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wangsungaa Nov 17. 2020

그렇게 난 우리 생일에 헤어졌다

사실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이 망설였다. 막상 나의 2, 30대 이야기를 써내려가면서 이 부분을 다룰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빈 문서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꽤나 많은 이들이 나의 글을 기다려주는 것 같아서(실제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락이 오시니 그렇다고 가정해본다) 글을 쓰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도 했지만, 이 이야기는 유난히 손에 잡히지 않았다. 최근 술기운이 약간 오른 친한 동생이 "오빠 약점 잡히기 딱 좋잖아. 걱정된다고. 오빠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연애를 했고, 그 이후 감정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고... 사실 이거 다 약점이 될 수 있어."라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한 말들도 계속 글을 쓰려는 날 멈춰세웠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지우기를 일주일 정도 반복한 것 같다.


우선, 이 글은 절대 나의 이별에 대해 징징거리면서 위로를 구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님을 밝힌다. 그저 내 소소한 인생사에서 굵직했던 순간 중 하나를 나 자신이 객관화하고 싶어 쓴 글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완벽한 남자친구가 절대 아니다. 부족한 면도 많았고 이전 글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열등감과 이를 감추려는 방어기제인 우월감이 묘하게 섞인 혼종이다. 상식적이지 않은 결정을 내리거나 거짓말을 한 적도 많은 그런 사람이었다. 종종 나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적도 많았으니까.


이 정도의 고지사항을 감안하고 이 글을 읽어주십사 부탁드린다.




J와의 동행을 멈추기로 했을 때, 나는 서른의 늦여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A) 새로운 창업

B) 하반기 공채 준비


그리고 나는 A를 골라 선택을 했다. 문제는 이 결심을 하기에 앞서 나에게 중요한 존재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내가 깜빡한 것이다. 핑계를 굳이 대자면 너무나 급박한 시기였고, 누군가를 설득할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절차를 깜빡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엄마가 노발대발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삶을 꾸려가는거냐는 질책도 이해가 되었고, 왜 나에게 상의 한 번 없이 결정했냐고 울면서 화를 내는 여자친구의 마음도 알 수 있었다. 결혼 생각은 있는게 맞냐고 화를 내던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적어도 마음속으로는 그 한탄 섞인 원망들을 다 이해했지만, 쥐꼬리만한 자존심에 괜히 내가 도리어 화를 내기도 했다. 아직도 후회하는 나의 모습들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난 그저 내게 처한 많은 도전 과제들을 회피한 것에 불과하다.


왜 이해해주지 못하냐고 화낼 줄은 알았지만 그들을 정말 이해시키려고 혹은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을까? 모든 결정에는 대가가 따르는데 적어도 이 대가를 함께 맞이하는 이들에게 내가 무엇을, 왜, 어떻게 하려는지 정도는 알려줬어야 했다.


나는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에 매우 미숙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을 유려하게 잘하거나 특정 안건에 대한 설득은 그 누구보다 자신 있다. 그러나 안건이 나에 관한 것이면 유독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한다. 유난히 나에 대해 얘기할 때 약해지는 것은 아마 내면의 유약한 나를 자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비겁하게 나는 결정을 먼저 내리고 follow my choice를 외친 것이다.


설득이 어려우니까 무서워서.


당연히 엄마 입장에선 절 나가서 떠돌던 중생(모태 크리스챤이니 양 떼를 떠난 어린 양이라 해야 하나)이 이제는 돌아올 것이라 믿었는데 뒤통수를 치고 절에 불을 지른 셈이었다. 한양을 떠들썩하게 할 것이라는 사주를 지니고 태어난 아이는 나이 서른이 되어 집안 식탁만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잘난 척은 온갖 부리던 유아독존 남자친구는 독선적이고 아집을 부리는 철딱서니 없는 아이로 보였을 것이다. 아마 그녀도 내가 데일만큼 데었으니 이제 남들처럼 취직하고 결혼을 준비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몰랐다. 나의 "방황"이 계속되리라곤.


