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좋아 4차 산업혁명이지. 우리 다 x 된거임. ㄹㅇ...
서른. 우린 나이가 30이 되면 뭔가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변할 것이라는 아무 근거 없는 상상을 하곤 한다. 이러한 상상의 원천은 단순한 개인의 호기심 혹은 이상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 구성원 전체가 함께 형성한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프레임이 투영되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적합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한국 사회는 20대를 미성숙하고 이런저런 선택지를 살펴보는 시기로 그리고 30대는 그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해서 밀고 나가면서 가정도 이루고... 그렇게 사회구성원의 한 명으로 남는 것이 바로 삶의 정답이라는 암묵적인 규칙을 정해 놓았다. 하나 특이한 점은 개인마다 고를 선택지 중 "올바른"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정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면 특정 직업군들 중 하나를 택해야하고 가정을 이뤄야 정상적인 사람답게 살고 있다는 시각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있다.
개인이 모여 그룹이 되고, 그 그룹이 모여 사회가 된다. 그리고 이 사회는 개인 간, 그룹 내 그리고 그룹 간 존재하던 암묵적 규칙들이 집대성되는 곳이다. 이러한 암묵적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괴짜 혹은 부적응자가 된다. 어렸을 때 머리를 샛노랑으로 염색하고 피어싱을 여러군데 뚫은 형이나 누나가 지나가면 부모님께서 "넌 저렇게 정신머리 없이 크면 안 된다"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을 들어본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암묵적 규칙의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타겟이 되는 그 사람의 진짜 실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유교의 나라, 동방예의지국 조선에서 저렇게 '정신 빠진' 모습을 하면 암묵적 규칙상 '제대로 성장한 아이'의 상을 깨는 것이니까.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기에 형벌이 뒤따르진 않지만 사회로부터 은연 중 배척을 당하게 만드는 것. 바로 이를 암묵적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평상시에도 이러한 프레임을 목도하면 trust assumption 이라는 단어로 이를 묘사한다. 은연 중 혹은 대놓고 많은 이들이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암묵적인 룰을 총체적으로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암묵적 규칙은 괴짜 혹은 부적응자의 숫자가 많아져서 기존의 인식을 뒤집거나 제3의 힘(스마트폰 같은 disruptive tech)에 의해 기존 규칙이 더 이상 적용불가한 경우에만 새로운 암묵적 규칙으로 대체된다.
다만, 이 암묵적 합의로 지탱되던 바람직한 20대의 삶 혹은 30대의 삶이라 여겨지던 모습이 점차 붕괴되고 있다. 문제는 이 붕괴되는 '바람직한 청춘의 모습'에 맞춰서 살기 위해 숨가쁘게 뛰어온 청춘들이 이미 꽤나 많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믿던 trust assumption이 무너짐을 이 시대의 청춘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고, 이는 여러가지 사회적 현상으로 표출되어왔다.
일례로 수년전 비트코인의 광풍 시대를 기억하는가? 당시 대학 혹은 대학원에 다니던 내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도서관에서 노트북이나 핸드폰으로 시세를 보는 이들이 90%가 넘었다고 한다. 대학가에서 3명 이상이 모이면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에 대해서 얘기할 정도로 엄청난 광풍이 불었고, 이는 대학가를 넘어 사회 전체로 빠르게 퍼졌다. '올바른 선택지'를 골라서 '바람직'하게 살더라도 어짜피 서울에 집 한 채를 가지기 어렵다는 현실은 ‘재산이란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서 모으는 것이다’라는 암묵적 규칙을 묵살시키고 대다수가 이 광풍에 올라타게 만들었다. 모두가 당시 광풍을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여겼고, 글로벌 시장에서 자산 가격이 빠지는 시기보다 조금 앞서 별 생각없이 강경 대응하는 정부 정책으로 인해 가격이 휘청이자 “계층을 올라갈 마지막 사다리를 차버렸다”는 글들이 청와대 민원마당을 가득 채웠었다. 성실하게 '올바른'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는 규칙은 지금 이 시간에도 점점 더 빠르게 금이 가고 있다.
