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가 많은 편이다. 취미 란에는 '욱하기' 특기 란에는 '짜증 부리기'를 적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이상하게 운전대만 잡으면 평온해진다. 보통 사람들과는 정 반대다. 22년 무사고답게 운전석에 앉으면 안전거리 확보와 양보가 우선이다. 현재 운행 중인 차량의 상태가 이를 증명한다. 6년간 15만 km를 주행하면서 브레이크 패드를 한 번도 교체하지 않았다(브레이크 패드는 통상4만 km정도에교체한다).교체 권고 주기의 4배가량을 주행했는데도 향후 5년은 너끈히 더 버틸 분위기다. 패드의 마모도가 아직 양호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2년 전, 10만 km 점검 시에는 정비사가 "브레이크 패드는 얼마 전에 교체하셨네요?"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본인의 지식을 자랑하기까지 했다. "아니요. 한 번도 교체하지 않았어요"라는 답을 했을 때, 정비사의 눈이 두 배 더 커졌다. 놀란 반응을 직접 보여주지 못해 아쉽다. 출퇴근 시 고속도로를 이용하고, 엔진브레이크를 사용하며 얌전하게 운전하니 패드의 마모가 적은 듯하다.
이런 내가 가끔씩 비상등을 켜고, RPM을 높이며 미친 듯이 속도를 올리는 순간이 있다. 뒷좌석 카시트에 앉아 있는 딸아이가 "아빠, 쉬 마려" 하고 외치는 순간, 나는 이성을 잃고 '미하엘 슈마허(전설적인 카레이서)'가 되어 차선을 이리저리 바꿔가면서 목적지로 향한다. 이때에는 평소 사용하지 않는 클랙슨까지 눌러가며 거칠게 질주한다. 그러다 저 멀리 카페가 보이면, 금세 안도하며 '몽마르트르 언덕'을 여행하는 기분을 느낀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커피를 한 잔 주문한 뒤 화장실을 찾는다. 프랑스 파리보다 비싼 화장실 이용료를 지불해야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카시트를 변기로 사용하지 않은 걸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작년 여름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딸아이의 "아빠, 쉬 마려"가 차 안에서 다급하게울려 퍼졌다. 근처에 맥도날드가 있으나 비를 피해서 들어가기는 힘든 위치다. 아쉽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 핸들을 꽉 쥐고 액셀을 더 깊게 밟는 동안 아내는 아이의 안전벨트를 푼다. 부부가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며 목적지까지 이동한다. 도착과 동시에 "자기야, 내려" 하고 소리치니 아내가 차 문을 연다. 우산을 펴고 아이와 함께 빗속을 빠른 속도로 걷는다. 곧이어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차창 밖에서는 영화처럼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 한 사람이 25m 떨어진 거리에서 걸어오는 아내와 아이를 위해 유리문을 붙잡고 한참을 서서 기다린다. 키가 큰 백인 남성이다.커다란우산을 들고있지만 몸이비에 젖는 게 보인다. 그럼에도 남자는 환하게 웃고 있다. 동시에내게는 남성이 등에 매고 있는 백팩이 천사의 날개처럼 보이는 착시가 일어난다. 그의 배려 덕분에 아내와 딸은 편안히 매장으로 들어간다. 말로만 듣던서양 신사의 매너를 눈앞에서목격하는 순간이다. 연약한 여성과 아이를 위해 기꺼이 본인의 시간을 투자하며 배려했던 그 남성을 만난 이후, 나의삶도 바뀐다.
다음 날, 나는 젠틀맨이 되기로 결심하고 즉시 실행에 옮긴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유리문을 붙잡고,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 대신 '열림' 버튼을 누른다. 현관에서는 신발을 신기 좋은 방향으로 정렬해 놓는다. 차를 탈 때는 차 문도 열어준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어색한 행위를 기꺼이 실천한다. '도어맨'이라는 부캐가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지만 문을 닫을 때 "고마워" 하고 말해주는 아내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 계속하다 보니 어느새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동승자의 문을 열어 줌으로써 출발 시간은 지연된다. 그럼에도 나는 왜 계속 문을 열어 주는 것일까? 아마도 15초 정도 늦은 출발이 가져다주는 행복의 가치가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부터는 탑승 수속 절차가 더 복잡해졌다. 아내가 탑승 위치를 뒷좌석에서 조수석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차량에 도착하면, 나는 가장 먼저 조수석 문을 열고 그다음 뒷문을 연다. 앞에는 아내가 뒤에는 아이가 탑승한다. 두 개의 문을 닫고, 반대편으로 달려가 운전석 뒷문을 연다. 그사이 카시트에 앉은 아이의 안전벨트를 채운다. 세 번째 문까지 닫고 나서야 운전석 문을 연다. 자리에 앉은 후 마지막 네 번째 문을 닫는다. 헉헉. 액셀을 밟기도 전부터 가쁜 숨을 몰아쉰다. 계속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언젠가는 뱃살이 빠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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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때에는 허리가 작아져 입지 못하는 정장을 다시 꺼내 입고, 영화 <킹스맨>의 주인공처럼 품위 있게 차 문을 열어 주어야겠다.
비하인드 스토리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처음 아내를 위해 차 문을 열었던 날을 기억한다.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게 민망하고 부끄러웠지만 '기쁨'은 늘 '연약함'을 이긴다. 금세 익숙해진다. 주변의 시선보다 내 가족의 행복이 언제나 더 우선이다. 차 문을 닫을 때마다 아내와 딸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기분이 들면서 입가에 미소가 번지다 보니, 지금은 이 행위를 즐기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높아지는 두 여인의 자존감은 덤이다. 그럼에도 합리적인 판단을 중시하는 인티제의 관점에서 보면 딱 한 가지 후회가 남긴 한다. 이렇게 좋은 걸 조금 더 일찍 시작하지 못한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배려를 받는 아내도 기분이 좋은 게 확실하다. 며칠 전에는 차 문을 여는데 "자기야, 고마워. 팁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하고 웃으며 묻는다. 부부 사이에 팁이라니 아니 될 말이다. 묵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수년째 동결 중인 용돈의 인상을 은근슬쩍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