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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angsungaa Nov 04. 2020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이중생활

홍콩에서 돌아와 내 앞에 놓여진 제안은 여러모로 복잡한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제안에 덜컥 YES라 대답했다. 당시를 회상하면 정말 무모하고 성급한 결정이었지만, 이 결정이 없었다면 아마 난 지금까지도 항상 사고실험으로 ‘이런 사업을 해볼까?’란 생각만 하며 회사 생활을 하는 샐러리맨이었을 것이다. 안정된 길을 걷기에 엄마에겐 잘 큰 아들이고, 결혼을 했거나 준비 중인 남자친구로 남았을테다. 양복을 입고 후배들에게 커리어 조언을 하기도 했을 것이고.


이 무모한 YES의 뒤에는 여러가지 복합적 이유가 있다. 우선, 내면의 불안감이 있었다. 잠깐의 미끄러짐은 있었지만, 고등학교 - 대학교 - 인턴 - 통역장교로 이어져오는 길은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탄탄한 나의 모습을 완성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통역장교로서도 꽤나 많은 성취를 이룬 나이기에 회사이건 미국 대학원이건 자소서 역시 (표면적으로는) 자신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겉이 탄탄할수록 안은 불안함이 팽창하기 마련이다. 사실 엄청난 불안감이 있었다. 잠깐의 미끄러졌던 그 순간이 혹시나 전역하고 또 이어지진 않을까라는. 만약 이번에도 미끄러진다면 나는 큰소리 떵떵치며 살던 “나 진짜 열심히 잘 살아왔어”라는 내 에고가 무너지는 것이니까. 그걸 도피하기에 창업만큼 만만해보이는 것이 없었다. 실패하더라도 누구나 다 미끄러지기 마련인 전쟁터이기에 내가 부족해서 미끄러진 것이 아니라고 우길 수라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면의 불안감 외에 외적인 불안감도 있었다. 전략사 심포지움을 참석할 때마다 세계적인 석학들과 사업가들은 인류가 절대 이전의 세상으로 회귀할 수 없음을 천명하곤 했다. 기술의 발전이 단순히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삶을 침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전략사령부에서 주최하는 심포지움이었기에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가져오는 국가 정책 그리고 국방 정책 측면에서 도전들도 다루었지만, 단순한 경고가 아닌 엄청나게 논리적이고 예시로 가득찬 그들의 프레젠테이션은 나에게 이전의 성공 방식이 앞으로도 먹힐 것이라 담보할 수 없음을 뜻했다. 좋은 학교를 나오고 얼추 보기 좋은 경력을 쌓는 것만으로 앞으로 남은 일생을 살아나가는 것이 과연 안정적일 수 있을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당시 전역 후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나는 이 근원적인 질문이 단순히 철학적이지만은 않았다. 생계적으로 보더라도 내가 탄탄대로라 믿던 길이 만약 추후에 안정적이지 못한 길이라면 과연 내가 한 가정을 책임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나의 후대에게는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적어도 물려주고 싶은 “낀 세대”인 밀레니얼 예비 신랑(당시에 결혼한다면 나를 위한 삶보다는 후대가 더 중요하다 생각했다)에겐 매우 중요한 도전이었다. 나의 회색지대가 계속해서 되물림되는 것이 싫었다. 적어도 나의 자식은 그리고 나의 와이프는 선명한 색을 가지고 삶을 영위할 수 있길 바랬으니까.


내적인 불안감과 외적인 불안감으로 가득했던 나에게 뭔가 성취하고 있던 이가 공동 대표가 되어 창업을 하자는 제안은 구미가 당길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이중생활을 시작하기로 한다.


낮에는 출근해서 군 생활을 하고, 퇴근 후에는 논현 빌라 꼭대기 층의 방 한 구석에서 창업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잠을 6-8시간 정도 자야 신체적으로 무리없다고 하는데, 당시의 나는 새벽 3-4시에 잠실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서 8시 출근버스에 몸을 담았다. 몸은 항상 무거웠고 얼굴은 항상 땡땡 부었지만, 적어도 정신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짜릿한 도파민으로 가득차 있던 시기였다. 사회 속의 문제를 규정하고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그리고 어떤 가정들을 세워나가야 그 문제의 해결책에 가까워질 수 있는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끝장 토론을 하던 시기니까. 문돌이가 꿈꿀 수 있는 끝판왕 아닌가?


새로운 길을 축하해주신 분들이 많다. 아직도 감사하다.


그렇게 준비하던 사업은 그 해 내 생일 다음 날 오픈을 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 오프닝 파티까지 했다. 부동산 사업(코워킹 / 코리빙)을 통해 분절화되가는 사회를 해결하는 마을정확히 말하면 블록체인 산업에 몸담은 외로운 창업가들을 위한 커뮤니티를 조성하고 서로 돕고 같이 사는 곳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시작한 나의 첫 창업은 그렇게 매우 잘 굴러갈 것만 같아 보였다. 부동산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공실률과 공간의 다양한 용도 사용 모두 다 어느 정도 확보한 상태였기 때문에 앞으로 더 잘 될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이중생활을 하던 나는 더 힘들어질 것이 뻔했지만 그래도 기쁘기만 했다.


