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도> 1일차 - 2
차를 타고 경주에 가면 늘 신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철로 위를 달리게 되면 빨리도 움직이는 기차 덕에 바깥 풍경을 잘 보지 못하지만, 도로를 달리게 되면 ‘경주로 진입하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세계(異世界)로 들어가는 기분. 높은 건물들과 우거진 나무숲은 창틀을 지나 사라지고 초록빛 평원과 고아한 기와가 눈 안에 살며시 와 닿는다. 그때 내가 느끼는 것은 도시에서 출발해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는 묘한 그리움과 안정감이 아니다. 머물던 현실의 공간에서 벗어나 과거와 아주 많이 닮은 모양의 새로운 공간으로 진입한다는 생경함이다. 나는 곧, 별들의 역사가 잠들어있는 우주에 닿은 우주 비행사의 얼굴이 된다.
어렸을 때 자주 읽은 역사 만화책에서는 청동방울이 울리면 주인공들이 역사 속 한 장면으로 타임워프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도대체 왜’ 특정 장면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는지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이끌리는 소용돌이를 멈출 순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소용돌이를 직접 만들어내는 셈이다. 청동방울 없이도, 시간을 초월하는 특별한 힘 없이도, 시간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이다. 씩씩한 항해사의 얼굴로, 천년의 시간을 품은 ‘신라’로 방향을 직접 맞추는 것이다.
도착한 시대에는, 근대와 현대가 직조한 도로와 낮은 건물들 사이로, 거대한 무덤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경주는 현실에 과거가, 과거에 현실이 얹혀있는 신비를 품고 있다. 천년의 과거와 공존하는 현재-라는 신비. 무덤의 크기만큼이나 웅장한 시간의 단위 앞에 나는 신을 만난 인간처럼 무력해지고, 숭고한 기분이 된다.
경주의 땅에서는 현실을 사는 사람들 옆으로 망자가 늘 함께한다. 망자가 잠들어있는 곳을 지나치며, 때로 그 옆을 서성이며, 산 자는 현실을 산다. 때로는 경주라는 도시가, 현실은 그렇게 늘 과거와 함께일 수밖에 없다는 진리의 거대한 은유같이 느껴진다. 네가 사는 현실은 누군가의 과거들이 뭉쳐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러니 엄숙한 표정으로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것이라고. 사실 경주는 신이 그걸 알려주려고 만든 도시가 아닐까, 엄한 생각이 든다.
그러면 나는 이제 버릇없는 상상을 하나 더 하는 것이다. 천년도 더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언젠가의 신라인들의 마음을 감히 떠올려보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이 늘 망자가 된 귀한 이의 무덤과 함께라는 것에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하고.
밥을 먹고, 대화를 하고, 길을 걷는 그 와중에, 그들의 일상은 무덤과 무덤 사이에 머물렀을 것이다. 과거 속을 헤쳐가며 또 현실을 살았을 것이다. 그럼 그들도 엄숙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현실을 정성 들여 닦아놓으려 애쓰는 마음이 되었을까.
그들의 현실마저 먼 과거가 되어버린 지금에 사는 우리들은, 그들에겐 ‘지금’이었던 시절마저 누워있는 무덤들과 같은 취급을 해버린다. ‘과거’라는 단어로 아주 쉽게 퉁쳐버린다. 그렇게 내내 묻혀있는 세월이라니. 지금이 먼 과거가 되어버릴 미래의 후손들 역시 우리들을 그렇게 묻어둘 것이다. 내가 정성 들여 갈고닦아놓은 내 마음의 밑바닥이나, 내가 애써 만든 일상과 생각들은 전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저 밑에 잠겨있는 모래 한 움큼 정도의 존재감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제 슬퍼지고, 역사가 된 선조들의 하루들을 마주하고 싶어진다. 다시 우주 비행사의 얼굴로, 항해사의 얼굴로, 나는 경주를 웃도는 과거의 시간대로 간다.
사실 경주에는 나의 과거, 더 정확히 말하면 나도 모르는 나의 과거가 함께 묻혀있다. 나의 뿌리가 거기 있다. 나는 통상 ‘광김’이라고도 하는 ‘광산 김씨’ 집안의 39대손이다. 이것이 내 원래의 가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