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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 Apr 21. 2023

작가의 조건

적당한 재능은 지옥이다



프리랜서 작가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스스로 만들고 지키는 마감이다. 마감을 정하지 않는 글은 습작이며 일기이며 메모일 뿐이다. 구체적인 주제나 목표 혹은 기획 의도가 있어야 한다. <유시민의 유럽 도시 기행> 같은 책은 유시민 작가가 유럽을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바탕으로 풀어내겠다는 아주 명확한 목표 의식으로 만들었다. 제작 의도는 작가가 자의로 했을 수도 있고 출판사에서 기획하고 작가에게 요청했을 수도 있다.



글쟁이가 출판사에서 출간을 요청받는다는 사실은 정말 멋진 일이다. 몇 년간 블로그 글을 쓰면서 글쓰기를 갈고 닦았지만 아직 변변한 연재작도 없고 탈고한 작품도 없고 학벌이나 인지도도 전혀 없는 나로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직업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제공한 노동력에 대한 댓가를 받는 일이다. 물론 블로그로도 수입이 없는 건 아니지만 블로그에 매일 하나씩 글을 올린다고 해도 우리는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모름지기 작가란 출판사를 통해 정식으로 단행본을 내고 팔아야 작가라는 구조적인 신뢰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 쓴다고 모두 작가로 인정 받지 못한다. 적어도 나처럼 블로그에만 글을 써 왔다면 아무리 다작을 했더라도 작가로 불리기 힘들다. 작가라는 정의를 글 쓰는 사람으로 아주 넓게 정의하자면 그것도 작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보통 작가라고 하면 책을 출간해서 상업적으로 수익을 올린 사람을 뜻한다. 정신 승리 할 순 있겠으나 세상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왜 세상이 인정해줘야만 작가 되느냐고? 당연하게도 글을 팔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글쟁이가 글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는데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건가. 



전자책은 책의 결과물이 무엇인지에 따라 조금은 달리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100페이지 이하로 특정 정보를 요약하고 노하우로 만들어서 고액으로 판매하는 것은 개인적으론 책이라기보다는 족보에 가깝다고 여긴다. 물론 그런 족보들도 잘 다듬어서 출판물로 낼 수 있고 또 매우 실용적이다. 인터넷 강의 사이트에서 판매하는 기출문제집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런 출판물을 책이라고 하진 않는다. 적어도 책이라는 범주에서 문제집이나 족보는 제외 해야 한다.



이와는 다른 경우로 웹소설을 쓰는 분들은 작가라고 불러야 한다. 출판물을 만든다는 것은 돈을 들여 재고를 쌓고 홍보와 유통과정을 거쳐 책이라는 물질을 구매자가 만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즉 출판 자체가 돈이 들어가는 행위이며 그만큼 위험 부담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다. 출판물은 출판사를 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웹소설은 이런 리스크를 없애준다. 플랫폼에 업로드만 하면 된다. 환경오염 문제도 전혀 생기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인지도가 전혀 없기 때문에 출판물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탓이다. 브런치 작가도 결국은 웹작가니까. 돈이 남아돌아 아무도 읽지 않아도 스스로 글을 쓰는 것에 만족하고 책을 직접 출판해서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가와 작가 지망생들은 형편이 그렇지 못하다.



팔리지 않는 책을 만드는 것은 큰 문제다. 글쓰기의 한쪽 끝에는 예술이 자리 잡고 그 반대쪽 끝엔 상업이 자리 잡고 있다. 상업적인 글들은 독자들을 설득하거나 자극적인 소재로 유혹하지만 수명이 짧다는 단점이 있다. 예술적인 글들은 그 수준이 높아 대중에게 외면을 받기 마련이다. 물론 대부분 양산되는 글들은 예술성은커녕 상업성도 없기 때문에 읽힐 가능성이 전혀 없다. 이런 문자 낭비들 가운데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거머쥐는 책들이 있는데 이런 책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고전으로 분류된다. 오죽하면 현대 고전이라는 말이 있을까. 



전문가의 반열에 들어서면 스스로 수준과 스스로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알게 된다.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쓰고 있는 글이 상업적인지 예술적인지 예술적이라면 그게 어느 정도 수준인지 어떤 철학을 담았는지 스스로 잘 안다. 비 전문가 중에서도 수준 높은 글을 쓰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작가는 결국 계속 쓰는 자이기 때문에 우연히 좋은 책을 한번 썼다고 그 인생이 인정받을 순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벨 문학상은 작품이 아닌 수상자에게 상을 수여한다. 수상자의 문학 활동 자체가 공로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밥 딜런이 노랫말로 문학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가 작가라고 인식하려면 적어도 자신이 어떤 글을 쓰는지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필요하다.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는 이유는 내가 음악이라는 예술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16살 때 처음 기타를 잡았을 때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냥 기타가 잘 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락기타리스트를 꿈꿨던 나는 같은 해 재즈에 매료된 나머지 학구열이 올라 그만 실용 음악과에 진학 해버리고 말았다. 전공자가 된 것이다. 군대는 군악대를 다녀왔으니 청년기 전반이 모두 음악과 함께였다. 그러나 그때 까지도 나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 군대를 전역하고 1년간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약 10개월간 고액의 개인 레슨을 받았다. 목적은 실용음악과의 정점인 서울예술대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결국 중간에 레슨비를 감당하지 못해 포기했고 원래 다니던 지방 음대에 복학했다. 비록 한국 최고의 실용음악과가 있는 서울예술대학교에 가진 못했지만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최고의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고 수준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고 나서부터 스스로의 수준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낙관적이었던 시각이 서서히 비관으로 돌아 섰다. 



