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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SNS?!

한병철 <서사의 위기> 디지털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는 법

by 그웬

언제부터였을까. 손바닥만 한 기계들에게 내 삶을 위탁하게 된 게. 너무도 당연하게 현대인의 하루는 현실이 아닌 가상의 디지털 세상에서 시작된다.


오늘도 눈을 뜨자마자 확인하는 지구 반대편 소식,

자는 동안 남들이 부지런히 올린 스토리,

간밤에 새로 생겨난 SNS 유행,

사실 별 것 없는 이런저런 해프닝들,

결국 다 남의 이야기.


사실 몰라도 아무렇지 않았을 불필요한 정보들을 채워 넣느라 아침부터 밤까지 뇌는 도무지 쉴 틈이 없다.

'이대로 살다가는 정말 머리가 텅 빈 도파민의 노예가 될 것만 같아.'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디지털 디톡스가 하나의 의식처럼 번진다. 그리고 그 유행을 증명이라도 하듯 <도파민 디톡스>, <도둑맞은 집중력>, <경험의 멸종> 같은 책들이 당당히 베스트셀러를 점령한다. 우리는 저자들의 말대로 잠시라도 화면에서 도망쳐보겠다며 결심한다. 마치 그 결심만으로 곧바로 잃어버린 나를 다시 되찾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하지만 하루의 끝을 떠올려보자. 불 꺼진 방 안, 유일하게 살아 있는 건 작은 사각형의 빛. 그 빛을 이불속으로 끌어안고 손가락은 정신없이 화면을 스크롤한다. 인스타 스토리를 넘기고 숏츠를 돌리며, 고단했던 하루를 아무 의미 없는 웃음으로 봉합한다. 의미 없는 무한 스크롤은 이제 그만 끊고 싶다 말하면서도 정작 그 화면 속에서만 하루를 닫을 수 있다니. 어쩌다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내가 사라져 버린 걸까.






찰나의 소통을 위한 끝없는 연결


SNS(소셜 미디어)가 대체 뭐길래. 어느 순간 SNS가 실제 만남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스토리텔링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SNS는 언제 어디서나 전 세계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다며 사람들을 가상의 디지털 광장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기다렸던 것처럼 사람들은 상품 카탈로그를 전시하듯 자신의 스토리를 끊임없이 공유하고, 보란 듯이 진열된 타인의 스토리에 반사적으로 '좋아요' 버튼을 누른다.


이 가상공간에서 좋아요와 팔로우는 친밀함의 잔여물처럼 반짝인다. 분 단위로 증식하는 인스턴트 메시지, 이모티콘과 유행어가 점령한 댓글창, 이름 모를 이들의 좋아요와 팔로워는 경쟁하듯 늘어난다. 하지만 그 열띤 반응 속에서 정작 진심을 동하게 하는 진정한 대화와 감정의 온기는 점점 사라져 간다.


언뜻 광장처럼 보이는 손바닥 속 세상은, 실은 보기보다 훨씬 더 얕고 가볍다. 새로운 만남과 나를 위한 전시의 공간은 무한정 늘어나고 찰나의 소통을 통해 연결도 무한히 이어지는 듯하지만, 단절은 연결보다도 더 손쉽다. 언제나 함께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작은 방에 홀로 앉아 있을 뿐이다. 연결이라 믿었던 감각은 어쩌면 고립의 또 다른 이름을 착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토록 성심성의를 다했건만 역설적이게도 활발히 소통하고 교류할수록 더욱더 고독해진다. 찰나의 소통들은 부서진 파편 조각 같아서 한 순간에 그 어떤 의미도 없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은 곧 스토리셀링으로 바뀌어, 무비판적인 좋아요와 팔로워 수로 치환된 연결에 우리를 중독시킨다. 말하자면 서로의 다름에 부딪혀 익숙했던 나의 세계가 부서지고 내 인생의 방향과 가치를 재정의해보는 성찰의 시간은 줄어들고, 그 자리를 숫자로 환산된 피상적인 관계가 대신한다.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기록한다 믿었지만


SNS를 통해 사람들은 인생의 한 페이지를 부단히도 성실하게 기록한다. 머릿속을 스친 생각한 줄, 그날의 사진 한 장, 현장의 공기를 담은 짧은 영상. 스쳐 가는 순간을 오래도록 붙잡고 싶어서.


