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을 온전하게 대면할 수 있어야한다
뉴욕 출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비행기표도 호텔비도 모두 내 사비로 결제하였으니 굳이 여행으로 바꾼다해서 큰 문제는 없었다. 하나 문제를 꼽자면 출국 직전에 내가 더 이상 함께 하던 사업의 공동대표가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 정도? 취소하기에는 출국이 코 앞이고, 막상 출국을 해서 뉴욕을 가자니 이미 잡아놓은 클라이언트들과 무슨 얘기를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내가 마주하는 현실이 극도로 회피하고 싶었던 나는 홧김사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당황스러움에 그대로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군을 전역하고 외교 아카데미를 준비하겠다던 H를 사업으로 끌어들였는데 함께 쫓겨난 상황. 그리고 그 H는 나와 뉴욕으로 함께 향했다. 같은 본부 출신인 우리가 출장을 같이 간 적은 없었기에 나름의 의미부여도 되긴했다. 그와 함께 도착한 뉴욕은 내가 느끼는 괴로움과 무관하게 여전히 복작복작하니 세상은 잘 굴러감을 보여주었다. 누구나 그렇듯 나의 슬픔과 괴로움을 세상이 알아주길 원하지만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듯 잘 굴러가니까.
우리는 브로드웨이 쪽에 위치한 Knickerbocker 호텔에 방을 잡고 뉴욕의 거리를 여기저기 누볐다. 나의 멘탈이 쿠크다스마냥 바스락거리는데 H가 없었다면 참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처한 이 어수선한 상황 속에 누군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미안했다. 나를 믿고 사업체에 조인해줬던 이들. 나의 동기, 나의 후배들.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전 여친은 그들도 모두 어른이고 성인이기에 선택을 한 것이고, 그 선택을 내가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젠 내가 해보고 싶던 사업도 해봤으니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자고도 덧붙혔다. 그녀가 결혼을 원하는걸 알았고 우리가 4년 가까이 만난 시점이었기에 충분히 그 마음을 이해했다. 물론 그런 생각을 안했던 건 아니다. 대기업이건 외국계이건 아니면 전문대학원을 다시 준비하건... 다 가능한 나이이고 서른이란 나이의 초입에 다시 시작해도 늦진 않았을테니까.
그래도 미안했다. 나를 믿고 함께 해주기로 한 이들을 내팽겨치고 나 살자고 떠나는 것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일어서기 버거워지면 그 상황 자체를 회피하고 싶은 본능이 꿈틀댔지만 이번에 도망치면 난 평생 도망만 칠 것 같았다. 적당히 열심히 살고, 대충 꿀 빨고 상황이 어려워지면 도망치는 삶을 살려고 이렇게 열심히 버둥대며 살아왔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글로 써놓고보니 굉장히 결의에 찬 결정 같아보이지만 실상은 그냥 브라이언트 파크 옆에 위치한 블루보틀에서 카푸치노 먹다가 가진 즉흥적인 생각에 불과하다.나는 뉴욕에서 상처가 아물 때까지 기다리고, 다시 한 번 기회를 물색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불편한 진실을 대면해야만 했다. 내가 사업을 하기엔 준비가 전혀 안 되어있었고, 기본조차 모르면서 붉은 색을 보면 날뛰는 황소처럼 닥치는대로 눈 앞의 일만 해왔다는 사실을. 난 완전 뉴비 창업가에 불과하고 그 전에 내가 이루었다고 착각한 것은 사실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씁쓸하긴 했지만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은 편해졌다.
우선 잡혀져 있던 미팅들은 모두 진행하되 상황을 설명하는 이메일을 클라이언트들에게 송부했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더 이상 기존 사업의 일부가 아니라 jobless가 되었고, 새로운 기회를 물색하고 싶은데 혹시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 뭐 이런 청승맞은... 예상 밖으로 대부분의 이들은 매우 호의적이었고 심지어 클라이언트사 중 한 곳의 CEO인 Will은 브루클린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뉴욕에서 더 묵어야하면 자신의 집에 머물러도 된다면서 친절을 베풀었다. 그가 한국에 왔을 때 내가 수행을 했던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정말 감사했다. 실제로 출장기간보다 더 오래 머무르고 싶었지만 호텔비가 만만치 않았던 나와 H는 덕분에 각기 찢어져 나는 그 CEO의 집에서, H는 H의 친구인 디자이너 G의 집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미국 대학 동기들과도 연락을 하였다. 마침 매번 DC 출장 때마다 만나던 Gus가 뉴욕에 형인 Patrick 그리고 예비형수(지금 둘은 행복한 부부이다)와 함께 머물고 있다며 반갑게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만난 Gus는 여전히 핵인싸 모습 그대로였다. 멕시코 혼혈인 그는 DC에서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하버드 MBA에 합격하여 나름 행복한 퇴사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뉴욕대에서 콜롬비아 대학교까지 걸으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묵혀둔 썰들을 풀고 있었다. DC에서 자유시간에 같이 놀던 얘기도 하고...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는 내가 늘어놓는 뉴욕에서 할 수 있을 법한 사업 얘기를 정말 귀기울여 들어주었다.
