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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가계도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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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삼 Feb 24. 2024

가출

<가계도> 1일차 - 3

 광산 김씨의 시조는 ‘김흥광’으로 알려져 있다. 김흥광은 김알지의 후손인 신라 신무왕의 셋째 아들이다. 왕위 다툼으로 혼란했던 경주를 뒤로 하고 김우징(훗날 신무왕) 일가가 전남 담양에 은거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것이 광김의 시작이다. 이후 장보고와 손을 잡은 김우징이 신라로 돌아가 왕위를 차지하고 신무왕의 왕호를 얻었지만, 김흥광은 담양에 남았다. 아마, 왕좌에 앉았다 하더라도 언제 고꾸라질지 모르는 피바람의 시대에 후일을 대비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선택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신무왕은 6개월간의 아주 짧은 재위를 병을 얻어 끝냈고, 담양에 남은 김흥광의 세력은 이후 그들을 찾아온 ‘왕건’에 협력해 역사의 편에 서게 된다. 그 뒤로 광산 김씨 가문은 고려부터 조선까지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 가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으며 그 모든 시간을 등에 업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 이르고 있다. 

 왕위에 대한 김우징의 야망이 조금이라도 덜 했더라면, 김흥광이 담양에 남기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신무왕이 갑작스레 병을 얻지 않았더라면, 왕건이 김흥광을 찾지 않았더라면, 김흥광이 왕건의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신라 말기의 피 튀기는 왕위 쟁탈전에 가담하지 않고 김우징 일가가 조용히 살기를 선택했다면 선조들은 담양에 닿지도 않았을 것이다. 김흥광이 훗날을 도모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도 아버지를 따라 경주에 가겠다는 선택을 했다면 광김은 결코 가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신무왕이 오래 살아 담양에 있던 김흥광을 경주로 불러들이는 결정을 했다면 광김은 절대 기반을 다질 수 없었을 것이다. 김흥광의 가문과 왕건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앞에 광김은 신라의 불운한 잉여물 정도로만 남았을 것이다. 


 역사가 조금만 삐끗해도 ‘나’는 없다. 아주 약간만 달라져도 이 현실은 존재할 수 없다. 전 우주와 시간이 ‘나’를 만들기 위해 달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건방진 가정이 꼭 진실이기라도 한 것처럼. 선조들의 크고 작은 결정들이 역사를 만들고 현재를 만들었다.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면 이 모든 것에 ‘나’ 역시 포함되어 우리는 미래로 갈 것이다. 


 언젠가의 김흥광은 다시 경주로 돌아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옆의 피붙이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게감이 경주 방향으로 향하는 고개를 애써 돌려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가문을 선택했고 그 선택이 지금의 나에게 닿았다. 그의 일생이 차마 다 쓰지 못한 향수(鄕愁)는 지금 경주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만큼은 땅에 묻혀 잠든 것이 아니라 어떤 부유물의 형태가 되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그리고 이내 스스로가 우스워진다. 새 가계도를 찾겠다며 가출을 해놓고 선조들을 ‘뿌리’라 부르다니. 내 선조들이 따로 있다고 믿는 일, 겪어본 적 없는 시대에 지독한 향수를 느끼는 일. 그런 것들은 이제 지겨워하기로 했건만. 

 그렇다고 내게 ‘이’ 가계도는 필요하지 않은가?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누군가의 선택이 향수를 채 싣지도 못하고 만들어낸 어느 방대한 종이 낱장이 내게는 정녕 쓸모를 다하지 못하는가? 전부를 상상하게 만들고 자락을 쥐어주어 울게 만드는 어떤 것을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정말? 정말로? 




 그러나, 너와 닮은 사람들은 거기에 적히지 못했음을, 너와 같은 사람들은 거기에 오르지 못했음을. 기억만 해낸다면 너는 금새 그 종이를 구겨버리고 말 걸. 

 내 또 다른 뿌리가 어디에선가 나를 비웃는다. 


 다시 가출에 집중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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