하지만 그 기록은 이내 숫자로 환산된다. 좋아요의 개수가 감정의 크기를 대신하고, 댓글의 속도가 생각의 깊이를 대체한다. 그 안에서 나의 서사는 매번 잘려 나가고 알고리즘이 허락한 길이만큼만 살아남는다. 어제에 비해 '좋아요'를 덜 받으면 마치 내 하루 자체가 의미 없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어제의 기쁨과 오늘의 슬픔 역시 ‘하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압축되어 소비된다. 내 삶을 기록한다 믿었지만 사실은 가상의 공간에 내 스토리를 상품화해서 진열한 조각들이었다. 결국 살아남는 건 남들에게 팔리기 좋은 포장지로 가공된 허구의 스토리뿐이라는 현실에 마음이 더 공허해진다.


왜냐하면 SNS 스토리엔 맥락이 없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서사적 연결 대신 도파민을 자극하지 못하면 24시간 안에 사라져 버리는 운명만 남는다. 그 어떤 맥락도 없이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만 확대한 파편, 총체적 방향성 없는 조각난 순간만이 존재한다.


결국 SNS는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남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만의 이야기를 빼앗아간다. 내 솔직한 생각과 감정을 말하기보다 트렌드에 따라 입력된 정보를 앵무새처럼 내뱉게 만든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순간의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도 기꺼이 서사 없는 텅 빈 삶을 향해 달려간다. 누구보다도 아주 열심히.




몰아의 시대, 나는 어디에?


SNS는 자유를 약속한다.

원하는 것을 말하고, 원하는 대로 나를 표현하라고.

마음껏 말할 자유, 보여줄 자유, 기록할 자유.


그러나 그 모든 자유에는 보이지 않는 은밀한 압박이 붙어 있다. 늘 새로워야 하고 창의적이어야 하며 누구보다 주목받아야 한다는 강박. 아무도 보지 않아도 올릴 수 있다 말하면서도, 정작 누군가 봐주지 않으면 허무해지는 건 왜일까. 자유라 믿었던 힘은 사실 가장 교묘한 예속이었다.


끝없이 스크롤을 내리며 기계와 하나 되는 물아일체의 상태. 무한한 알림과 업데이트 파도 속에서 자아는 잠시 사라지고, 손가락만이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생각은 더 깊어지지 않고 집중은 잘게 조각난다. 서사를 세우기는커녕, 순간의 파도에 휩쓸려 진짜 내 모습은 서서히 옅어지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넘쳐나는 트렌드와 자극적인 스토리에 떠밀려서.


스토리는 가장 자극적인 조각, ‘하이라이트’만을 맥락 없이 던진다. 기승전결도, 숙고의 시간도 없다. 왜냐하면 SNS에선 늘 더 큰 자극과 놀라움을, 누구보다 빠르게 공유하길 요구하니까.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잘게 토막 나고, 찰나의 소통이 최우선인 이 세계에선 모든 스토리는 데이터로 소비된다. 내 이야기가 아닌 SNS 속 남들의 스토리를 따라 인생을 소비하는 세상. 그래서일까. 요즘은 직접적인 현존 경험마저 멸종 위기에 놓인 듯하다.


자아가 잠식되다 못해 진짜 '나'를 잃어버리고 있는 몰아의 시대. 무의식적 몰입 속에서 나의 생각과 감정, 서사는 지워지고 '나'라는 주체는 알고리즘이 만든 가상의 자아로 대체된다. 기다림과 여백, 스스로 경험하고 해석할 시간을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다.


대신 그 빈자리를 채운 건 정보와 기술을 통한 ‘인스턴트 소통’, 언제든 끊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약한 연결', 마약처럼 중독되어 끊을 수 없는 '도파민 자극'이다. 어쩌면 그것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고립시키는 굴레일지도 모른다.




스마트 판옵티콘에 셀프 감금된 우리


가끔 생각한다.

SNS에 공유된 수많은 스토리들은 정말 유일무이한 ‘나'만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잘 짜인 '각본’을 연기하는 판타지에 불과한 것일까.