한국에서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나의 고리타분한 이 이야기들을 그 누구보다 귀기울여 들어주면서 계속 의견을 개진하고 피드백을 주면서 우리는 그 수많은 avenue와 st들을 지났다. 잠깐 보드게임을 파는 가게에 들려 Catan이라는 게임을 사서 Patrick의 집으로 향했고, 우리는 늦은 저녁까지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대학시절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보드게임을 하는 동안은 정말 행복했다. 사실 그 문 밖을 나가 나 혼자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 얼마나 괴로움이 가득할지 알면서도 그냥 모른체 할 수 있어서.
그렇게 며칠 간 뉴욕에서 한국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척 열심히 돌아다녔다. 브루클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점은 우습게도 베네수엘라 음식인 아레파를 파는 White Maize라는 곳이었다. Will의 사무실에서 이전 사업 계정의 이메일 정리(대부분 이제 더 이상 내가 업무를 맡지 않으니 나 대신 다른 이에게 인수인계하는 작업)와 앞으로 뭘 해서 먹고사나를 고민할 때, Will의 회사에서 일하는 한국인 개발자가 추천해준 이 식당은 정말 끝내줬다. 한국에 돌아가면 베네수엘라 음식점을 할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뭐 여전히 언젠가 내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집 앞에 아레파를 파는 가게를 내고 매일 아점을 먹고 싶긴 하다. 어쨌든 그렇게 브루클린에서 업무를 보고 점심을 먹고나면 맨해튼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맨해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최대한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가 어떤 사업이 유망한지 점지해줄 것이라 믿으며 흡수하려 했다. 그리고 Will이 추천해준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떤 사업을 했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한 방향타를 같이 잡아보고자 노력했다.
영화를 보면 막 갑작스레 영감을 얻고, 부단한 노력을 한 주인공이 아팠던 과거를 훨씬 크게 뛰어넘는 성공을 하곤 하던데... 아니면 뭔가 엄청난 귀인을 만나서 대단한 성공을 이루던가... 어째 나는 그런 신통방통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았다. 많은 귀인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렇게 대단한 성공을 눈앞에 두고 귀국할 수 있을 그런 느낌은 없었다. 그저 그 바쁨 속에 머리만 더 복잡해져서 돌아다니다 벤치에 앉길 수십 번 반복했다.
H는 여전히 나와 인생을 같이 걸어가고 있다. 오늘 글을 쓰기 전 그와 통화하면서 “야 나 우리 뉴욕 처음 같이 갔을 때 얘기 글로 쓰려고”라 했을 때 그는 웃으면서 “하 우리 눈물의 x꼬쇼 하던 그 뉴욕?”이라 했다. 이 글에는 차마 너무 지겹고 재미없어 담을 수 없는 눈물의 x꼬쇼의 시간이 그렇게 후딱 지나갔다. 어느 정도 쓸 수 있는 돈도 바닥났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당시 내가 했던 고민은 크게 두 가지였다. 뭐라도 해볼까? 근데 그 뭐라도 하면... 돈은 벌 수 있을까?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냥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올까? 아니지... 여자친구랑 결혼은 어떡하고... 뭐 이런류의 부질없는 남들이 생각하기엔 배부른 고민을 해대며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 머리 속의 나는 왕의 귀환을 하는 주인공이어야 하는데. 현실의 나는 그저 상처투성이에 너덜대는 멘탈을 간신히 부여잡은 가엾은 서른살 백수였다.
한국에 돌아오자 구멍 난 배 땜질이 떨어져나간 것마냥 현실이 들이닥쳤다. 엄마는 걱정이 앞서서 “이제 어떡할래”, “엄마 속 좀 그만 썩이고 취직해라”를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여자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걱정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친한 고등학교 친구들과 파놓은 단톡방에서도 걱정이 쏟아졌다. 그리고 처음에 내가 지분을 구두로 약속 받았다고 했을 때 정말 자기 일마냥 난리치면서 확실하게 너의 손에 들어온 것이 아니면 너 것이 아니라던 한 스타트업의 CEO인 형도 괜찮냐며 다독여줬다.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나의 마음 속에 증오를 풀어줄만큼 A를 욕해주었다. 참 잘 살았구나 싶었던 순간이었다. 적어도 내 편이 이 정도 있다는 뜻이니까.
동시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위한 걱정도, 나를 위해 누군가를 욕해주는 이들도 모두 내 편임은 분명했지만. 정말 지독히도 외로웠다. 그리고 막막했다.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매일 밤 한강을 뛰기 시작했다.
여느 날처럼 잠실대교를 찍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려던 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