기 대하듯 짐을 꾸렸다.
그리고 이 여행은 에너지 부스팅을 위한 공진단으로 시작했다.
“엄마 입에서 똥 냄새나!”
Yul이 싫어하는 약이지만 출장과 여행 때마다 공진단 덕을 톡톡히 본 덕에 한 알을 우적우적 씹으며 두 알을 더 챙겨 집을 나섰다.
그리고 겸손해지기로 다짐한다. 먼저 경험한 이들의 조언을 들을 수 있어 다행이었고, 그걸 따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에도 감사했다. 결국 모든 약은 여행 동안 매우 요긴하게 사용됐다.
“어휴… 지가 의사야, 의사!”
엄마가 열 나는 나에게 병원에 가라고 하면 ‘이건 내가 아는데 땀 쭉 빼면 나을 거야.’ 등 온갖 핑계를 대거나, 처방받은 약 중 ‘어머! 과잉 처방이네. 소화제 빼고 비염약은 먹으면 졸리니까 빼고 이것만 먹어야지.’ 할 때 엄마가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이다.
지금도 이 기조는 바뀌지 않을 것 같지만, 항상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열어 놔야겠다. 특히, 여러 사람이 한 목소리를 낼 때 내가 반대 의견이라면 더욱더!
상비약(항생제, 장염약, 해열제 등): 챙겨간 상비약이 없었다면 이집트에서 외국인 병원을 찾아 헤맸을 것이고, 엄청난 금액의 청구서를 받았을 거다. 상비약 덕에 돈과 시간을 절약했다.
필터 샤워헤드(필터가 보이는 투명 디자인 추천): 이집트 수질이 좋지 않다는 소문은 파다하다. 팩트체크 제대로 했다. 한두 번 샤워하면 필터를 교체해야 할 정도로 필터 색이 누렇게 변했다. 또, 요즘 웬만한 교체용 샤워헤드가 그렇듯 강력한 수압은 덤이다.
<흔한 남매> 책 (여덟 살 아이와 간다면): 아이에게 이번 여행은 디지털 디톡스가 필수임을 선언했다. 그래서 책을 한 권 챙기라고 했더니 고른 게 <흔한 남매>다. 책까지 유튜브에서 파생된 상품이라니 눈살을 찌푸렸었다. 이왕이면 이집트 여행책을 챙기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책만한 효자가 없었다. 아랍어만 나오는 호텔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아이 시선을 끌지 못했고, 결국 Yul은 여행 내내 이 책을 외울 정도로 읽게 됐다. 차 안, 호텔, 공항에서 내 소중한 자투리 시간을 지켜준 꿀템이다. 아니었다면, 내내 빙고랑 묵찌빠, 역할 놀이를 해야 했을 거다.
트래블월렛: 기준 환율로 다양한 국가의 통화를 전자지갑에 환전해 넣을 수 있고, 실물 카드가 있다면 현지에서 그 나라 통화로 현금 인출도 가능하다. 또 실물 카드는 현지에서 직불카드 기능까지 한다. 사용할 때마다 빠져나간 돈을 앱으로 확인도 가능하다. 가끔 해외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제대로 된 것은 맞는지 불안할 때가 있는데 그런 걱정을 말끔히 제거해 주는 고마운 서비스다.
이집트 파운드(어느 정도): 단, 트래블월렛을 너무 맹신하지 말 것! 여행 준비하며 트래블월렛으로 카이로 공항에서 환전했다는 여러 블로그 포스팅을 확인했다. 초록색 기계를 찾아서 하면 수수료도 없다는 친절한 설명을 잘 새겨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카이로 공항에 도착! 그런데, 내가 도착한 2터미널 입국장 어느 ATM 기계에서도 트래블월렛으로 출금할 수 없었다. 당장 택시 탈 돈도 없는데 막막했다. 그렇게 이 기계 저 기계를 전전하며 초조해하다 결국 출금을 포기했다. 그리고 심지어 앱으로 확인하니 어떤 기계에서는 전산만 보내고 현금은 안 내어줬는지, 돈은 못 뽑았는데 이미 앱에서는 4,000 이집션 파운드, 약 16만 원이 출금됐다고 뜬다. 손해 본 거는 그렇다 치고 빨리 현금이 생겨 이 공항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니 수수료에 연연하지 말고 적어도 2,000 이집션 파운드 정도는 미리 한국에서 환전해 가는 것을 추천한다.
