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wangsungaa Nov 05. 2020

친구끼리 뭘 계약서를 써

아니, 써야해


처음 제대로 된 사업에 뛰어드는 20대 후반의 나는 세상 앞에 한 없이 작은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엄마의 잔소리에 “아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소리칠 줄은 알았지만,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은 실제로 그리 많지 않았다.


사업의 기초가 무엇일까? 해결하려는 문제? 비지니스 모델? 성장 가능성? Go-to Market 전략?


나홀로 하는 사업이 아니라면 난 단언컨대 팀원 구성과 그 구성원 간의 상호합의라 생각한다. 구성원이 좋으면 해결하려는 문제가 바뀌고 비지니스 모델이 바뀌어도 버틸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버틸 수 있는 힘의 중추는 상호 간 합의 그리고 그 합의 속에 내포된 신뢰이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사업의 가장 중요한 조각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단언할 수 있냐고 반문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의 경험에 비춰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친구와 사업을 하기로 했다. 그 친구는 특목고-해외 유명대-통역장교를 거쳐 소위 업계에서 “천재”라고 불리는 이였고, 든든했다. 전편에서 다룬 나의 내적 불안과 외적인 불안을 모두 해결해줄 것만 같은 그런 존재였다. 계약서를 쓰기 여의치 않은 상황이였던 공직자 신분의 나는 일단 일을 돕고 추후에 전역하고 계약서를 쓰기로 동의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은 있었다. 우선 계약서를 쓰되 효력은 전역 이후로 시점을 잡는다던지 등...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알아서 할게”충이었고, 무엇보다 친구에 대한 믿음만으로 모든 것이 탄탄대로를 걷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안일하기 그지 없었다.


말.


이게 참 케바케인 문제라 선뜻 내 경험만으로 이야기하긴 어려운 부분이다. 다만, ‘이런 케이스도 있구나’라고 예비창업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대부분의 말 그리고 그 말을 뱉었던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억은 왜곡되고 변형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모든 것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나라고 예외도 아니고. 하지만 당시 대가리가 꽤나 커진 20대 후반의 난 ‘모든 상황을 내 통제 하에 진행하고 있다’라는 착각을 했다. 그리고 구두로 약속한 내용만 믿고 내 모든 것을 사업 준비와 초기 단계에 바쳤다.


굳이 한 마디 더 덧붙히자면, 대부분의 창업자들은 초기에 서면으로 무엇인가를 약속하기 굉장히 힘든 상황에 처한다. 자기가 처한 상황이 바뀌고 비지니스 모델만 해도 하루에 수십 번 바뀔 수 있으니까. 다 이해한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를 지키면 순간의 욕은 먹을지언정 상황을 최악으로 끌고 가지 않을 수 있다. 바로 내가 ‘왜’ 그리고 ‘어떻게’ 생각을 바꾸었는지 상대방에게 계속해서 전달하는 것. 여러가지 소음들로 인해 머리가 복잡하겠지만 이 꾸준한 소통과 극단적인 투명성이 없이는 초기 멤버들의 마음을 살 수 없다.


다시 나의 안타까운 스토리로 돌아가자면, 나를 포함한 4명의 공동대표로 이루어진 우리 사업은 여느 스타트업과 마찬가지로 모두의 피, 땀, 눈물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이 울어본 적도 없고, 자존감이 흔들려 본 적도 없는 시기이기도 했다. 어떤 가정을 세우고 이를 시행했을 때의 결과에 온전히 책임을 져야하는 일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총운영책임자(COO)이자 사업부의 헤드 역할을 맡은 나는 우리가 보유한 부동산을 기반으로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올인하였다.


