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 리볼빙이 되나요?
뉴욕으로의 도피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당장 생계수단에 대한 걱정도 산더미였지만 나에게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대한 분노가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있었다. 징징대고 싶진 않지만 정말 순간순간 화가 치밀었다 우울해지길 반복하던 일상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괴로웠던 부분은 ‘나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퇴직금(위로금)에 대한 칼자루마저 나에게 칼을 휘두른 이에게 있는 이 상황이 납득하기도 힘들었고 너무 부당하다 생각했다.
‘세상 일이 그런거지 뭐’ 혹은 ‘괜찮아질거야’라는 위로를 건네는 이들이 많았다. 사실 나의 고통은 나만이 이해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런 말들이 괜히 서운했다. 딱히 그들도 나에게 해줄 말이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나랑 가까운 이어도 같이 경험하지 않은 이상 정확히 그 감정을 공감해줄 수 없다. 엄마도 여자친구도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나의 글을 읽는 많은 이들도 내면의 상처로 인해 화병 비슷한 감정을 지금 이 순간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분노와 분노에 수반되는 모든게 우스워지는 아이러니함을 대부분이 공감하지 못함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붙잡고 하소연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나의 이 이야기가 그들에게 공감은 주지 못하더라도 위로라도 되었으면 한다.
고구마를 물 한 모금 없이 계속 입에 집어넣는 것 같은 내가 처한 상황은 나를 자기 비하, 자기 연민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렸다. 사실 진흙탕으로 A를 끌어내려 함께 뒹굴까란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공직자 신분이었던 이전의 상황이나 함께 회사를 나온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남의 일은 강 건너 불구경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구경거리를 굳이 주진 말자는 생각을 하며 참았다. 서른 살이란 나이에 아무런 대책 없이 사회로 튕겨 나온 나에게 놓인 선택지는 애매하게 붕떠버린 채로 하반기 공채를 준비하거나 사업을 준비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진흙탕에서 뒹굴어봐야 뭐가 나아지나 싶기도 했다. 혹시나 다시 창업을 하여 스타트업계에 남는다면 ‘공동 창업자와 법적 다툼이나 한 적 있는 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것이 싫은 마음도 컸다.
짧디 짧은 스타트업 라이프가 나에게 남긴 것은 값진 뼈아픈 경험, 사비를 털어가며 활동하여 남은 카드 리볼빙 금액이었다. 대표라는 직책으로 여러 컨퍼런스를 다니거나 대기업과 협상하며 느끼던 화려함과 거품이 쏙 빠져나가고 나니 대충 입이 심심해서 오래 물고 있던 츄파츕스 막대기 신세가 되었다. 피지컬이건 멘탈이건 고장 나서 손댈 곳이 너무 많아 일단 망가진 몸부터 회복하자는 생각에 한강을 뛰기 시작했다. 내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할수록 실소가 터져 나올 때가 많았다. 가만히 앉아있다가 열불이 올라서 가슴이 터질 것 같다가도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이러다 정신병 걸리는 건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을 했던 시기이다. 뛰다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느낌이 좋아서 그냥 밤에 한강을 따라 쭉 뛰곤 했다.
그러던 나에게 J가 전화가 왔다.
광성아 같이 한 번 일해볼래?
암호화폐 관련 공시체계를 만들며 이 쪽 바닥의 다트(주식 투자하는 사람이면 다들 알만한 공시 시스템)를 만들겠다던 J는 나와 H의 통역장교 선배이기도 했다. 유명한 대기업 계열사 중 하나의 대표이기도 했던 능력자인 그가 나를 선택해주다니... 선택지가 많지 않은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준 그가 감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게 옳은 선택일까를 계속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을 오래하기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많은 이들의 눈이 무서웠고, 함께하는 동생들과 나의 재정상태도 무서웠다. 카드값만이 아니라 인생도 계속 리볼빙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본능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건 그 고리를 끊어내긴 해야했으니까. 그래도 일말의 자존심이라도 챙기기 위해 나름의 연봉협상까지 하면서 본부장급의 나는 더 이상 연봉 인상이 안 된다하니 동생들이라도 더 챙겨달라 하며 우리는 동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강남 패스트파이브에 위치한 조촐한 사무실로 출근을 시작했다.