SNS는 흔히 나를 세상에 비추는 창이라 불린다. 그러나 실상은 창보다 거울에 가깝다. 세상에 내 이야기를 보여준다 믿지만, 사실은 ‘내가 얼마나 남에게 잘 보이려 하는가’를 매일 확인하는 무대, 곧 스스로를 감시하며 갇힌 감옥과 다름없으니까.


우리는 스마트폰을 들고 자발적으로 접속하며 피드를 채운다. 그렇게 스스로를 일종의 ‘스마트 판옵티콘’에 감금한다. 그러나 그 무대 위에서 드러나는 것은 풍요로운 자유도, 깊어진 관계도 아니다. 결국 남는 건 전시용으로 만들어낸 자아에 대한 오만과 편견의 허상, 그리고 공허한 하루의 끝뿐이다.


SNS가 판옵티콘보다 더 교묘한 이유는 감시의 주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데 있다. 자유처럼 보이던 영역은 곧 자기 통제와 강박으로 뒤바뀌고, 삶의 사건은 맥락 없는 단편 정보로 축소된다. 알고리즘은 그것을 주기적으로 정렬할 뿐, 서사적 성찰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는 사유할 용기를 잃어버렸다. 불안이 성찰의 틈을 잠식했기 때문이다. 불안은 시야와 가능성을 질식시키고, 나와 세상의 간극을 감옥처럼 좁힌다. 원인 모를 이 만연한 불안은 우리를 각자의 독방에 가둔 채,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조차 알면서도 스스로 외면한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거울, 나의 감옥,
SNS.


따라서 스토리 과잉 시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토리셀링이 아닌 ‘서사’다. 순간의 파편 조각이 아닌,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느리지만 천천히 흘러가는 이야기. 한 번 반짝하고 사라지는 신기루가 아닌, 오랜 기다림과 여백을 품은 목소리.


서사는 나를 되돌아볼 시간을 건네준다. 스스로 느끼고 해석하며, 결국은 나만의 지혜를 길어 올릴 수 있는 깨달음의 시간을. 어쩌면 서사를 회복한다는 것은, 알고리즘에 무참히 잘려 나간 인생의 파편 조각들을 다시 꿰어내어 내 삶을 하나로 엮어내는 일이 아닐까. 그렇게 촘촘히 이어진 이야기는 더 이상 알고리즘의 데이터가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만의 목소리로 남을 테니까.




P.S. 덧붙이는 말

SNS의 쓸모를 전면 부정하는 건 아니다. 본업이 마케터인지라 실제론 SNS의 장점만을 쏙쏙 빼먹고 있는 쪽에 가깝다. 특히 IT 교육 업계로 넘어오고 나서는 매일같이 SNS 트렌드를 파악하고, 새로운 포맷을 실험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SNS 콘텐츠를 만드는 게 주요 일과 중 하나일 정도로 SNS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콘텐츠보다는 짧고 자극적인 소비 위주의 콘텐츠를 선호하게 되면서 내 일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콘텐츠가 결국 실체 없는 불안의 알고리즘을 만드는 데 일조했고, 돌고 돌아 나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건가 하는 의문과 죄책감. 괜히 내 발등을 내가 찍는 듯한 꺼림칙함이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불안의 원인이 사실은 나 자신이었던 건가 하는 늦은 깨달음과 함께.


그래서 이제라도 제대로 된 진짜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 앞뒤 맥락과 기승전결은 물론 몇 번이고 봐도 봐도 또 꺼내보고 싶은 콘텐츠를. 뭐 하나 시작하려면 고민만 하는데 몇 년이 걸리는 내가 갑자기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된 것도 사실 그 때문이다. 일순간의 소비로 끝나는 유흥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시대를 거슬러 계속 회자되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마음. 언젠가는 꼭 그런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 본업이 되길 바라며.


추가 덧,

이번 글의 주제가 흥미로웠거나 평소 철학책을 즐기는 분이라면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 <투명 사회>, <불안 사회>를 함께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시간이 된다면 가장 유명한 책인 <피로 사회>까지. 책이 모두 150쪽 내외로 길지 않아서 출퇴근길에도 금방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하지만 번역이 다소 관념적으로 되어있어 결코 쉽게 술술 읽히는 문체는 아니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마주한 과제를 통찰력 있게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스페인 노벨상인 아스투리아스 공주상 인문 부문 수상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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