당시 우리가 리스한 건물의 옥상은 루프탑 공간으로 강남 전체가 다 보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 곳에 올라가 있으면 마치 내가 세상의 왕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곧 머지않아 강남의 부동산이 다 내 품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다는 착각과 함께. 오프닝 파티를 한 날도 나는 퇴근하고 돌아와 방방 뛰며 흥분했었다.


하지만 이 이중생활마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모르겠지만 이 와중에 합참의장 통역으로 호출을 받게 된 것이다. 군 인사가 단행되면서 이전 의장님이 장관이 되시고, 신임 의장님이 취임하셨다. 정책 쪽 경험이 많지 않은 의장님은 (운이 나쁘시게도) 가장 중요한 국가 전략 회의 중 하나인 한미 MCM(한미 군사위원회) 출장을 바로 떠나야 하는 상황에 처하셨고, 마침 의장실 통역장교는 장관실로 이동하여 신삥인 후배로 대체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의장님께서는 전략 협상과 회의 통역 경험이 많은 통역장교를 추천하라 하셨고... 안타깝게도영광스럽게도 부장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께서 추천해주셔서 내가 당첨되었다.


출처: 한국 신문 지면 어딘가


정말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신규 창업한 회사에 나머지 인원들은 모두 올인하고 있는데... 이중생활도 미안한 내가 심지어 더 바빠지는 것이었다. 그것도 전역을 바로 코앞에 두고 말이다.


DMZ 비무장화를 비롯한 온갖 현안이 산적한 상태에서 정책 측면에서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의장님을 수행하는만큼 나의 역할은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사고를 막는 역할이었다. MCM은 기획회의를 전략본부에서 준비하기 때문에 이미 난 그 해 군사위원회에서 어떤 현안이 나오는지 모두 알고 있었고, 그 역할은 잘 수행할 수 있었다. 다만, 연합사령관이자 주한미군 사령관인 당시 브룩스 장군님과 신임 의장님의 조찬 회의 덕분에 내 출근 시간도 댕겨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의 이중생활은 낮과 밤 모두 더 바빠진 셈인데... 문제는 나의 몸뚱아리는 20대 후반, 알콜에 절여진 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내 몸은 뇌에게 위험신호를 보냈다.


우선 장염을 달고 살았다. 장염에 걸려본 적이 있는 이라면 알겠지만 앞뒤로 내가 섭취한 음식들이 다른 형태로 나오는 것은 꽤나 힘든 경험이다. 탈수는 물론이거니와 심할 때에는 구토와 설사가 목과 항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겨준다. 하지만, 이걸 생활의 일부로 달고 사는 것은... 처참하다. 일단 나의 생리적 현상을 내가 조절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를 조절해야 하는 스케줄을 소화해야 한다. 적어도 수행하는 동안은... 한 번은 브룩스 장군과 의장님께서 중요한 회의를 하는데 정말 터져나올 것 같은 장 상태로 인해 식은땀을 정말 미친듯이 흘리며 1시간 회의를 진행한 적이 있다. 당시 비서실장님이 손수건으로 내 얼굴을 계속 닦아주셨는데, 아직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미 나를 잘 아는 연합사 미군 장성분들이나 한국 장성분들은 “광성이 많이 긴장했냐”며 한두마디씩 건냈지만, 진짜 그 때 내 안의 자아는 온갖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물론 입 밖으로는 “아닙니다. 제가 좀 더위를 타나 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고 있었지만...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는 양해를 구하고 연합사 집무 빌딩(white house)의 화장실로 달려갔었다.


전역을 앞두고 약 2달 간 정말 링겔을 달고 살았다. 인스타그램에 가끔씩 ‘나 이 정도로 힘들게 살고 있어’를 티낼 수 있는 인증샷 용도로 맞는게 아니라... 진짜 죽을만큼 힘들어서 맞았다. 국내 수행을 하면서 친해진 간호장교 대위 누나에게 출근하면 “누나... 저 스팀팩 한 방만...”을 달고 살았다. 국방부 내에서 맞는 링겔은 포도당 주사이기에 퇴근 후에는 비타민 칵테일을 종류별로 맞으면서 생명을 부지했다. 당시 여자친구가 “이렇게 살다 죽을 수도 있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너무 오랫동안 못보다가 한밤 중에 겨우 만났을 때 대성통곡을 하던 그녀가 제발 평범하게 살면 안되겠냐고 울분에 찬 얘기를 하던 것도.


하지만 시간은 흘러 전역의 때가 왔고, 나는 행복하게 군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전역을 한 날도 가족과의 식사가 아니라 바로 일을 하기 위해 강남 사무실로 달려왔다.


나의 밤은 정말 당신의 낮보다 찬란했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세상 모든 아름다움은 그에 응하는 대가를 치뤄야한다. 난 나의 건강을 희생했고 많은 관계들을 희생했다. 항상 날에 선 채로 살아야했기에 나의 군생활 말미에 피하던 후배들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중생활을 해야 했기에 계약서도 없이(당연히 급여도 없이) 공동 대표로서 스타트업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나의 밤은 아름다웠기에 나의 낮은 처참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계약서 없는 내가 희생하며 달려온 종착지는 결코 아름다운 밤 이후의 끝내주는 새벽이 아니라...

저주받은 새벽이었다.


당시 사무실 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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