태스크포스 팀 성격을 가진 본부였지만 동시에 자회사이기도 했던 지금도 완전하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희한한 구조 속에서 근무하며 재밌는 경험을 많이 했다. 모스크바, 베를린 출장도 다녀오고, 약 4개월 간 월급을 받으면서 열심히 근무했다. 아직도 H와 나는 모스크바 출장 전에 2주 간 쪽잠을 자면서 발표 준비를 하던 그때를 회상하곤 한다. 돈 벌기 참 힘들었다고. 뭐 지금이라고 돈 버는 게 쉬워진 것은 아니다. 유튜브를 보면 쉽게 돈 버는 법이 피드에 자주 올라오는데 아마 나랑은 연이 닿지 않는 얘기인 것 같다.
그때의 4개월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항상 있지만 내가 그 구멍을 선택하진 못한다는 걸 또다시 뼈저리게 느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미래를 꿈꿔왔던 것은 아니었지만 숨 가쁘게 현실을 마주하면서 달렸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띵언을 안 좋은 쪽으로 몸소 실천하면서... 그래도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던 삶이었음에 안도하면서... 그렇게 인생을 리볼빙했다. 지금 당장 내가 뭘 해야할지 안 떠오르는 상태에서 재정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쿠션을 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으니 말이다.
모든 출장을 마무리 짓고 나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J는 자회사를 통해 신사업을 하길 희망했지만 모회사의 다른 임원들은 이를 반대하는 상황이었고, 얼떨결에 조인했던 나와 H는 그렇게 가시방석에 앉았다. 주식마저도 사실 모회사가 아닌 투자받을 추후 계획이 없는 자회사 분으로 준다는 걸 알게 되면서 더 이상 그 회사에 머물 이유가 희미해졌다. 그렇게 지분에 호되게 당하긴 했지만 분노는 했을지언정 계약서를 쓰자는 교훈 외에 자세하게 알지 못한 채 시간과 돈에 쫓겨 결정을 내린 말로랄까. 국내 경제신문사 한 곳과 컨설팅 회사와 손을 잡고 진행하는 블록체인 교육 사업을 진행하고 우리는 결별을 고하기로 나와 H는 결심했다. 끝을 알면서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정말 미친듯이 갈려 들어가던 우리 둘은 정말 한쌍의 걸레짝 같았다. 몸도 마음도.
뭘 잘 모르던 어렸을 적 남의 인생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고 제단 하던 내가 많이 생각나던 시기이기도 하다. 잘 나간다고 착각하던 내가 친한 형이 모 증권사 임원 얘기를 할 때 나도 모르게 “뭐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증권사인데 대단하다고”라 얘기했다가 혼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직도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우리 모두 다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음을. 그리고 그 스토리 뒤에 어떤 고통과 어떤 싸움이 있었는지 다 알 수는 없음을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 새겼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일이었을지 몰라도 나와 H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교육을 마무리하면서 J에게 이별을 고했다. 나름 깔끔하고 아름다운 이별이었다. 도움을 필요로 했던 시기에 손을 내밀어준 그는 대인배답게 앞으로의 우리의 갈 길에도 축복을 빌며 보내주었다. 그렇게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나와 H는 J에게 이별을 고했고, 그렇게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부랴부랴 세상 속에 다시 튀어나오면서 방구석에서 조그맣게 키워가던 우리의 사업에 대한 열망을 이제는 직접 테스트해보기로 결정했다. 이전 스타트업 사업본부에서 나와 손발을 맞추던 R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학생이자 개발자였던 M도 합류하면서 ‘패러데이’라는 사업체를 만들기로 했다. 우선 우리가 어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겠는 상황이었지만 why만큼은 모두가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아마 회색지대를 함께 헤쳐나가던 이들이었기에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사업 놀이에 불과할지 모를 이 여정을 나는 잘 시작했다고 믿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이별을 고하기 전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