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 VS 잘하는 일, 어떤 삶을 살고 싶나요?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할까?
아니면 잘하는 일을 해야 할까?
사는 동안 벗어날 수 없는 인생 최대의 난제 중 하나.
성공을 전파하는 전문가들조차 답이 엇갈리는 이 질문에 과연 명쾌한 해답이 있긴 한 걸까.
‘좋아하는 일이 잘하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봤을 마음의 소리.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해 텁텁한 마음을 애써 집어삼킨다.
하지만 반대편의 누군가는 말한다.
'좋아하는 일? 모르겠는데...
잘하는 일? 도 딱히 없는 것 같은데...
난 뭘 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내가 잘하는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거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진짜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잘하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살아가니까. 그저 그 나이 때에 맞춰 시대가 요구하는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을 뿐. 마음이 동하는 버킷리스트를 실현하며 꿈을 펼치는 대신 투두리스트에 갇혀 산다. 감히 그 체크박스를 벗어날 용기조차 내지 못한 채.
이게 모두가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현대인의 현주소다.
마음은 당연히 좋아하는 일 쪽에 가 있지만 보편적인 선택은 언제나 잘하는 일 쪽으로 기울어진다. 왜냐하면 잘하는 일은 익숙하고, 안전하며, 인정받기 쉽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잘한다'는 건 이미 평균 이상의 검증된 탁월함이 있다는 뜻이다. 성과와 성장의 정도 역시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실현된다. 즉, 모두가 인정하는 평탄하고 안전이 보장된 길 위에서 누가 봐도 꽤 그럴싸한 괜찮은 선택으로 뽐낼 수 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은 상황이 다르다. "좋아하는 일=잘하는 일"이 아니라면 미래는 불투명하다. 성장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서툴고, 성과는 더디다. 심지어 남들 눈에는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다 결국 타인의 시선과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타협한다. 좋아하는 건 그냥 취미로 아껴두기로.
인생의 중대한 선택 앞에서 우리는 기대와 설렘보단 불안과 자기 의심에 휩싸인다.
'사실 난 실력이랄 게 아무것도 없는데, 다 들통나면 어쩌지?'
'괜히 이제 와서 좋아하는 일 하려다가 한순간에 쌓아온 모든 게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지?'
여기엔 두 가지 함정이 숨어 있다.
하나는, 나 자신에 대한 편견 —“나는 아직 부족하다”는 자기 검열과 의심.
다른 하나는, 세상이 정한 오만 —“이 정도 능력은 되어야 원하는 것을 하며 살 수 있다”는 타인의 기준.
그 오만과 편견 사이에서 오늘치 우리의 행복은 또다시 내일로 미뤄진다. 아무도 나를 묶어두지 않았는데, 나는 스스로 ‘내가 되겠어’라며 한계의 테두리 안에 나를 꽁꽁 가두면서.
심리학자 아들러는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인생관과 행동의 패턴, 곧 삶의 양식(Lifestyle, Lebensstil)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삶의 양식을 바꾸면 행복해질 거라는 걸 알지만 불확실한 행복에 도박을 할 순 없어. 원래 이렇게 살아왔고, 불행하더라도 익숙하고 안전한 틀 안에 있고 싶은 걸. 바꾸기엔 이미 늦었어.'
낡고 익숙한 삶의 양식에 갇힌 우리는 스스로 만든 감옥 안에서 행복의 기회를 미룬다. 결국 안전한 길, 즉 잘하거나 해야 하는 일만 반복하는 삶에 갇히고 만다. 성장은 멈추는 것을 물론 내 삶의 주도권도 서서히 사라진다.
그리고 그 방황의 중심엔 타인의 시선과 열등감 사이에서 단단히 묶여 있는 자아가 있다. 타인의 시선과 열등감 사이에서 단단히 묶여 '나는 아직 한참 부족하다'라고 밖에 느끼지 못하는 자기부정의 상태. 좋아하는 일을 택하는 게 어쩐지 분에 넘치는 사치처럼 느껴진다. '하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도 사회적 조건이나 효율로 증명해야만 정당해 보인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너무 많은 것에 조건을 붙이고 그 조건에 따라 필터링되는 삶에 익숙해져 버린 탓일까. 무엇을 하든 기회를 얻는 출발선에 서는 것조차 공평하지 않았던 경쟁에서 살아남은 우리는 내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에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며 방황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에도 일종의 자격이 주어진다고 믿는 것 같다. 학창 시절엔 성적순으로, 사회에선 성과순으로.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건 자격 조건에 통과한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순전히 나만의 관심과 재미로 시작되고, 열망으로 지속되는 것이니까. 요컨대 내가 무엇을, 왜 원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되묻는 일이고, 그것을 향해 누가 뭐래도 굳건히 나아갈 수 있도록 나를 끊임없이 다잡으며 살아가는 일이다.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제 나이에 너무 늦었어요.”
