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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경아 Feb 04. 2024

06. 시계가 지배한 여행

@기자 피라미드

아이의 속도에 맞추는 여행을 하기로 생각하며 일정을 짰다. 

그래서 타이트한 스케줄로 움직여야 하는 패키지여행은 고려 사항에 없었다. 

그런데 Yul은 내 생각보다 느렸다. 궁금한 게 많고 담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런 Yul에게 엄마 마음의 시계에 맞춰서 움직이라고 재촉한 여행이 시작됐다.


피라미드가 있는 기자의 숙소에 도착하니 오후 1시. 주변에 식사할 곳을 찾아가서, 주문해 먹고 피라미드를 보면 시간이 많이 늦어질 것 같았다. 오후 네 시 반으로 예약한 박물관 투어를 기점으로 시간을 역 계산해 보니 빠듯하다. 이집트 파운드 환전하느라 공항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 

그래서, 숙소에서 챙겨온 컵라면을 하나씩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피라미드 바로 앞 호텔을 예약한 덕에, 창밖으로 피라미드를 보며 컵라면을 먹는 호사를 누린다. 백만 불짜리 전망을 보며 급하게 끼니를 때운 우리는 저녁 식사 예약을 위해 옥상 레스토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근사한 테라스 레스토랑이 펼쳐질 거라 상상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마자 레스토랑 증축 공사를 위해 건축자재를 나르는 성인 남자와 어린아이를 마주쳤다. 아이는 Yul보다 두어 살 많아 보였다. 한 손 가득 나무 합판을 들고 아빠인 듯한 어른 뒤를 따르는 표정이 무미건조하다.

그들을 지나쳐 문을 열고 나가니 유리창 필터를 끼지 않은 날것의 피라미드가 눈앞에 등장했다. 호텔 예약할 때 봤던 페이지 상단 1번 이미지 그대로다. 그 사진에 매료돼 선택한 호텔인데, 오기 전 시청각 자료를 너무 많이 본 게 후회된다. 상상했던 것 같은 숨 막히는 감동은 아니었다. 

‘드디어 왔구나!’, ‘사진에서 본대로 멋지네!’ 정도였다. 소셜미디어, 호텔 예약 플랫폼 등, 굳이 마음먹지 않아도 최고의 순간 최상의 컨디션으로 찍은 여행지 사진들을 볼 수밖에 없는 요즘이다. 그래서 상상하지 못한 것들이 눈앞에 펼쳐질 때의 감동이 어렵기도 하다.


얼마 전 Yul이 “왜 지구에서 한국만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 있어?” 묻길래 급하게 DMZ 평화 투어를 예약했다. 코스에는 제3땅굴이 있었다. 카메라와 휴대폰 반입이 금지된 곳이라, 인터넷에는 내부 사진을 찾기가 어렵다. 그리고 전쟁을 위해 파 놓은 땅굴에 무슨 미학적 가치가 있다고 사진을 찾아보겠는가! 그런데 그 안에서 본 아름다운 광경에 나는 넋을 잃었다.

땅굴을 발견한 뒤 우리 군은 북한군이 넘어오는 것과 남에서 월북하는 것을 동시에 방지하기 위해 시멘트벽을 세 겹으로 쳤다고 한다. 그리고 벽에는 반대편을 관찰하기 위한 작은 유리문을 설치했는데, 벽과 벽 사이 공간에 누가 심은 것도 아닌데 꽃이 피었다고. 버스에 앉아 설명을 들을 때는 척박한 환경에서 꽃 몇 송이 피었겠거니 싶었다. 실제로 보니 SF영화 한 장면 같다. 우주 어딘가 생명이 사는 행성의 거대 이끼 정원, 또는 인류가 멸망하고 생명력을 잃은 지구가 긴 휴식기를 가진 후 다시 생명을 움트기 시작한 광경을 목도한 것 같다. 돌이나 바닥에 붙은 이끼가 아니라 거대하게 자란 이끼 같은 풀들이 있고, 그사이에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온다. 결정적으로 이 빛이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투어 가이드 설명으로는 그냥 반사된 LED 불빛이라고 한다. 휴대폰이 없으니, 머리와 마음에 남기기 위해 더 몰입해서 들여다보게 된다.


반면, 호텔 옥상에서는 딱 사진에서 본만큼 감동하고, 본격적으로 피라미드를 보기 위해 나섰다. 