내가 군대를 간 세월을 기다려준 그녀가 임용고시를 패스할 때까지 기다렸다(기다렸다는 표현이 알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 웃긴 에피소드를 풀자면 그녀가 임용고시를 시작하기로 마음먹곤 나에게 이별을 고했었다. 아직도 그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대뜸 파스타를 먹다가 그녀는 헤어지자고 했다. 아무 문제없이 꽃길만 걸을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싶어서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녀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나는 그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미트볼 파스타를 한 움큼 입에 넣고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녀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이들이 모여있는 카페 글을 보면 임용 도중에 이별을 겪어서 방황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연애하는 상태로 시작하지 말라는 학원 선생님들의 조언에 대해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래도 나름 재수까지 해본 경험이 있는 나는 일단 상황은 이해했다. 전혀 헤어질 이유가 없었던지라 심정적으로는 당황스러웠지만. 한참을 울던 그녀를 안심시키고 나머지 파스타를 먹어치우려는 찰나 그녀는 나에게 계약서를 쓰자고 했다. 적어도 자기가 임용을 패스하기 전까지는 절대 헤어지지 않기로.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원생 둘이 서로 약속한 거랑 비슷한 것 같다. 모래성을 같이 쌓던 여자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더니 나랑 결혼할 거라고 약속해달라고. 그리고 남자아이는 우는 여자아이를 달래기 위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너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는... 뭐 그런?


시간이 흘러 그녀는 임용을 원샷원킬로 합격했다. 그리고 난 우리 부모님이 결혼한 나이에 내 인생에 나타난 그녀와 군을 전역하면 결혼하겠거니 안일하게 생각했다.


내가 주인공으로 열연하는 내 삶이라는 영화는 스타트업이라는 장치를 씬에 넣었다. 그리고 하필 그 씬에서 주인공인 나는 보기 좋게 허우적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헬렐레거리는 남자아이였고, 모래성을 쌓던 여자아이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속만 썩이는 존재가 되었다. 이 남자아이는 지금 상태로 결혼하면 평범한 삶(적어도 그 남자아이에겐 끔찍한 삶)을 살아갈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더 크게 "성공"하고 결혼하고 싶어 했다. 반면, 여자아이는 평범한 삶, 평범한 가정, 남들처럼(요즘 이혼율을 보면 꼭 해당되는 말은 아니지만) 오순도순 잘 살길 원했다.


그렇게 이상향이 너무나도 다른 그 둘은 티격태격 대면서도 나름 잘 버텨왔다. 잘 버텨주던 그녀가 이제는 남들처럼 나도 취업을 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것이라 믿게 된 그 타이밍에 나는 창업을 하겠다며 튀어나와 비수를 꽂은 셈이다.


어엿한 2년 차 선생님인 그녀는 단순한 여자친구라기보다 가장 친한 친구에 가까웠다. 나는 그녀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이 좋았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요즘 아이들에 대해 같이 씹어주기도 하고. 학교 분위기나 동료 선생님들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밌었다. 하지만 난 내 얘기를 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들어주는 것에 더 집중했던 것 같다. 굳이 나의 치부를, 나의 힘듦을 얘기하고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겉에서 보기엔 완벽하길 원했고 나는 아무 걱정 없이 사는 그런 존재처럼 보이길 원했다. 그만큼 나는 이기적이었다.


다시 창업하기로 결심하고 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막하던 당시 나는 일단 미국 펀드 중 한 곳을 클라이언트로 우여곡절 끝에 잡아 번역과 마케팅 에이전시 역할을 해주며 돈을 벌게 되었다. 그들이 한국을 방문하기로 결정하면서 내 넓지도 않은 인맥을 최대한 태우면서 그들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의 모든 신경은 어떻게 돈을 벌 것이며, 그 돈으로 나와 함께하는 인원들이 최소한 월급이라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지에 온통 쏠려 있었다.


자연스레 나는 나와 원래 가까웠던 존재들에게 소홀해졌다. 뻔한 레퍼토리지만 항상 곁에 있을 줄 알았으니까.


기념일도 어영부영 넘겼다. 더 솔직하게 얘기하면 기념일을 챙길 돈이 없었다. 당장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따박따박 받던 그 200만원이. 장교일 때는 하는 일에 비해 턱없이 적다며 그렇게 툴툴대던 그 돈이. 너무 아쉬웠다.


먼 훗날 큰 성공을 상상하며 으리으리한 집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배우고 싶어도 알지 못해서 배우지 못한 것이나 돈이 많이 들어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나의 아이가 마음 놓고 배우고 살아가는 그런 삶을 꿈꿨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비겁해졌다. 그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일에 더 몰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힘든 여정을 옆에서 같이 해줄 사람들에게 설득을 더 했어야 한다. 그리고 더 신경 썼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핑곗거리를 찾았다. 이래서 바쁘고, 저래서 바쁘고. 이래서 빠듯하고, 저래서 빠듯하고. 내 현재 상태에 대해서 솔직하게 얘기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핑계로 모두 숨겼다.


나의 치부를 드러낼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사소한 이유로 우리는 우리의 생일에 헤어졌다.