“그럴 여유가 없어요.”
모두들 입버릇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없는 이유를 경쟁적으로 늘어놓기 바쁘다. 하지만 이 모든 말의 참뜻은 사실 이렇게 번역된다.
행복할 용기가 없어요.
아들러는 삶의 의미가 고정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는 신의 소명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삶의 양식은 타고난 운명이 아니다. 언제든 다시 짜 맞출 수 있는 패턴일 뿐.
결국 좋아하는 일을 잘하기 위해 필요한 건 사회가 정한 자격이 아니라 내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용기다.
안전한 삶의 틀을 스스로 깨부수고 벗어날 수 있는,
내 안의 익숙한 패턴을 뒤흔드는 새로운 시도를 허락하는,
아무도 걸은 적 없는 눈 밭으로 기꺼이 뛰어들어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안전한 불행대신 불안한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어느 쪽이 내 삶을 더 의미 있게 할까?
사실 정답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각자의 삶의 양식이 다른데 누군가가 성공한 삶을 살았다 한들 그게 내 인생의 정답이 될 순 없다. 심지어 한 사람의 인생 안에서도 오늘은 정답이라 생각했던 나의 결정이 내일은 아닐 수 있는 게 바로 인생이니까.
한 가지 분명한 건 인생은 결코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물론 원한다면 인생의 모든 위험한 변수를 제거하고 정말 뻔-하디 뻔한 검증된 길만 골라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정답지에 연연하며 흘려보내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삶도 아닌데.
지금의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불편하고 불안하더라도 살면서 행복의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고 싶다면 필요한 건 딱 하나다. 스스로 행복해질 용기.
치밀한 계획표 속에 나를 가두고 해야 하는 일로 나를 갈아 세상에 증명하려기 보단,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끈질기게 파고파고 또 파며 인생의 흐름에 나를 맡길 용기를 내보면 어떨까.
남들보다 돈을 조금 못 벌면 어떠리.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또 어떠리.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매일 아침 눈치도 없이 뜨는 둥근 해를 욕하며 칼퇴를 염원하는 데 인생을 바치는 대신, 내가 하고 있는 게 일인지 놀이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하루하루에 온전히 몰입할 수만 있다면.
좋아하는 일은 자연스레 잘하는 일이 되고, 그렇게 채워진 행복의 날들이 모여 마침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마법 같은 인생이 될 테니까.
P.S. 덧붙이는 말
학부 시절 매주 전공 세미나에서 토론하던 때였다. “좋아하는 일 vs 잘하는 일”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스무 살 초반 그 시절 나는 당연히 잘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업무 효율이 떨어지니까. 물론 좋아하는 일을 잘하면 금상첨화겠지만 일로 엮이는 순간 응당 따라오는 스트레스가 두려웠다. 좋아하는 일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해칠까 봐 그 마음만큼은 다치지 않게 보호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지금 다시 그 토론을 한다면 내 대답은 무조건 좋아하는 일쪽이다. 살면서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을 만난다는 건 기적이고, 그 기적 같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테니. 어쩌면 모든 게 남의 것처럼 느껴지는 이 사회에서, 적어도 내 인생만큼은 내가 주인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남들 보기에 별로이면 좀 어떠랴. 지금 조금 덜 잘하고 서툴면 어떠리. 좋아하는 일하면서 살 수 있는 천국이 눈앞에 있는데, 단지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한평생을 싫어하는 일 하면서 나를 생지옥으로 몰아넣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뻔한 말은 싫어하지만 이 시리즈의 시작으로 이보다 찰떡인 주제는 없을 것 같았다. 유례없는 혼란과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좋아하는 것을 잘하고 싶어서 열심히 배우려는 그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설령 그것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 일일지라도.
추가 덧, 행복할 용기가 필요한 분들을 위한.zip.
삶의 양식과 우리가 왜 불행하는 쪽을 선택하는지 궁금하다면 알프레드 아들러 <삶의 의미>와 <미움받을 용기>를 함께 읽어보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그리고 무려 80세에 코딩을 시작한 마사코 할머니 이야기도 익숙한 삶의 패턴을 벗어나고 싶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 분들께 또 다른 울림이 될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