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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웬 Nov 10. 2024

멀리, 그리고 오래 가기 위해

 후퇴 또한 환영하기를


- 우리가 보기에 끝없이 성장하는 듯한 기업도 잘 들여다보면 큰 굴곡이 있다. 멀리서 보니 멈춤이나 후퇴가 없어 보일 뿐이다. 가까이 보면 크고 작은 후퇴들이 있다. 그런데 이 후퇴 뒤에 새로운 전환과 성장을 보였다. 
- 무엇이든 가파르게 오르는 것은 가파르게 떨어진다.
- 멀리 가려면 후퇴를 환영하라. 위기가 기회라는 말은 위로의 말이 아니다.

신수정 <일의 격> p.344-345 | 후퇴를 받아들임




20대의 나는 큰 실패 없이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들을 이루며 살아왔다. 



학생회/총학생회도 하고, 다니는 내내 전액 혹은 일부 장학금도 받고, 학기 중에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매년 해외여행도 가고, 가고 싶었던 영국 봉사활동도 선정되어서 다녀오고, 미국 교환학생도 가고, 성적이 우수해 조기졸업했다. 서울 롯데 호텔에서 열린 한 포럼에 참석했다가 어느 한 분의 눈에 띄어 일자리를 제안받아 (낙하산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좀 더 다이내믹한 일을 위해 이직한 회사에서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주로 일하며 태국과 말레이시아 해외 출장도 여러 번 다녀왔다. 또 한 번 이직한 곳에서는 12개의 글로벌 지사와 함께 일했고, 휴가도 재택도 자유로워 원할 때면 언제든 휴가를 쓰고, 여행을 길게는 3주씩 다녀오기도 했다. 물론 잔잔한 어려움과 고초들이 있었지만 멀리서 보았을 때 (그리고 또한 나 역시도 인정하지만) 크게 굴곡 없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퇴사를 하며 3개월 정도 생각하고 시작한 아프리카 여행이 무기한으로 늘어나 대부분의 시간은 멕시코와 남미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것이 코로나가 전 세계를 휩쓸기 전까지 내 삶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었겠지만)



30대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서 산 시간이 10년이 넘는다. 그중 서울에서 6년 + 전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닌 시간이 1년이니 내가 다시 돌아오자마자 겪어야 했던 2주간의 격리, 부모님의 집, 진해에서의 생활이 그저 낯설었다. 친구도 지인도 거의 없는 진해에서의 시간이 갑갑하고 힘들었다.



가만히 주저앉아 아무것도 안 했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이전 직장이나, 직장동료가 이직한 회사, 그리고 심지어 고객사였던 넷플릭스(이건 때로 조금 아쉽기도 하다)에서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 정착할 마음보다는 해외로 가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재취업은 생각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겠다고 전화 영어 및 화상 영어 수업도 열고 1:1, 2:1 영어 회화 과외를 2년 정도 했다. 여행 다니며 해보고 싶었던 에어비앤비도 오픈해서 운영했고 6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친구와 동업해서 제품을 기획, 제작, 판매하면서도 사업가로서 프리랜서로서 자립하는 과정에서의 고충을 나눌 수 있는 이 지역의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서 (우리 사무실 겸) 공유 공간을 오픈했다. 결국 지역에서 내가 원하는 수요를 찾지 못해서 공유 공간 문화공간으로 전환하였고, 온 오프라인 독서모임, 런치 밑업, 재즈 공연, 요가 수련, 전시회, 디제잉 파티 외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또 운영했다. 이때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생각을 공유하고 또 나의 세계를 확장해갈 수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함께 동업했던 친구와는 가치관과 결이 맞지 않아 하고 있던 사업을 정리하고 아름다운 이별을 했다.



여전히 진해에서의 삶에 부족함을 느꼈고, 업 다운이 있지만 늘 항상 다운되어 있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다 지인의 연말 파티에 참석해 외국인 친구와 영어로 대화하던 나를 지켜보던 한 분을 통해 영어 강사일을 제안받았다. 영어 스피킹이 아니라 입시 영어였다. 나는 학창 시절 입시 교육이 싫어서 튕겨 나왔던 사람 중 한 명이고 여전히 입시 문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 느끼던 시점이었고, 어차피 다수가 통과해야 하는 입시라면 나를 통해 입시 영어를 조금이라도 재밌고 수월하게 배우길 원하는 마음에 오퍼를 받아들였다. 크고 오랜 고민은 하지 않았다.



