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그녀'로 작문하시오
그 애를 처음 본 건 4월 1일이었다. 희진이 맞지? 다음 시간 국어 아니고 수학이야. 나는 그 애를 흘깃 내려다봤다. 삭막한 재수학원에서 이름이 뭐야? 라고 말을 붙인 애들은 많았어도 내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체를 한 애는 처음이었다. '내 성격에 친구 사귀면 재수생활 망한다'를 캐치프라이즈로 삼아 간신히 버티고 있었는데. 그 애는 수학 교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는 나에게 윙-하면서 오더니 국어 교재를 쥐어줬다. 오늘 만우절이잖아. 하면서 웃는 애가 밉지 않았던 건 내 책상 위 수학책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치던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었을지도 모른다.
흔해 빠진 시 구절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 애를 처음 만난 순간을 이렇게 기억한다.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되었다고. 사람을 공장처럼 찍어내는 재수학원 학생들 속 한 명이 아니라 '그(the)' 사람이 되었다고. 여전히 시간이 되면 급식실로 가서 밥을 먹고, 사람이 빽빽히 들어찬 강의실에 앉았으며, 담임은 오르지 않는 성적으로 나를 호명했지만 그 애랑 함께 있으면 나는 나라는 사람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그 애는 내가 밥 먹을 때 무슨 반찬을 싫어하는 지 알았고, 수학 등급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았다. 수업시간에 불가항력으로 졸고 있을 때, 내가 피곤할수밖에 없는 이유를 아는 것도 그 애뿐이었다.
그 애는 돈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가지 못하는 곳이 많았다. 휠체어를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교실 자리는 맨 앞이나 맨 뒤에 고정이었고, 자습실 자리도 바람이 비집고 들어오는 문 옆자리였다. 급식실을 갈 때도 남들보다 10분쯤은 돌아가야만 했다. 이 사실은 그 애를 명확히 ‘그(the) 녀’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휠체어 타고 다니는 애’로 그 애를 명명했다. 그 애의 전통휠체어 소리가 날 때마다 그 애를 쳐다봤고 그 애와 내가 지나갈 때마다 배려의 얼굴을 띄고 길을 비켜주곤 했지만, 그 애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애는 신경쓰지 않았지만 가끔씩 내게 미안한 눈길을 보내곤 했다. 나 또한 이런 상황에 그 애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친구라는 점에서 그 애는 나에게도 ‘그(the) 녀’였으니까. 그 점이 나를 씁쓸하게 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애는 '그(the)' 녀가 아니라 '그녀(she)'조차 되지 못했다. 기숙사의 비좁은 통로도, 강의실의 단차도, 비좁은 화장실과 엘리베이터는 그 애에겐 맞지 않았다. 나는 휴가도 별로 안 나가고 싶어. 왜? 라는 나의 무지한 물음에 그 애는 웃으며 답했다. 너 나랑 같이 다녀봐서 알잖아. 그 애는 나를 처음 본 날 '오늘 만우절이잖아'라고 말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했다.
그래도 한 번 다녀와. 여기만 있으면 너무 답답하잖아.
나는 휴가를 나간 그 애의 전화를 받은 순간 뱉은 말을 후회했다. 그 애는 다리가 아파 병원에 입원해서 당분간 학원을 가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지하철역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휠체어 리프트를 타다가 조금 굴렀다고 했다. 다리가 불편하단 이유로 다리를 다쳐야 한다고? 나는 맺힌 말과 감정이 많았지만 그 어느것도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애는 내 마음을 알았는지 괜찮다며 웃고는 아마 한 달쯤이면 다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희진아 한 달 금방 가. 6모쯤 갈게. 나는 놀아줄 사람 없으니 빨리 나으라며 실없는 소리를 내뱉곤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종이 쳤다. 나는 다시 사람들 무리에 뒤섞여 교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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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그녀, 김핑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도 업로드 예정입니다:)
많이많이 읽어주세요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