사실상 평생을 이 사회의 trust assumption인 '바람직'한 삶(문돌이 기준)의 모습을 성실하게 팔로우하던 내가 나이 서른을 앞두고 창업을 한다는게 무슨 의미인지 되짚어보자. 대원외고 - 미국 유학 - 통역장교 이렇게 이어지는 나의 코스는 당연히 취업으로 이어져야 한다. 대부분 대기업, 컨설팅, IB로 이어지는 트랙을 타야하며, 2-3년 간의 근무 후 다시 해외 대학원 진학(대부분의 경우 MBA 혹은 로스쿨)을 하거나 동종 업계에서의 이동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러나 이 시리즈에서 쭉 볼 수 있는 내가 지금까지 내려온 선택은 모두 물심양면 평생을 날 지원해준 부모님이나 옆에서 나와 미래를 같이 그리던 이들에겐 청천벽락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학원 혹은 과외를 하는 것이 싫어 땡깡을 부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반항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길을 계속 걸으려는 이유는 부모님 세대가 겪어온 세상과 내가 살아갈 세상 간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확산 속도가 빨라졌다’라는 말만으로는 형언하기 힘들다. 미국 벤처캐피털 중 3대장으로 꼽히는 a16z 사에서 “Why software is eating the world”라는 글을 통해 주장한 바처럼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잡아먹고 있다. 또한, 스타트업으로 시작한 테크 기업들이 기존 제조업 중심 산업체들을 모두 제끼고 사상 최고의 기업 가치를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기업들이 내놓는 제품들은 단순히 소비하고 소진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없으면 일상에 뭔가 큰일이 날 것처럼 느껴진다. 핸드폰을 하루만 집에 놓고 오거나 잃어버린채 살아보면 무슨 말인지 피부에 확 와닿을 것이다. 사실상 디지털과 현실이 하나로 합쳐진 현재와 이러한 통합이 더 가속화 그리고 심화될 미래는 새로운 경제 생태계(인플루언서와 같이 새로운 형태의 먹고사는 방법 등을 포함)로 이어지고 있다. 스타트업들이 기존에 존재하던 큰 덩어리의 컨셉을 해체시키고 하나의 세그먼트를 파고들어가서 스케일업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이 차츰차츰 변하고 있다.
이제는 서점에서 너무나 흔해진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이 거대한 변화는 사실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90년대 말부터 슬슬 시동이 걸린 인터넷의 시대가 이제 진정한 꽃을 피우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앨빈 토플러와 같은 저명한 미래학자가 3차 산업혁명(정보화 혁명)을 통해 인터넷의 시대를 규정하려 했지만, 기타 1차(농업) 혹은 2차 산업혁명과 다르게 새로운 산업혁명은 너무나도 빠르게 진화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4차 혁명이 3차 혁명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점은 우리가 알던 세상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리고 있다. 그런 4차 산업혁명을 우리는 단순히 AI, 핀테크, 블록체인, 자율주행 등의 키워드로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영역은 해체되고 재조립되고 있다. 아주 쉬운 예로 핀테크 혹은 테크핀이라 불리는 영역을 보자. 4차 산업혁명의 키워드로 불리는 기술 중 한 개 혹은 여러개를 이용하여 금융이라는 큰 덩어리를 우선 잘게 나누어 그 중 한 영역을 파고 들어간다. 토스를 생각해보자. 모바일 환경에서 쉽게 돈을 주고 받는 단순 송금 앱으로 시작한 토스는 현재 증권사로까지 발돋움하였다. 오랜 세월 쌓여왔던 금융이라는 큰 덩어리의 컨셉을 분해하여 송금에 포커스를 맞춰 성장하더니 큰 금융의 그림을 재조립하고 있다.
달라도 너무 달라진 세상에서 이전까지 먹혔던 성공 방정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달콤한 과실(안정된 연봉)에 취하여 현실에 안주하지 말자는 선택을 했다. 물론 이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온전하게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이 틀릴 수도 있다.(물론 그 선택조차 못할 수도 있다. 그러한 연봉을 주는 이들의 간택을 못 받을 수도 있으니까.)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1) 내가 가진 사업 역량이 부족해서
- 기존에 가진 리소스가 부족하다 (자본 측면)
- 경험이 부족하여 좌충우돌할 가능성이 높다
2) 유망한 분야를 파악하기 힘들어서
- 이미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혁신”하기 위해 뛰어들고 있는만큼 유망한 분야를 찾기가 힘들다
- 유망한 분야를 파악하더라도 경쟁 우위가 부족하다 (난 천재 프로그래머가 아니니까)
3) 중도에 포기할 수 있어서
- 내가 현재 하는 시도들을 단순한 일탈로 받아들이는 이들의 회유에 지쳐서 중도에 포기할 수 있다
- 달콤한 과실이라 부른 안정된 연봉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 사회가 정해놓은 바람직한 서른살 이후의 삶의 궤도에서 점차 멀어지는 것이 두렵다
