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불가능한 '나'만의 자기 계발법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국어 공부, 특히 영어는 자기 계발에서 빠지지 않는 항목이자, 한국인의 새해 목표에 단골 메뉴 중 하나였다. 사실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관광업으로 먹고사는 나라도 아니고, 다문화 가정이나 국제 학교에 다니지 않는 한 일상에서 외국어로 말할 일도 거의 없다. 유럽처럼 국경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북쪽은 군사 경계선에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사실상 ‘섬나라’에 가까운 환경. 그런데도 아이들은 아직 한글도 떼기 전에 영어 유치원에 다니고 조기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수상할 만큼 많은 시간과 비용을 쏟아붓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이제 다 큰 성인이 외국어를 공부한다고 하면 이런 반응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뭐 하러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
“이젠 웬만한 건 AI가 다 해주잖아.”
“앱만 깔면 다 되는데 시간 낭비 아냐?”
이런 말들엔 두 겹의 믿음이 깔려 있는 듯하다. 하나는 언어 또한 일종의 기술이고, 기술은 결국 AI로 대체되어 그간 우리를 가로막은 모든 언어 장벽을 허물어 줄 것이라는 낙관적인 오만. 다른 하나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내세워 AI가 인간의 언어를 학습하고 창조하는 시대에 외국어 공부는 더 이상 효용성이 없다는 단념적인 편견.
맞는 말이다. AI는 분명 빠르고 똑똑하며 유용하다. 특히 번역과 통역의 효율성은 이미 인간을 넘어선 분야도 많다. 하지만 외국어 전공자로서 나는 늘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이런 생각들이 어딘지 너무 쉽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나날이 발전하는 AI 발전 속도에 압도되어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나에게 외국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내 인생을 바꾼 구원투수였으니까.
AI는 낯선 말의 의미를 전달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 세계와 존재의 범위까지 확장시켜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외국어를 모르는 자는
자신의 모국어도 알지 못한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Wer fremde Sprachen nicht kennt,
weiß nichts von seiner eigenen.)
우리는 종종 외국어를 단지 '소통을 위한 기술'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외국어 학습은 애초에 효율의 문제로 간단히 귀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외국어는 나를 낯설게 바라보고 결국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사고의 확장 장치'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도 말했다.
"언어의 한계는 곧 내 세계의 한계다."
인간의 사고는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 언어는 한 나라의 정체성이자 문화이며, 곧 사회다.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건 또 하나의 세계를 얻는 일이다. 그 사실을 나는 독일어를 배우면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험난하고도 치열했던 20대의 여정 끝에, 나는 비로소 '독일어'라는 자아를 얻었다. 아주 값비싼 시간을 들여야 했지만 결론은 분명했다.
“외국어야말로 내 존재를 확장하는 가장 인간적이고 나다운 방식이다.”
AI는 나를 대신해 정보를 요약하고 말하고 글을 써줄 수 있다. 하지만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순 없다. 사는 동안 내 언어의 한계로 인해 겪었던 수많은 오해, 머릿속이 너무 시끄러워 시뮬레이션만 수만 번을 돌리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던 머뭇거림, 나조차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몰라 차마 뱉어내지 못하고 삼킬 수밖에 없었던 침묵과 정적, 그 모든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 삶의 자산이 되었고, 내 사고의 근간으로 자리 잡아 결국 내 세계를 확장해 주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느새 삶의 모든 것을 '효율'로 치환하는 데 익숙해진 나머지 내 사유 방식과 정체성까지도 기술에 맡기려 들고 있는 건 아닐까?
독일어를 배우기 전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기분이 들었다. 책에서 한 구절만 구간 반복 재생해서 읽고 있는 기분. 쳇바퀴에 갇혀 매일 같은 생각만 무한 반복되는 기분.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아무리 자극을 줘도 영감은커녕 흐릿한 아이디어 한 줄기조차 떠오르지 않아 사는 게 답답했다. 마치 생각이 그대로 멈춘 것 같았다. 무엇을 해도 도돌이표가 되는 저주에 걸린 것처럼.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지금 내 사고방식이 너무 익숙해서 새로운 가능성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건 아닐까? 그래서 언어를 바꿔보기로 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달라졌다.