지방 음대의 후배들과는 수준 차이가 많이 나는 걸 알게 되었고 교수님들의 가르침 또한 거의 이해되었다. 물론 이해했다고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결국 끝없는 숙달 반복으로 물 흐르듯 피지컬을 발휘할 수 있어야 내 것이 된다. 즉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맞춰가는 과정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다. 전공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작품을 내고 교수님의 수업을 다 이해하고 얼마든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착각의 함정에 빠지는데 이런 현상을 "유창성 효과”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다는 착각이다. 막상 실전에 들어서면 생각만큼 안된다. 깨지고 깨지다 보면 하나둘씩 포기자가 생기고 그중 극소수만 대가의 길로 들어선다. 



낙관이 비관으로 바뀌었고 나는 그 길을 포기했다.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천재들과 금수저들이 드글대는 그곳에서 가난한 내가 자리 잡을 곳은 없었다. 예술가로서의 뮤지션이 아니라 직업인으로서의 뮤지션은 멋도 없지만 마땅히 벌어 먹을 것도 없었다. 멋지지 않으니 계속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국내를 넘어 월클 뮤지션이 되겠다던 꿈과 사명은 이미 사라졌고 공연이 끝난 무대의 악기를 주섬주섬 치우는 내 모습에 환멸이 느껴졌다.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재미도 없었다. 그때 이미 내게서 뮤즈가 떠나갔음에도 나는 집 나간 아이가 돌아오길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은 나를 꿀꺽 집어 삼켰다.



지금도 옛 동료들에게 물어보면 어느 정도 재능을 인정받는다. 그렇지만 예술의 영역은 적당한 재능으론 어림도 없다.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뒷받침해 줄 경제적 여건도 있어야 한다. 이 점이 내가 10대의 예술 전공 희망자들을 적극적으로 말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 말했다. 적당한 재능은 지옥이라고. 예체능을 하고 싶은데 부모님 입장에서 말리고 싶다거나 자녀 입장에서 부모님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전공으로 삼는 건 무조건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말들이 오고 가는 자체가 예술을 업으로 삼기에 경제적인 문제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예술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부모님이 나의 무덤까지 책임져줄 수 있으며 스스로는 딱히 공부나 사업에 큰 뜻이 없어서 적당히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돈으로 사려는 사람들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예술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엔 예체능 하기에 환경이 너무 좋다. 대한민국의 경제적 수준이 이제는 생활 수준에서 얼마든지 예체능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고작 몇 만 원만 지불하면 각종 고급 레슨을 온라인을 통해 받을 수 있다. 좀 더 여유가 있다면 오프라인 활동으로 내가 하고 싶은 예체능 활동도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실제로 버클리 음대 출신 프로 뮤지션의 유튜브 채널에서 공짜로 강의를 들을 수도 있고, dm을 보내 레슨을 받을 수도 있다. 즉 개인 여가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며 여가 활동에 필요한 경제적 여유만 만들 수 있으면 전공자보다 더 즐거운 상태에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다. 그 정도 여유도 안된다면 어렵겠지만 애초에 그 정도 여유도 안 되는 사람이 예술 전공한다는 것부터가 잘못 끼워진 단추와 같다. 아내와 아이를 등지고 나이 40이 되어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폴 고갱>이다.



내 단추가 그랬다. 일렉트릭 기타 전공에는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었고 우리 집은 내 생각과는 다르게 보기 보다 가난했다. 그럼에도 모든 사정을 귀 닫고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이어갔었다. 그 하잘 없는 적당한 재능 하나만 믿고. 내 음악 인생 가운데 언제 가장 인정받았는지 생각해 보니 17살 무렵 자작곡을 만들고 클럽연주를 할 때 그 곡의 가사들이 좋다고 사람들이 말해주던 때였다. 돌이켜보니 그때부터도 나는 글을 썼다. 그리고 지금도 글을 쓰고 있다. 과거의 나는 음악을 통해 중요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기억되고 싶었다면 그 예술적 욕구가 이제는 글로 넘어왔다. 그뿐이다. 음악에서 글로 옮겨 왔고 기타에서 노트북과 펜으로 옮겨왔을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글쓰기>라는 제목을 곱씹다가 나도 직업으로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조금 생겼다. 그리고 히사이시 조의 <음악일기>에서 "마감력"이라는 단어에 영감을 받았고 누이의 기자 친구 에게도 마찬가지로 어떤 글이든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지기 전에 기일을 정해두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말에도 영향을 받았다. 공모전이 대표적이다. 공모전은 기일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기일에 맞춰 내 글을 완성해야 한다. 비단 예술뿐 아니라 사람이 하는 일에는 모두 마감이 필요하다. 완벽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히 글쓰기는 반드시 마감이 필요하다. 언제까지고 수정하고 싶은게 글이다. 펜에서 pc로 글쓰기 환경이 바뀐 지금 본문을 쓰는 것 보다 수정에 훨씬 많은 시간이 들어 간다. 고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생각보다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전형적인 가짜 노동이다.



전공으로서의 예술은 부자들에게 양도하고 우리는 취미로서의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을 먼저 만들자.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보너스로 원하는 악기를 장만할 수 있지만 예술을 하게 되면 아버지의 보너스를 써야 악기를 장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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