마음은 급한데 피라미드 입구에는 사람들이 질서 없이 엉켜있다. 대부분 현지인 같은데, 관광객이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우리에게 사람들이 말을 건다. 그중 한 사람이 직원인 것 같았다. 티켓 구입부터 나름의 패스트트랙으로 입장시켜 준 것까지 아주 고마운 직원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내부 투어까지 마차로 시켜주겠다는 게 아닌가! 무려 8만 원을 주고 예약한 박물관 투어 시작이 세 시간 남은 터라 마음이 다급했다. 그래서 흔쾌히 마차를 타기로 했다. 그런데 하산이라는 이름의 그 남자가 나보다 마음이 더 급해 보였다. 말이 계속해서 속력을 내도록 30초에 한 번꼴로 채찍을 휘두른다. 내장이 다 뒤집어지고 울릴 정도로 마차는 거칠게 달린다.

“어..어..어어어얼얼얼엄마. 피이이이일일일라미이이이드드드드다!”

“어어어억어.”

“저…어어어어 무으으느으은 뭐어어어약?”

“아아아아 모오오올라아아!”

마차 위에서는 도저히 대화가 불가능하다. 


Yul은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은데, 동문서답만 하는 하산에게 대답을 기대하기는 어려웠고 나는 골이 울려 빨리 이 상황이 종료됐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그 와중에 하산은 우리가 가장 빨리 간다며 자랑스럽게 마차를 몬다. 그리고 여섯 개의 피라미드가 한눈에 보이는 ‘파노라마 뷰 포인트’라는 곳에 세웠다.(라고 하산이 주장한다)

여행 전 사진에서 본 그곳이 아닌 것 같지만, 시간이 없어 속는 척하고 내렸다. 그리고 하산의 가이드에 따라 피라미드 꼭대기를 손가락으로 잡은 것 같은 착시효과를 주는 사진 몇 장을 찍는다. 

Yul은 낙타를 타고 2분 정도 주변을 돌며 사진 찍기도 했다. 낙타를 타는 경험보다는, 낙타+피라미드+나를 인증샷으로 남기려는 이들을 타겟으로 한 상품이다.


낙타 서비스를 제공하는 남자 옆에는 Yul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앉아서 모랫바닥만 쳐다본다. 나는 지루해 보이는 아이에게 잠시라도 즐거운 경험을 선물하고 싶어 가방에서 캐러멜과 초콜릿 과자인 빈츠 몇 봉지를 꺼내 건낸다. 그제야 아이 얼굴에 표정이 생긴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무척 예쁜 아이다. 

아이가 손을 내밀어 과자를 받는데 크고 검은 손이 불쑥 들어온다. 그의 아빠다. 본인도 달라고 활짝 편 손을 아래위로 흔든다. 안주면 아이 간식을 나눠 먹겠구나 싶어 아빠에게도 간식 몇 개를 나눠줬다. 

시간 여유가 있었다면 번역기라도 돌려가며 아이와 이야기해 보고 싶었는데 네 시 반으로 예약한 8만 원짜리 투어가 나를 압박한다. 


다시 고난의 마차에 올랐다. 그런데 나보다 마음이 급한 하산은 피라미드 앞에 서지 않고 바로 스핑크스로 가려는 것이다.

“잠깐! 피라미드 앞에 세워줘! 나 그 앞까지 갔다가 올래.”

못 들은 척하는 것 같더니 큰 소리로 다시 말하니 못마땅한 얼굴로 마차를 세운다. 

그 친절한 피라미드 직원이 손님 한 명이라도 더 받고 싶은 고약한 가이드라는 게 명백히 드러난 순간이다. 

나와 Yul은 불가사의한 건축물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한 발씩 내딛는데 여러 명의 십 대 소녀들이 몰려든다.

“픽쳐, 픽쳐.”

한 소녀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알았다며 사진을 찍으니 그 소녀 친구들도 모두 한 장씩 찍자며 몰려든다. Yul은 사진 찍히는 게 싫지 않은 듯했다. 

그렇게 포토타임을 즐기는데, 하산이 험악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마치 케이크에 꼬인 파리 떼를 쫓듯이 소녀들을 향해 팔을 휘휘 저으며 뭐라고 소리 지른다. 나는 흩어지려는 소녀들에게 아쉬움의 마음을 표현하려 빈츠 하나씩을 나눠주고 바로 마차를 탔다. 