우선, 코워킹과 코리빙의 핵심은 공실률이다. 하지만 이 공실률은 사업자의 측면에서 제한적으로 밖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같이 산다” 혹은 “같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일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이들이라면 시설이 살짝 부족하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러한 의지가 적지만 코워킹과 코리빙 자체가 신기해서 다가온 유저들이다. 이들은 빠르게 입주하고 빠르게 나가곤 하는데, 회전률이 높다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비용 역시 커짐을 뜻한다. 새로운 유저를 구하기 위해 들어가는 마케팅 비용부터 실제 그 공간을 치워야하는 노동 비용까지 이 모든 것은 스타트업에게 사치이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입주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실시하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같이 살고 싶은 인물상을 정하여 최대한 fit 중심으로 선발(?)했다.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는 공간의 유휴 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즉, 공용 공간에서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최대한 안 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fit을 중시하는 공실률 문제는 변수들이 많이 작용한다. 결과적으로 사람의 마음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변수가 적은 공간에서 여는 행사를 늘리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지금이었다면 코로나 때문에 완전 박살났겠지만... 행사 개최를 위해 수많은 국내외 업체들을 대상으로 밋업(meetup) 혹은 런칭파티 등의 수요를 파악하고 실제 행사를 타진했다. 사업 초기의 우리에겐 자금줄이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에 정말 신경을 많이 썼다.


기본적으로 코오롱 계열사와 손을 잡았지만 여전히 마스터 리스 형태의 건물을 한 번 더 서브리스하는 구조로 인해 고정비용 지출이 단위가 꽤나 컸다. 공실률을 줄이더라도 공실률이 0이지 않은 이상(현실적으로 불가하다) 공간사업을 통해 수익을 창출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수익을 창출하더라도 애초에 하드웨어 비용이 많다보니... 사업부 헤드로서 밑빠진 독에 물 붓는 느낌임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걸 어찌하랴... 해당 계약이 진행되던 당시에 나는 이중생활을 하다보니 크게 관여할 수 없었던 문제였다. 내 입장에선 그저 내가 해결해야 할 여러 과업 중 하나로만 여겨졌다. 겨우 한 달에 천이 좀 넘는 수익을 올리더라도 실질적인 이윤이 거의 없는 상황이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세월을 지나면서도 입주인들의 격려나 루프탑에 올라가 야경을 보다보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분명 사업 준비 당시 나에게 지분 5-10%와 “외국계 IB 혹은 컨설팅을 뺨치는” 월급을 약속했던 나의 친구는 말을 바꿨다. 전역 후 내가 계약서를 쓰자고 할 때마다 핑계거리를 찾아 들이밀거나 사업부 실적에 대한 비난을 해댔다. 그리곤 나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전체 회의에서 내비치는 발언을 통해 계약서 문제를 테이블 위에 올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문제는 나조차 이 가스라이팅에 가까운 화법과 전술에 넘어가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누구나 처음이기에 부족할 수 있지만, 당시의 나는 월 천 이상의 수익에도 불구하고 이윤이 적은 부담에 허덕대고 있어서 ‘처음이니까 괜찮아’라는 여유를 가질 수조차 없었다. 그러니 모든 것이 나의 부족함 때문이라 귀결지었다. 내가 좀 더 나아지면 지분을 주겠지. 내가 좀 더 나아지면 월급도 말한대로 주겠지. 내가 좀 더 나아지면...


내가 좀 더 나아지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계약서 작성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전역을 11월 말일에 했는데 2월이 되도록 계약서를 작성하지 못한 채... 일반 사원으로 등록되어 월급 200을 받는 무늬만 대표가 되어버렸다. 즉, 명함에는 공동대표이고 COO이지만 국세청에는 월급쟁이로 등록되어 있는 무늬만 대표. 나의 내적 불안감으로 뛰어들었던 이 세계는 점차 회색 빛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내가 꿈꿨던 석양 빛의 아름다운 미래는 당장 해결해야 할 일들에 묻혀버렸는지 색조차 찾을 수 없었고, 일이 끝나고 늦은 새벽 여자친구의 부재중 전화와 밀린 메세지를 보는 나에겐 사치가 되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지분 얘기를 꺼냈다. 초기 스타트업에서 월급이야 당연히 어느 정도 희생할 수 있다 생각했던 나는 적어도 약속받았던 지분은 챙기고 싶었다. 하지만 항상 우려하는 상황은 현실이 되는게 우리 인생 아닌가. 지분 5-10%를 얘기하던 그는 “내가 5-10이라 했었으니 5로 가자”로 말이 바뀌더니 어느 순간 “너한테 지분을 줘야할지 잘 모르겠어. Prove yourself.”라는 잔인함으로 바뀌었다. 친구에게 매일매일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이 자존심도 상하고 자존감도 많이 깎아내렸지만, 나는 ‘그럴 수 있지’라고 나를 다독이며 정말 개처럼 일했다.


