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본 적이 있다. 김정희가 당쟁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외롭고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그린 그림이다. 그래도 자신을 잊지 않고 우정과 의리를 지켜준 친구, 이상적에게 답례로 보낸 서신에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려 넣었다.
초가집에 소나무 그림이 있는 그림이다.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비로소 알 수 있다'는 논어의 자한 편에 나오는 구절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김정희 자신이 잘 나가고 출세가도에 있을 때는 주변에 친구도 많았고 인기도 높았다. 그래서 모두 영원히 푸르른 줄 알았다. 귀양이라는 인생의 추운 겨울이 닥치니 그 많던 친구들은 연을 끊어 버리고 모르는 척 외면했다. 푸른 소나무 같은 단 한 명의 친구, 이상적만이 계속 지원과 응원을 해 주었다.
세한도에는 불우한 처지에 떨어졌음에도 의리를 지키는 친구에 대한 고마움이 잘 배어 있다. 자신의 처지가 겨울 소나무같이 외롭고 고단한 처지임을 암시하는 중의적 의미도 있을 것이다.
세한도를 보면서 하얀 여백과 검은 먹으로 흑백의 그림을 그렸을 뿐이지만, 추운 겨울, 외로움, 고단함, 소나무의 절개와 기상 같은 느낌을 리얼하게 전달해 준다. 보고 있으면 으스스 추워진다. 한기가 들 정도다.
이런 느낌은 집과 소나무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백으로 남겨 놓음으로써 더 강렬해진다. 핵심만을 포착해서 그린 다음 나머지는 모두 제거해 버리는 동양 미학의 정수다.
추사 김정희가 글씨뿐 아니라 그림에도 깊은 조예를 보이는 것은 여백의 미를 잘 활용하기 때문이다. 그리지 않음으로 그리는 것, 쓰지 않음으로 쓰는 것. 쉽게 이를 수 없는 경지이고 내공이다.
화선지에 먹으로 그린 그림이 가지는 매력은 여백에 있다. 흔히 여백을 동양적 미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한다. 유교, 불교, 도교와 같은 동양철학이 갖고 있는 공통점의 하나가 여백이라고 생각한다. 도(道), 의(義), 무(無), 공(空)과 같은 동양철학 자체에 여백이 많다. 심지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주장은 깨달음은 문자나 글 자체의 의미를 가지고는 전달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비워 놓은 여백 자체가 삼라만상 우주의 법칙이라는 좀 극단화한 생각같아 보인다.
캔버스에 하나의 빈틈도 없이 물감으로 모두 칠해 버리는 서양화와 달리 동양의 그림에는 여백이 많다. 서양의 세계가 직선이라면, 동양의 세계는 곡선이고 서양이 컬러풀하다면 동양은 흑백이다. 서양이 descriptive 하다면 동양은 intuitive 한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