물론 그 과정은 영겁 같이 오래고 고단했다. 비전공자도 다 아는 '구텐탁(Guten Tag)'도 몰랐던 내가 독일어로 통번역을 하기까지, 요즘 같으면 프롬프트 한 줄이면 끝날 일들을 나는 만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고군분투해야 했다.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외운 100개의 단어는 다음 날이면 대부분 마법처럼 사라졌다. 독일어가 조금씩 읽히기 시작하던 2학년 봄, 처음 번역 수업을 준비하던 날엔 고작 어린이 동화 한 문단을 예습하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호기롭게 교환학생으로 독일 땅을 밟던 3학년의 첫날, 찐 현지인의 대화 속도를 듣고 생각했다. '래퍼구나.' 그제야 교수님들이 그동안 얼마나 답답하셨을지 그 천사 같은 인내심에 감탄도 잠시 한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웃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도 돌아와선 어느 정도 듣고, 읽고, 쓰고, 말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통역 부스 안에서 빨간 불빛이 켜지는 순간 손끝이 떨렸고 말문이 막혔다. 몇 날 며칠을 붙잡고도 도무지 칸트를 이해할 수 없어 원망하던 4학년 1학기. 어느 날 교수님이 툭 던진 말 한마디가 실마리가 되어 마침내 깨달았을 때 나도 모르게 뺨으로 눈물이 떨어졌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그 모든 좌절과 삽질의 시간 덕분에 나는 누구도 대신 말해줄 수 없는, 나만의 언어로 내 세계를 넓혀갈 수 있었다. 말하자면 내게 외국어를 배우는 건 결국 의사소통을 위한 스킬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내 안의 낯선 자아와 끝없이 대화하며 ‘나’를 재설계하는 작업이었다. 언어 하나를 배운다는 건 세상을 해석하는 또 하나의 관점을 갖게 되는 일이자, 더 나아가 ‘내가 누구인가’를 더 다층적으로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같은 언어를 쓰고 있을 지라도 똑같은 생각을 하진 않는다. 그래서 내겐 언어를 바꾸는 건, 곧 다른 세계의 입장에서 나를 다시 바라보는 훈련과도 같았다.
그 훈련을 통해 나는 점점 더 유연한 사람으로 성장해 갔다. 끔찍한 혼종이 아니라 아주 알록달록 다채로운 유연함. 그건 AI는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살아 있는 사고의 흔적이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동안 끊임없이 실수와 좌절을 반복하며 견뎌낸 나와의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규정했던 안전한 생각의 틀을 하나씩 깨뜨렸다. 그리고 낯선 세계와의 마주침 속에서 전혀 다른 타인과 연결되며 ‘나 자신’을 다시 새롭게 만들어왔다.
특이하게도 나는 영어가 아닌 독일어를 배우면서 처음으로 내 안의 ‘낯선 나’와 마주했다. 한국어를 쓰던 나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내 모습. 실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낯선 사람과도 쉽게 어울리고, 행동이 생각보다 앞서는 나. 생소했지만 그건 분명 나였다.
“언어가 바뀌면 자아도 바뀐다”
한국어로는 생각만 하다 한 세월을 보내는 겁쟁이에 이불 밖이 제일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집순이가 영어로는 할리우드 스타처럼 과감한 행동파가 되는가 하면 독일어로는 파티 한가운데를 휘젓고 다니는 사교적인 사람으로 변한다. 사회적 가면이나 연기 같은 게 아니다. 언어가 바뀌면서 마치 내 프라임 세포가 바뀌는 기분이랄까. 한국어라는 틀에 갇혀 미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내 안의 가능성들이 외국어를 통해 튀어나왔다. 언어가 나를 다른 방식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6개월, 나는 단어보다 먼저 침묵을 배웠다. 모국어에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자기 의심과 낯섦, 말이 막히는 순간의 무력감, 그리고 결국 말하지 못한 채 삼켜버린 감정들.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고 싶었는지를 처음 돌아봤다. 낯선 언어는 내가 평생 쓰던 자아의 껍데기를 걷어내고 그 안의 맨 얼굴을 마주하게 했다. 내 안에 있던 누군가가 언어라는 통로를 통해 조금씩 드러났다. 그렇게 내 안의 자아들이 말문을 열기 시작하며 비로소 나는 낯설지만 매일매일 더 단단해진 나로 살아갈 수 있었다.
