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고
마침 작년 연말에 코로나 극성수기(?)를 맞아 강도 높은 거리두기가 시행되는 바람에 예년의 시끌벅적한 연말에서 벗어나 비교적 조용히, 약속 없이 집에 오래 머무르게 되었다.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회사 덕에 연말에는 거의 아무도 일을 하지 않는 훌륭한 문화(!)와,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지메일 알림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진 덕분에 아무 제약 없이 시간을 마음껏 흘려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왓챠에 해리포터 시리즈가 들어왔다는 소식과 함께 왓챠에서 특별 이벤트성으로 준비한 사이트 내 여러가지 장치들(ex. 볼드모트를 검색하면 자동으로 ‘그 자의 이름을 말해선 안돼!’ 따위의 것들로 자동을 치환되었다)이 밈화되어 내 눈에 들어왔고, 마침 할 일도 없었던 나는 스크린으로나마 연말 분위기를 느끼자며 왓챠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사실 해리포터 시리즈의 백미는 개인적으로 신비로운 분위기와 원작의 내용이 충실하게 표현된 1-3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워낙 1-3편은 티비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많이 보아 왔어서 스토리가 가물가물한 4편 불의 잔부터 보기 시작했다. 불의 잔은 대중적으로 1-3편과 다르게 책 네 권 분량의 내용을 러닝타임의 한계가 있는 영화로 구현하다보니 스토리의 개연성이 잘 표현되지 않았다는 평을 받는데, 과연 그랬다. 또 4편 말미에서 볼드모트가 부활하며 5편부터 해리 일당이 실재하는 볼드모트를 상대하게 되면서 극의 색감이나 분위기 자체도 많이 어두워져서 가볍게 시작한 판타지 장르의 영화치고는 꽤나 축축하고 어둡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여년간 지속되어온 방대한 시리즈의 가장 큰 반전 혹은 비밀 중 하나인 스네이프의 서사가 밝혀지는 부분은 단연 시리즈 후반부에서 놓칠 수 없는 하이라이트였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책을 통해 본래 문학평론가인 저자 신형철은 그가 문학평론가로서 가지고 있는 서사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그만의 독법을 바탕으로 영화의 스토리를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비록 그가 전문 영화평론가는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촬영 기법, 영상미 등 영화가 영상물로서 가지는 의의에 대한 해석은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영화의 서사만큼은 책의 제목에서처럼 ‘정확한 사랑'을 꿈꾸는 자의 입장으로 우리도 독자로서 그 영화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하고 나아가 정확히 사랑할 수 있게 도와준다.
영화의 서사에 집중하여 풀어내는 책의 방향성상 상대적으로 익숙한 모티프와 익숙한 논점, 그리고 익숙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단편적인 서사는 그의 평론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스네이프라는 시리즈의 입지전적인 인물 덕에 해리포터 시리즈는 그의 책 부록 한 켠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작가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의 사랑을 얻으려면 그녀 없이 살아갈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죽은 신을 위하여>라는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스네이프가 해리의 어머니인 릴리를 너무 많이 사랑했기에 그녀를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
역설적이게도 그에겐 그녀가 전부였기 때문에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의 전부가 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다는 것인데, 이 구절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사랑의 잔인한 역학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이 사랑하는 것이 궁극적인 사랑의 성취에 방해가 된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스네이프와 같이 지극한 순애보적인 사랑이 아니더라도 이런 아이러니는 관계가 형성되는 단계 곳곳에서 일어난다. 서로가 충분히 가까워지기 전 한 쪽이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하거나 다가오면 상대방은 오히려 쉽게 멀어지기 마련이고, 관계가 시작된 후에도 한 쪽이 더 큰 애정을 쏟을수록 소위 갑을관계가 형성되어 사랑의 바보, 혹은 사랑의 패자가 되고 만다. 나아가 그 사랑이 모든 행동의 원천이었던 스네이프는 선과 악에 대한 가치판단이 아닌 자신의 열정에 따라 행동했음을 보여주며 이분법적으로 단순화되어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해리포터의 인물들 중 가장 독특하고 융화되지 않는 자아를 보여준다.
어느 정도 노력하면 정비례까진 아니더라도 노력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지는 않는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에 비해 사랑은 너무나 야속하다. 왜 인간은 마냥 사랑을 쏟는 사람보다는 본인과의 적당한 거리와 텐션을 유지하는 사람에게 더 이성적인 끌림을 느끼는 걸까.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진화의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사랑을 제외한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은 달리기 연습을 많이 할 수록 속도가 느는 것처럼 노력에 상응하는 어느정도의 결과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누군가가 달리기에 미친듯이 빠져서 본인의 현재 상황이나 태생적 한계 등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달리기만을 위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자연스레 달리기를 제외한 모든 활동들의 우선순위가 하향조정될 것이고 극단적으로는 생계 유지 활동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또 무리한 달리기로 인해 오히려 본래 목적과는 반대로 건강을 심히 해칠수도 있다.
사랑에 푹 빠져서 누군가를 지나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그 대상이 아니더라도 다른 무언가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또 다시 그렇게 몰입할 수 있는 기본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과도한 몰입 성향은 앞서 말한 달리기의 예시처럼 오히려 관계와 상대방, 그리고 본인까지 상하게 할 수도 있고 자칫하면 잘못된 방향으로 발달되어 지나친 집착과 불안 등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결국 과도한 몰입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위험성을 높이며 이는 생물학적으로 생존에 도움이 되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기 때문에 그 몰입이 나를 향하든 아니든 적당한 거리를 균형있게 유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더 매력을 느끼게끔 우리가 진화한 건 아닐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자꾸만 급하게, 과격하게 사랑에 빠지는 나는 얻고자 했던 사람을 잃은 채 갈 곳 없는 마음을 빈 집에 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