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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angsungaa Nov 02. 2020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

정말?

어렸을 때부터 난 평범함이란 단어를 너무 싫어했다. 아마 그 단어에 알레르기 같은 반응을 했던 이유는 내가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다 운이 좋게 좋은 학교를 가고, 유학 생활까지 하게 된 나는 주변이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누구누구의 아들이자 딸이고 용돈을 얼마 받았고 뭐를 선물로 받았고... 노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어도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은 대단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비슷한 수준”에 올라서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겨난다는 대단한 망상에 빠졌다.


실상의 난 열심히라도 살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거저 주어지지 않는 삶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우연과 내 망상이 어느 정도 일치되면서 나는 내가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착각과 현실에 괴리가 올 때마다 나는 ‘더 열심히 살지 않아서 그래’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그러나 그 열과 성의를 다하는 내 마음의 중심에는 내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난 절대 ‘그들’과 같은 수준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란 내면의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와 어떻게 엮인 이들이건 내가 뒤쳐지면 날 잊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함이 있었다. 그리고 이 마음속의 불안함은 나를 허기지게 했고, 열등감의 폭발은 누군가를 깔아뭉갬으로 나를 높이 세우는 형태로 발현되었다.


그런 내가 입시에 실패하고 군대로 도망쳐왔다. 그래서 군대에서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다. 가끔씩 선배나 후배들은 “뭘 그렇게 열심히 해요? 이거 그냥 의무복무인데...”라고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물어보곤 했다. “그냥~”이라 얼버무리고 화제를 항상 바꾼 나였지만, 마음 한켠에는 이렇게라도 특별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중요한 통역이나 주요 인물 통역이 육군에게 잘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딛고 내가 해낸다면 나는 역시 평범하지 않다는 이론을 성립시켜줄 것만 같았다.


안타깝게도 나의 이러한 오류투성이 이론은 적어도 표면적으론 내 망상을 계속 현실로 만들어주었다. 전략본부에서 통역을 하면서 모든 굵직한 협상엔 다 들어가다 보니 정상회담에도 가고 군을 전역하기 전에는 합참의장 통역으로 커리어를 마무리하기도 했다. 실질적으로 육군 통역장교 중 합참의장 통역을 한 이가 겨우 한 명 있었나(전설처럼 들려오는 이야기였다 당시만 해도) 했으니... 나는 내가 그 전설로 남아 누군가에게 닮고 싶은 사람으로 남을 것이라 믿었다.


나는 특별해야만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취약했다.

내가 특별하다고 봐주는 이들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취약점을 가진 오류투성이 인간이었다.


그런 나에게 “4차 산업혁명”이란 단어는 가슴을 뛰게 하는 단어였다. 미국 전략사에서 열리는 미래 전략 심포지엄을 갈 때마다 패널들이 이야기하는 4차 산업혁명이 인류에 가져다 줄 변화들은 전역 후 나의 지향점 같았다. 나처럼 ‘특별한’ 이들이 새로운 물결의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였다. 특히, 이 착각은 집안 상황이 안 좋아질수록 더 심각해졌는데... 난 영화처럼 무엇인가 이 새로운 산업이 도래하는 시대에 무언가 변화를 일으키고 그 변화를 통해 엄청난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쥘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런 나에게 그가 전화를 했다.


“광성아 홍콩에서 컨퍼런스 있다는데 한 번 같이 가볼래?”


집안이 힘들어졌을 무렵 나에게 비트코인의 존재를 알려줬던 그는 나에게 홍콩에서 블록체인 관련 컨퍼런스가 열리니 같이 가보자고 했다. 나를 선발했을 때부터 어학원에서 교육을 하던 와중에도 항상 나에게 ‘넌 뭔가 특별해’, ‘세상을 바꿀 눈을 가졌다’ 등의 나의 취약점만 골라 패던 이가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니 어찌 No라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콜을 외치고, 해외 휴가 신청을 턱 하니 냈다.


대부분의 기술 기반 산업이 그러하듯 초창기에는 정말 dog나 cow나 몰려들기 마련이다. 나 같은 착각쟁이들과 허풍쟁이들도 거품처럼 가득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도착한 홍콩의 컨퍼런스에서 난 모든 이들이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신기하기만 했다. 나름 전역 후 해당 산업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그와 동행하다 보니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렇게 난 또 내가 특별하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컨퍼런스가 끝나면 여러 애프터 파티를 찾아다니며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뽕 맞았다”는 표현이 딱 맞게 정말 들떠있었다. 그리고 마치 이 산업이 나에게 운명처럼 다가와주었다고 착각했다. 뭐 쥐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나에게 그는 전역을 하면 같이 일해보자고 했다. 홍콩의 밤거리에서 세상을 바꿔보자는 그의 말이 그렇게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수 없었다.


그 착각 덕분에 나는 전역 후 취업준비가 아닌 스타트업의 길로 뛰어들게 된다.

진정한 회색지대로 아무 안전장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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