요컨대 외국어를 배운다는 건 단지 단어를 외우고 문법 체계를 익히는 일이 아니다. 익숙한 나의 사고 습관을 해체하고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다. 나뿐만 아니라 외국어를 n개 이상 구사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시간을 느끼는 방식, 공간을 인지하는 방식, 책임을 해석하는 방식조차 언어 구조에 따라 달라진다고. 왜냐하면 언어는 표현의 도구이기 이전에 인식과 기억, 감각을 설계하는 틀로서 내가 누구인지 결정짓고 내 세계의 형태를 만드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떤 언어로 살아가는지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지를 결정짓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로 우리는 모든 것이 AI로 대체 가능해질지도 모르는 시대의 변곡점에 와 있다. 하지만 AI에게 내 삶의 방식과 정체성까지 고쳐달라 할 순 없지 않은가. 그래도 우린 인간이고 이건 내 삶이니까. 만약 누군가 "매일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이 세상에서 ‘대체 불가능한 나’를 만드는 가장 인간적인 방법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난 망설임 없이 대답할 것이다. 외국어로 사유하며 나를 새롭게 쓰는 일이라고.
누군가에게 내 능력치를 숫자로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국어라는 통로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지 모를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일. 그렇게 달라진 나를 앞세워 내 세계를 조금씩 확장해 가는 일. 어쩌면 이게 바로 내가 선택한 이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 아닐까.
누구나 대체될 수 있는 시대라고들 말한다. 하지지만 나는 믿는다. 낯선 언어와 인고의 시간을 통해 새롭게 쓰인 ‘나만의 세계’는 결코 누구에게도 쉽게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 삶이 따분하고 언어를 바꿔보라. 그러면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와 만나지 못했던 또 다른 '나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은 지금,
어떤 언어로 생각하고 있나요?”
P.S. 덧붙이는 말.
외국어 공부라고 하면 흔히들 영어, 중국어, 일본어 같은 메이저 언어를 떠올린다. 어릴 때부터 언어를
좋아해서 영어는 물론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까지 다양한 언어를 찍먹 해보았다. 하지만 내 머리를 띵하게 울리고, 나를 근본부터 흔들어 깨운 언어는 다름 아닌 독일어였다. 나는 지금도 독일어를 전공한 일을 내 인생에서 일어난 운명 같은 우연 중 가장 뜻깊은 일로 꼽는다. 왜냐하면 그 전후로 내 삶의 곡선이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나의 청량했던 학부 시절은 참 행복했고, 동시에 고통스러웠다—진짜 나를 마주하는 일은 기존의 나를 내 손으로 깨부수고 볼품없고 나약한 모습까지도 나로 받아들여야만 가능한 일이었으니. 기회가 된다면 그때의 불안하고 매 순간 흔들리던 이야기 역시 에세이로 풀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사실 독일어를 배운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거였다.
“그걸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
그땐 나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어설프게나마 그 질문에 나만의 답을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언어는 어딘가에 ‘써먹는’ 소모품이 아니라 내 세계를 확장시키는, 곧 ‘나 자신’ 그 자체라는 걸.
추가 덧, 이 글의 비하인드
사실 이 글의 시작은 전공 통역 실습수업 시간에 처음 들었던 괴테의 말 때문이었다.
외국어를 모르는 자는 자신의 모국어도 알지 못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Wer fremde Sprachen nicht kennt, weiß nichts von seiner eigenen.
중간고사 문제였는지 아님 실전처럼 했던 통역 연습의 일환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한 건 당시 제대로 통역한 사람이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외국어 전공자라면, 모국어 이외에 하나의 언어를 통달하기 위해 인생에서 한 번쯤 온 정신을 쏟아봤던 사람이라면 공감할 문장. 그때부터 언어는 내게 곧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자, 알을 깨고 또 다른 세상으로 나가게 하는 특별한 통로였다. 그 깨달음은 가슴속에 아로새겨졌고, 나의 세계가 흔들릴 때마다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이 문장만큼은 독일어 원문을 덧붙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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