같은 날 태어났다는 사실이 운명이라 여겨졌던 한 쌍은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만났다가 식사를 하면서 시작된 싸움의 불길을 잡지 못하고 지나온 세월을 몽땅 태워버렸다. 아직도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했던 하루였다. 식사를 하면서 싸움을 시작했지만, 싸우면서 그리고 울면서 같이 편집샵을 들려서 옷을 둘러보기도 하고... 너무나 뻔해져버린 그리고 지루해진 데이트를 중도에 마무리 지으면서 우리는 서서히 헤어졌다.


계속해서 우는 그녀를 처음으로 내가 붙잡지 않았다. 여러 차례 이별의 위기가 있었지만 그녀를 붙잡곤 했던 나는 지쳤다는 핑계로 내 자아를 다독이며 그만하자고 다짐했다. "가장 친한 친구를 잃게 되었네. 잘 가."라고 말하고 안아준 뒤, 나는 그렇게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정처 없이 걸었다. 원래 그녀와 가기로 했던 와인바는 오픈이  멀었고,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서 아무 생각 없이 이태원의 한 골목을 끼고 계속 돌고 돌았다. 그리고 그 와인바 앞 벤치에 앉아 몇 시간을 멍 때리다 들어가 늦은 밤까지 술을 들이켰다.


비겁한 나를 만나기엔 그것보단 행복할 자격을 충분히 갖춘 그 아이가 내 곁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되새기면서.


많이들 물어봤던 것 같다.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헬렐레거리던 내가 마음 다잡고 꽤 오래 만난 연인이기도 하고, 내 나름의 노력을 많이 기울였던 관계였으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말없이 토닥여주는 부류, 오히려 잘되었다며 화내주는 부류, 눈 동그랗게 뜨고 도대체 왜 그랬냐며 나에게 질책을 하던 부류. 이렇게 나뉘었던 것 같다. 뭐 관심없는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공통적인 "왜"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사실 매번 이유를 다르게 둘러댔다. 결혼에 대한 시각이 차이가 있어서. 성격이 차이가 나서. 뭐가 차이가 나서... 헤어진 그 날이건, 후폭풍을 맞이한 내가 매달리던 때이건 그녀 역시 "우린 너무 달라"라고 얘기했었으니까. "차이"라는 말은 사실 정말 대기 좋은 핑계였던 것 같다. 그 차이가 매력이어서 끌렸던 남녀가 차이로 인해서 헤어진 것이 우습기도 하고.


나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빛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외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빛을 이룬다는 나의 이름처럼, 빛을 이루고 싶었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남들에게도. 큰 소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의 난 누군가에게 쉼터가 되어줄만큼 성장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게 괴로웠다. 그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해서 나는 관계를 유지할 노력의 끈을 놓고는 우리의 차이를 핑계로 댔다.


이미 너무나 많은 세월이 지났고, 중간에 여러 해프닝을 겪으면서 이제는 추억의 한편이 되어버린 기억이지만 여전히 이를 글로 털어놓는 것은 무겁다.


차이점만큼이나 공통점도 많았다. 같은 날 태어난 둘은 간절함의 무게도 같았다. 원하는 목표가 달랐을 뿐. 그녀는 간절하게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그녀가 맞선을 보면 1등 신붓감이라며 놀리곤 했었다. 그리고 교육을 통해 사람을 바꾸는 것은 현재의 사회 체계에서는 불가능하다며 깎아내리곤 했다. 내가 지금 이 시점에 와서 후회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녀의 꿈을 더 적극적으로 응원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교육이 사람을 바꿀 수 있고, 선한 영향력을 통해 세상이 바꾸겠다는 그 순수함을 있는 그대로 응원해줄걸.


나는 내가 빛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하는 것이 어려웠다. 평범하게 살면서 남을 위하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과 자신이 빛나고 그걸 밑바탕으로 소나무처럼 남들에게 그늘을 제공하겠다는 삶은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생각은 그렇게 가지고 있지만, 빛도 나지 않고 아직 큰 소나무도 되지 못한 내가 버틸 수 있는 무게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원하던 평범함조차 무거운 짐이 돼버릴 줄이야.


오랜 세월이 지나 우리의 생일에 나는 많은 고민 끝에 카톡을 남겼다.

"생일 축하해"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 너도 생일 축하해 행복한 8월의 마지막 날 보내길 바라"


앞으로의 나는 평범함이라도 짊어질 수 있는 강한 어깨를 가질 수 있길 기도한다.


안녕.

이전 14화 돌려막기 인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