처음엔 모든 것들이 새로웠기에 배우는 과정이라 정신없이 지나갔다. 놀면서 말로 익혔던 영어를 어법적 정확도에 근거하여 (정답을 찾기 위해) 가르치려 하니 강도 높은 공부가 필요했다. 알고 있는 것을 명확하고 심플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했다. 특정 상황에서 쓰는 영어 단어와 표현은 알지만 이걸 한국어로 뭐라고 해야 할지 말문이 막힌 적도 꽤 있다. 티칭이라는 게 Day1부터 바로 현장 투입이다 보니 매일의 수업 준비하고 수업하고, 또 수업 준비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3개월 정도 지나니 조금은 그 일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보이더라. 



"음, 나 이 일 안 맞는 것 같은데..."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서 불편한 건지 아니면 정말로 안 맞는 일인지 스스로 자문할 필요가 있었다(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스스로의 gut feeling, 직감을 좀 더 믿을 필요가 있다. 생각해 보면 평균적으로 1~2달 정도면 느낌이 오니 말이다). 그리고 1년 동안 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으면서 이 일을 지금 있는 곳에서 지속하고 싶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입시 교육 서비스업과 내가 지향하는 가치관 자체가 너무도 상이했기 때문이고, 이 좁은 세계에 나를 더 이상 욱여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복하지 않았고, 삶이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게 싫었다. 스트레스의 정도가 심해 몸에서도 이상 신호들을 보냈다. 웃음과 기쁨을 잃었고 안색도 어두워졌다. 무기력하고 어두워진 표정으로 몇 개월을 살며 부정적인 아우라를 엄청 뿜어내기도 했다. 다시 자유로움을 되찾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보기로 했다. 현재가 아닌 미래의 자유에 포커스를 두고 삶을 다시 튜닝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지난 7월. 현실적으로는 당장 뛰쳐나올 수 없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시도하며 자유로운 삶을 준비 중이다. 



코로나로부터 지금까지 4년의 시간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던 나에겐 실패의 시기이자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순간들이 모여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밖으로 향해있던 시선을 내 안으로 돌린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전의 나는 1년에 책 한 권 읽을까 말까 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읽고 쓰는 사람이 되었다. 

자기중심적 사고의 '어쩌라고?'마인드가 강한 이기적인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좀 더 말랑말랑하고 다정한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볼 줄 알게 되었다.

나의 취향과 선호, 약점과 강점에 '나'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게 되었다.

스스로의 실패나 실수에 대해 너그러워지고 (여전히 튜닝 중이지만) 오히려 배울 점을 찾게 되었다.

엄마 아빠로서 아니라 부모님을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좀 더 알아가고 존중하게 되었다.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는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나는 4년의 시간 동안 내면의 단단함을 다지며 뿌리를 내리는 중이다.



이따금씩 상상해 본다. 4년 전의 내 모습 그대로 뭔가를 이루고 성취했다면 나는 내가 잘나서 잘 된 줄로 아는 자아도취에 빠진 이기적이고 재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 말이다. 내게 주어진 성취를 누릴 그릇이 되지 못해 그만 압도되어버렸을지도. 그러다 실패하거나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순간이 오면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크게 우울증이 왔을거다. 다시 딛고 일어나는데 지금의 4년이라는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거다. 지금 이렇게 으쌰 으쌰 하다가 또다시 우울과 무기력의 구간으로 접어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최저점은 다시 갱신되지 않을 테고, 오르락 내리락하며 계속해서 등산해나갈 것이다.




- 성경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큰 통찰 중의 하나는 '갈망'도 '노력'도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 '노력'이 먼저가 아니라 '믿음'이 먼저라는 것이다. 믿고 믿음대로 담대하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 이미 인정받은 존재이기에 인정에 애쓰고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 설령 주위에서 인정을 안 해도 괘념치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인정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저 신념대로 전진할 뿐이다. 

신수정 <일의 격> p. 350-351 | 노력이라는 미신에 대하여




어렵지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후퇴의 시간에 오히려 감사하자 마음먹는다.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이라 생각할 때도 있지만, 이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이 찰나 같은 인생에서 내가 놓치고 가는 것들이 더 많았으리라. 내가 삶에서 중시하며 살아야 할 것들을 더 잘 발견하고 지켜내기 위해 거품을 걷어내고, 시야를 밝히는 시간. 그렇게 오늘도 축적한다. 빛을 발할 순간이 오면 찬란하게 빛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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