하산은 성가신 관광객을 이제야 보낸다는 듯이 스핑크스 앞에 우리를 내려주고 돈을 요구한다. 

처음 마차를 탈 때는 두 시간에서 두 시간 반 돌게 될 것이라 했다. 그런데 한 시간 반 겨우 채우고 마차 경험도 하산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후하다 생각하며 400 이집트 파운드를 줬다.

“이건 아니지! 보통 600파운드 주는데, 만족한 관광객들은 800파운드도 줘. 이거 겨우 미화로는 10불밖에 안 되는 돈이니 더 줘!”

나는 마지못해 200파운드를 더 주고 하산과 작별했다. 


하산이 없는 스핑크스 구경은 한결 편안하다.

“엄마, 저 구멍은 뭐야?”

“엄마, 저 문으로 가면 뭐가 있어?”

“엄마, 스핑크스 발 쪽은 못 내려가? 어! 내려간 사람 있네. 우리도 가보자.”

Yul도 이제야 여유가 생겼는지, 궁금한 거, 하고 싶은 거를 쏟아낸다. 이제는 지치고 마음이 급한 내가 Yul에게 하산이 되는 순간이다.

“엄마도 잘 모르겠어. 우선 여기서 사진 몇 장 찍고 가자. 저기 내려가 봤자 별거 없어. 그러니 사람들이 안 가지. 우리 박물관 시간 맞춰 가려면 시간 없어.”


이집트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이런 식으로 보게 되다니!

하산 탓할 것도 없는 게, 8만 원 티켓에 발목 잡혀 피라미드를 돌아보는 내내 나도 불안한 마음으로 10분마다 시계를 들여다봤다. 마음이 급해지니 사진만 남기고 다음 인증샷 포인트로 넘어가기 바쁘다. 현장까지 왔는데도 휴대폰 화면 속 피라미드를 더 많이 본 것 같다.

또, 이집트 온다고 나름 십여 권의 책을 읽으며 공부했으나, 아이의 질문에 할 수 있는 대답은 거의 없다. 책에서와 현장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매우 달랐다. 현장에서 아이 시각으로 관찰하고 던져진 질문들은 전문 현지 가이드 없이는 대답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리고 가장 속상한 건 시간에 쫓겨 둘러보니 마주친 이들을 스쳐 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호텔에서 건축자재를 나르던 아이는 몇 살이며 어떤 꿈을 가졌는지가 궁금했다. 아빠 일을 도우며 커서는 아빠와 같은 일을 하고 싶은 것일까? 

낙타 아래 모래를 하염없이 보던 아이는 형제가 몇 명이고 어떤 놀이를 좋아할까? Yul과 함께 가위바위보라도 하면서 잠시 유희의 시간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피라미드에서 사진을 찍자고 한 십 대 소녀들은 왜 우리와 사진을 찍고 싶었을까? 매일 수백 명의 관광객이 오는 곳인데 그들과 찍은 사진이 그녀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서로 손짓발짓, 번역기를 사용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알아가는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렇게 느린 속도로 여러 사람들과 소통하며 세상의 다양한 색채를 체험하겠다는 이번 여행의 목적을 망각한 채, 8만 원 투어 코스로 향했다. 이집트 정부에서 야심 차게 오픈 준비 중인 그랜드 이집션 뮤지엄(Grand Egyptian Museum)은 임시 개장임에도 거대한 석조상들이 늘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뿜어낸다. 투어는 투탕카멘 영상 시청으로 시작됐다. 화려한 영상이 벽을 따라 사방에서 나오고 웅장한 사운드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Yul은 흥미롭게 보는 듯싶더니 시차 때문에 이내 머리를 내 무릎에 파묻고 잠이 든다. 영상이 끝나고 가이드 설명을 들으러 가는데, 이미 반쯤 잠든 Yul이 호텔로 가자고 조른다. 상태를 보니 7시로 예약한 저녁도 포기해야 할 듯하다. 

결국 8만 원 투어는 2만 원 정도의 가치만 겨우 채웠고, 나는 Yul과 ‘피라미드 빛과 소리의 쇼’를 보며 옥상 테라스에서 식사 하겠다는 꿈도 접어야 했다. 숙소로 돌아온 Yul은 바로 잠들었고 나는 점심때처럼 창밖으로 피라미드를 보며 컵라면을 먹고 있다. 8만 원 아까워하다 100만 원 손해 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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