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같은 회사
지역 인재를 뽑는다는 명목으로 그 당시 공채에는 우대항목이 몇 가지 있었고 나 역시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우대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 서류전형을 통과했다.
합격의 문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이득을 챙겼지만, 그건 곧 나에게 불이익으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입사하자마자 나는 내 이름 석자대신 누구의 딸, 누구의 손녀로 얼굴을 알렸다.
나도 알지 못하는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이야기는 물론이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야기까지 곳곳에서 들렸다. 원치 않은 이야기였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들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처음부터 그것을 듣고 말고의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우리 집안의 치부까지 고스란히 드러나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보고 나는 지역에 기반을 둔 회사의 장단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아는 사람보다 나를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내가 작은 실수를 하면 눈감고 넘어가줄 사람이 많다는 거였지만, 그만큼 내가 봐줘야 할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한 할아버지가 내 자리에 성큼성큼 오셔서,
"나는 구양 할아버지 논 옆에서 논농사 짓는 사람이야."
나는 팀을 옮길 때까지 그 할아버지의 전담 직원이 되어야만 했다.
금융권을 다니기 위해 계약직으로 1년 동안 집 근처에서 다녔던 은행에서 배운 FM 업무가 여기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때문에 나는 어느 순간 융통성 없고 싹수없는 신입행원이 되어있었다. 그 말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우리 아빠에게까지 전해졌다.
부끄럽기보다는 내가 도대체 무얼 잘못했냐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맘 때쯤, 일이 있었다.
매번 와이프의 통장 거래내역을 출력해 가는 철물점 사장님이 있었는데, 매번 편의를 봐줬음에도 고마운 줄 몰랐다. 다음에는 안된다는 말을 책임자가 나서서 했고, 그다음이 내가 되었다.
안된다고 말했지만, 그 아저씨는 내가 신입이라는 이유로 나를 정말 무자비하게 물고 뜯었다.
최고 책임자에게까지 보고되는 큰일이 되었고, 그때 그 책임자는 나를 방어해주지 않았다.
세 명이 그 방에 앉았고 화가 누그러진 그 아저씨가 나한테 처음 한 말이,
"내가 아빠를 잘 알아."였다.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책임자는 나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라고 했지만,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죄송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영혼에도 없는 죄송하다, 고맙다는 말을 잘하는 짬이 찼지만, 그때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어른들이 이제 갓 사회에 나온 어린애를 상대로 괴롭힌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방관하는 책임자,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해 달라면서 고마워하지도 않고 되려 적반하장의 태도인 사장님,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죄송하다는 나의 사과로 일을 무마시키려 했던 최고 책임자.
25살 나에게는 사회에서 만나고 싶지 않았던 나쁜 어른들이었다.
회사 동료라기보다는 참견 많은 옆집 아줌마, 아저씨가 되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궁금해하며 꽁꽁 싸매고 있던 허물을 하나씩 벗어내길 그들은 바랐다. 마치 벌거숭이가 된 채 회사를 다니는 꼴 같았다.
퇴사의 뜻을 밝혔을 때도 최고 책임자는 나에게 그 이유를 묻기 전에 우리 아빠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아빠는 그에게 본인의 뜻이 그러한데 내가 아빠라고 해서 막을 이유는 없다고만 말했다고 했다. 안타깝지만 말이다.
그 누구는 그런 회사의 결속력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동료와 퇴근 후 술잔을 기울이며 사적인 만남을 지속하고, 운동 동호회를 만들어 주기적으로 게임 내기를 하기도 하고.
하지만 11년 회사를 다니며 느낀 바는 회사 사람은 회사에서만 만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가족 같은 회사는 절대 없다.
나는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직장과 회사의 상당한 거리가 그것을 지키기에 아주 좋은 핑곗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