그리고 이 회색지대로 내 주변의 인재들까지 많이 영입하였다. 수능만점이자 회계사 자격증까지 가진 S대를 나온 후배를 CFO로, 사업본부에는 K대 출신의 영어와 일어가 능통한 다른 후배를 데려왔다. 전역 후 외교관 준비를 한다던 친구마저 데려와서 같이 일을 하자며 우리 건물 2호점의 같은 방에서 살기 시작했다. 사실 이러한 영입과 개처럼 일하는 나의 모습에도 지분 얘기는 지지부진했다. 정말 황당하기 그지 없는 상황이었다.


천재라 생각했던 그는 점점 기획회의나 사업회의에서 황당한 소리들을 뱉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내가 데려온 이들이 반대하는 의견을 내면 나를 따로 불러내어 “회사 내에 너 라인 만드냐”며 힐난을 주었다. 당장 세금과 회계 처리를 하는 사람도 없었고, 사업본부도 일손이 부족했는데... 월급도 거의 받지 않고 정말 밤낮없이 일하는 이들을 “내 라인을 만드는 졸개들” 취급한 셈이니 울화통이 터졌다. 하지만 나도 너무나 유약한 존재라 때려친다고 말하지 못하고 계약서가 처리되면 괜찮다며 매일매일을 버텨냈다.


다른 공동대표들이라고 상황이 낫다고 하긴 애매했다. 그들은 이미 지분을 쥐고 있었지만, 나에게 나눠줄 지분 때문에 각자의 지분이 깎여나갈 위기에 처하자 내분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CEO인 나의 친구는 다른 공동대표들에게 왜 그들이 지분을 줄여야하는지 얘기를 하면서 다른 공동대표였던 형에게 그 형의 지분이 줄어야만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 논리에는 우스운 부분이 있는데, 나에게 지분을 줘야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고 그 형의 지분의 대부분을 본인에게 양도해야 한다 말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는 다른 공동대표들의 지분이 줄어야하는 로직마저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정말 물러설 곳과 나아갈 곳 모두가 사라진 회색지대에 서있는 무늬만 대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의 전우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총칼을 들이미는 상황이었고.


세상을 바꾸겠다.

삶의 형태는 변화가 필요하다.

이 모두 부질없는 거품에 불과했다. 현실은 더러운 지분 싸움의 구렁텅이가 아가리를 딱 벌린 채 우리를 기다렸으니까.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심지어 인턴생활에서도 배운 적 없는 이 모든 상황으로 인해 나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모든 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았고 그러면서도 속은 분노와 증오가 차올랐다. 한 달 가까운 시간동안 세상을 바꾸겠다던 이들은 서로에 대한 비난과 조롱을 일삼으며 마음에 회복할 수 없는 생채기를 남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 우리 회사에 관심이 많았던 벤처캐피탈들이 미팅을 요청해왔다. 투자에 앞서서 대표의 피칭을 듣고 서로 간의 fit을 맞추는 수차례의 미팅을 가지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CEO의 업무분장은 투자를 받아오는 것이라며 큰 소리를 떵떵 치던 그는 계속해서 투자 심사에서 미끄러지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쓰레빠를 신고 가지 말라고 해도 세상의 고정관념을 부숴야한다던 그의 호기로운 허세는... 오만하고 간절하지 않은 창업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우리를 비추어지게 했다. 하지만, 투자 관련 협의가 중단될 때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사업부가 넘버를 찍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잘못을 돌렸다.