가장 큰 이유는 나 자신이 갖고 있는 두려움이다. 뒤쳐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어쨌건 선택은 내려졌다. 누가 뭐라한들 내 인생은 내 것 아닌가?라고 호기롭게 생각하면 큰 코 다친다
태어나서 쭉 살아오던 세상과 완전히 달라진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해도 나를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문돌이로 자라온 내가 갑자기 천재 프로그래머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건 단순히 내가 서른이 넘어서가 아니라 한국 교육 시스템을 충실히 따라오고 사회가 정한 체계를 쭉 따라왔기에 갖게 되는 당연한 부산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인 입장일 것이다. 즉, 과거의 선택 그리고 성취들이 어쨌건 나의 현재를 완성하기에 이 모든 족쇄를 벗어던지면서 ‘내 인생은 내 것이니 미래도 내 마음대로 그려가겠다’는 것은 객기에 불과하다. ‘내 마음대로’라는 부분은 특히나 불가능한 부분이다. 가족의 서포트를 대부분 받는 우리나라의 특성상 경제적으로도 일정 부분 얽히게 되기에 더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새로운 세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내 과거의 조각들을 재조합해야 한다. 마치 새로운 스타트업을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재조합을 위해서는 우선 내가 지향하는 가치들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고 그 중 내가 뿌듯함을 느낀 경험들을 모두 끄집어내고 그 경험의 공통점을 추출해야 할 것이다. 나의 경우 가치 우선순위는 1) exile from ordinary; 2) give first; 3) take it slow 로 정리가 되었다. 우선순위 뿐만 아니라 리스트 자체도 변할 수 있겠지만 일단 이 가치들에 내 삶의 궤도를 맞추고자 한다.
1. Exile from Ordinary
“평범하게” 혹은 “남들처럼”이라는 프레임 속에 나를 다시 넣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그 평범함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을까? 꽤나 오랫동안 거부감은 가졌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해보지 못했던 나는 이 질문 앞에 숨이 턱 막혔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이 깊지 못하고 뭔가 사고가 터지면 이를 대처하면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고민의 시발점은 전여친과 헤어지면서 시작되었다. 평범함이 싫다고 말은 할 줄 알았지만 how에 대한 답변은 속시원하게 나오지 않았다.
고민 끝에 내가 도출한 exile from ordinary라는 가치를 위해서는 세가지 선행조건이 필요하다.
a) 삶이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는 믿음
흔히들 도시는 삭막한 곳으로 많은 이들이 그린다. 실제로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은 서울이 매우 삭막한 곳이라고 한다. 서울에선 눈 뜨고 코 베일 수 있다는 말이 꽤나 오랫동안 내려온 것은 바로 이러한 시각에 대한 반증이다. 나 역시 미국으로 갔을 때 뉴욕이란 도시에서 느낀 감정은 삭막함이었다. 많은 이들은 문명이 더 발전할수록 도시의 삭막함은 더욱 당연해질 것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말한다. “유리하게” 산다는 마인드는 우리의 삶에 트레이드 오프trade off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즉, 내가 무엇을 얻으면 대신 무언갈 잃어야 한다는 마음. 더 나아가서는 내가 돈을 벌면 누군가는 잃어야한다는 마인드이다. 이 기저에는 경쟁심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시각이 틀렸다기 보다는 exile from ordinary 즉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위해서는 그 프레임 자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가진 스킬들을 다듬는다고 해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똑같다면 나는 절대 내가 만들어놓은 세상을 탈출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b) 변화에 대비하여 끊임없이 탐구하여야 한다
다가오는 세상의 변화는 천편일률적으로 기술의 진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진보가 바꾸어놓는 개인의 불규칙적인 행동패턴, 사회의 인식 변화, 신규 제도의 등장 등은 소위 전문가라 불리며 하나의 영역을 정말 잘 알고 있다해도 모두 소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탐구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나는 티스토리를 만들고 매일 스타트업 파운더로서 그리고 이 시대로 밀려드는 변화의 파도에 몸을 맡긴 한 명으로서 매일 내가 탐구하는 내용을 정리하여 올리고자 한다. 모든 탐구의 시작은 호기심에서 시작하니 현재의 일상에 대해 호기심 가득한 눈을 가지려 노력할 것이다. “왜”라는 질문에서 “어떻게”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이 되어 남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길 기도해본다.