USD (넉넉히): 결국 챙겨간 미국 달러와 유로를 탈탈 털어 공항 환전소에서 이집션 파운드로 환전했다. 얼마 전 출장에서 남았다며 남편이 건넨 200유로와 75 미국 달러가 전부였지만, 이 돈이 아니었다면 이후 2박 3일은 거지 여행이 될 뻔했다. 또, 관광지 투어 상품 중에는 달러를 요구하는 곳이 꽤 있다. 달러 없으니 이집션 파운드로 내겠다고 하면 가격이 조금 올라간다. 그러니, 달러는 넉넉히 챙겨가면 좋다. 10일 일정에 다양한 투어에 참여할 계획이라면 500달러 정도면 넉넉할 듯싶다.
발열 내복(12월~1월): 여행 전 일기예보를 체크하니 여행 기간 이집트는 아침 저녁 13~16도, 낮에는 26도까지 올라간다. 낮에 수영하거나 자전거 여행하기에 안성맞춤이고, 아침저녁 선선한 공기에 많이 걸어도 부담 없을 날씨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혹시나 해서 챙겨간 발열 내복은 나와 여행 내내 혼연일체가 됐다. 사막기후라는 것을 간과했었다. 아침, 낮, 밤 그냥 다 춥다. 한국 같은 혹한의 추위는 아니지만, 항상 쌀쌀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경량 패딩과 지퍼형 후디를 챙겨가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핫팩(사막 투어 계획이라면): 12월 사막의 밤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추웠다. 야외 취침을 하며 쏟아지는 별을 지붕 삼아 잠들겠다는 포부였지만, 저녁 7시에 바로 텐트 취침으로 마음을 바꿨다. 텐트에서 침낭에 들어가고 그 위에 두꺼운 담요도 덮었지만, 발이 시리다. 핫팩 두 개를 까서 발 쪽에 하나, 손 쪽에 하나 두고서야 잠이 들었다.
수건: 사막 투어에 필요할지도 몰라 수건을 두 개 챙겼는데, 자리만 차지하고 쓸 일이 전혀 없었다. 수건을 쓸 만큼 물을 묻힐 일이 없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수건은 부피가 크다.
<Cairo’s Street Stories> 책: 카이로 곳곳에 있는 의미 있는 조각상들을 찾아보겠다며 이 책을 챙겼다. 그런데, Yul과는 달리 자투리 시간에도 무언가를 찾고, 쓰고, 알아보느라 책 한 장 펴볼 짬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여유가 있다고 해도, 책을 보느니 멍때리기로 했을 것이다.
반바지, 민소매 티셔츠(12월~1월): 여행 아홉째 날, 가져간 게 아까워 Yul에게 반바지에 트로피컬 무늬 셔츠를 입게 했다. 오들오들 떨며 다니는 모습에 이러다 감기 걸리면 더 고생이라 생각해 얼른 긴바지, 긴팔로 갈아입혔다. 반소매 옷은 지퍼형 긴팔 셔츠 안에 레이어링이라도 하는데, 반바지는 정말 필요 없는 아이템이다.
털모자: 사막 취침 시 머리가 시렸다는 어느 블로거의 글에 털모자를 챙겼다. 이것도 캐리어에서 자리를 만만치 않게 차지했다. 그런데 텐트에서 잔 우리에게 크게 필요 없는 아이템이었다. 머리가 시릴 게 걱정이면 후디를 가져가서 옷에 달린 모자를 쓰고 자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