고정비용으로 인해 부담은 매달 증가하는 가운데 투자마저 가망이 없어보이자 그는 사업의 방향을 틀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허황된 얘기들이다. 부동산의 젠트리피케이션과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을 해결할 문제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맞다. 사회적 문제임은 부인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가 학교를 만들고 사람들을 같이 살게하고 일하게 한다해서 투자를 받는다고? 사업본부 전원이 이를 반대했다. 시작한지 1년도 안 되어서 피봇을 하는 것도 불편했지만, 그 피봇하는 방향이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업부 헤드로서 그의 의견을 반대하는 나를 그는 매우 불편해했다. 매일 아침 열리는 회의는 고성과 서로에 대한 헐뜯음으로 가득찼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에 질려 회피해버리기 시작하였다. 그와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불편해지면서 나는 사무실이 아닌 우리 부동산 2호점 내 방을 사무실로 개조하여 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떨어져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단기적으로는 편했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으니 얼굴을 붉힐 일이 줄어드는건 당연지사였다. 다만, 대화가 단절되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관계는 둘째치고 사업체의 존망이 중요했던 나는 돈을 버는 곳에 온 힘을 쏟았고, 그는 신규 사업계획을 사업본부에 공유하지 않으면서 계속 구상을 이어갔다. 천재로 모두에게 추앙받던 그는 그 거품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까먹은 것만 같았다.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졌던 그는 아집을 부리는 땡깡쟁이가 되었고, 사람들에게 “너의 가치가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은 부품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업을 같이 하던 이들이더라도 그 부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면 갈아끼워야 한다면서... 그 것이 스티브 잡스 같은 리더들이 택한 방식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했다. 제대로 월급조차 받지 못하면서 일하던 이들의 입장에선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온갖 광기를 부려대던 그는 어느날 밤 내가 데려온 사업본부의 후배에게 그만두라는 말을 했다. 후배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며 크게 동요치 않았지만 나는 그 날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미안함과 함께 나의 팔다리를 잘라내는 건 결국 나도 잘라내겠다는 뜻으로 밖에 해석될 수 없었다.


계약서가 없는 구두로 약속된 지분은 허황된 약속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허황된 약속이 만든 거품의 바다에 빠져 내가 쏟은 시간은 비눗방울처럼 터지면 없어지는 부질없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회의실로 나를 부른 그는 자신이 열심히 구상하던 신사업 청사진을 보드에 그려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이 청사진에서 나한테 바라는 역할이 뭐야”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없어.


인간이 급작스럽게 화가 많이 나면 머리가 하얘진다고들 표현한다. 그리고 뭔가 머릿 속에 있는 줄이 팅하고 끊긴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나는 그 두 가지를 모두 한꺼번에 경험했다.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나의 시간이 너무 허망하여 눈물이 마구 용솟음쳤다. 그런 그에게 나는 이럴거면 뭐하러 설명했냐며 따지듯 물었고, 지금까지 일하면서 받지 못한 돈과 위로금을 퇴직금 명목으로 달라고 하였다. 어짜피 지분은 받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액수를 묻더니 그는 나에게 “야 그건 대기업 연봉이나 마찬가지야”라며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홍콩을 다녀온 나의 시점으로 시계를 돌려 당장 내 뺨다귀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말도 안되는 짓거리 하지말고 그냥 취준하라고. 약속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을 위로금으로 받았고 그마저도 선불로 일부만 받고 나머지는 기약없이 나중에 주겠다며 미루는 그에게... 돈이 나올 구멍이 없던 연약한 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그와 같이 있는 회의실의 공기마저도 나를 짓눌러 죽이려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도망쳤다.

뉴욕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