c) 혼자서 모든 것을 잘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버리자
태생이 외동인지라 나는 삶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이나 짐을 다 내가 껴안아버리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혼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음을 어필하면서 자라온 유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러한 성향은 어른이 되어가는 나에게 큰 약점이 되어가고 있다. 나의 번아웃의 원천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내가 잘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걸 “혼자” 그리고 “잘”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 어짜피 무엇인가 인류가 마주하는 문제점(크건 작건)을 식별하여 이를 해결하는 창업자의 삶을 살기로 한 이상 나의 한계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 이외의 다른 problem solver들에게 어떻게 위임할 수 있는지 배워야한다. 또한, 어느 순간에는 그들의 잠재력을 보고 투자할 수도 있는 능력을 갖춰야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나는 1) 투자할 수 있는 자원을 축적해야 하고, 2) 잠재력을 가진 이들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을 키워야한다. 경영, 경제, 시사, 철학, 예술 등 다방면에 대한 공부가 필요함은 물론이고, 위임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가장 빠른 길은 세상을 나보다 더 많이 살거나 더 치열하게 고민해 본 스승들을 찾아 이들을 쉐도잉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각 분야별 나의 guru를 찾아내고 공부하는 삶을 살면서 항상 겸허한 자세를 가지려 노력할 것이다.
누군가와 경쟁해야만 하는 패러다임 속에서 온힘을 다해 살던 내가 바뀌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접근법도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유하고 나누는 것을 체화시켜야 한다.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나를 보면 DNA가 아예 배타적이진 않다고 가정하고 최대한 먼저 남에게 공유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내가 빌 게이츠처럼 돈이 많아 재단을 세워 온갖 연구를 지원하고 인류에게 나눔을 할 수는 없다는 현실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내 상태에서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나보다 더 뛰어나고 경험이 많으신 분들이 이미 많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아래와 같은 분야에 대한 나눔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아마 꾸준히 계속할 수 있다면 나도 점차 더 나아지지 않을까?)
a) 스타트업 경험:
짧지만 연쇄 창업을 해오면서 겪게 된 좌충우돌 스토리를 통한 팁과 스타트업에 대한 내가 공부한 자료 공유
b) 영어 재능나눔:
사실 이 나눔에는 두 가지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하나는 언어라는 장벽으로 인해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상황을 조금이나마 완화하는데 기여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늘어난 모바일 보급률이나 기술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양극화의 심화로 인해 사교육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이들에게 희망을 조금이나마 보태고 싶은 것이다.
c) 스토리 나눔:
다방면으로 부족한 나. 정말 올라운더 부족함을 뽐내는 내가 넘어지지 않게 도와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자신들의 회색지대를 꿋꿋하게 걸어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인터뷰를 하고 정리하여 공유함으로써 자신만의 회색지대를 걸어가는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
느긋함을 배우고자 한다. 내 삶의 급격한 변곡점 대부분은 급작스럽게 내린 나의 결정에 딸려온 1+1 상품이었다. 이를 모두 겪으면서 나는 결정에 앞서 나에게 더 많은 시간을 주기로 했다. 기본적으로 이를 위해서는 차분한 시선을 탑재해야 한다. 다만, 태생이 워낙 급하고(누군가는 열정적이라고 좋게 봐주기도 한다) 경쟁에 특화된 삶을 살았다보니 이는 쉽지 않은 과제이다. 현재 내가 이 가치를 향유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2가지가 있다. 우선, 아침마다 따뜻한 차 혹은 물을 마신다. 부암동에서 친구들과 함께 사는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자연의 소리가 나를 반긴다. 나는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끌여 차를 한 잔 타서 밖에 나가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그리고 매일 명상을 30분씩 한다. 명상이라 해서 뭐 대단한 것은 아니다. 10분씩 3번에 나눠서 명상을 하곤 한다.
무소유를 위해서 명상을 한다기보다 나는 풀소유를 위해서 명상을 한다. 좀 웃기게 들릴 수 있지만 나를 비워내기 위해 명상을 하기보다는 내가 처한 상황 혹은 내가 느끼는 감정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연습이다. 명상 앱(Headspace)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조용한 음악을 틀어놓기도 한다. 주로 잔잔한 멜로딕 테크노나 ASMR용 자연의 소리를 사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잠이 들기 전에 10분 간 내 숨소리에만 집중하는 명상을 하는데 수면의 질을 크게 향상시켜 느긋하면서도 여유를 가지고 하루를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원래는 이별 후의 상해로 도망간 나에 대해 쓰려다 주제를 바꾸어 그래서 어떻게 살려고 발버둥치는지에 대해 거창하게 늘어놓게 되었다. 쭉 다시 훑다보니 선언문처럼 되어버린 내 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나는 이러한 가치들을 “추구”하겠지만 절대 완벽하게 이를 모두 실현하지는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순간의 화에 휩쓸리거나 두려움에 집어삼켜져 내가 선택한 길을 걸어가면서 수도 없이 휘둘릴 것이다. 비겁하게 포기를 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완벽하진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온전하지는 못할지언정 끊임없이 나는 이렇게 나의 회색지대를 걸어가고자 한다. 발버둥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