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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가계도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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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삼 Mar 19. 2024

칼과 방패와 눈물

<가계도> 2부 - 16

< 변론가형 사람은 일명 선의의 비판자입니다.> 


 아니오. 


 …그래, 말이 많긴 하다. 무척이나. 여길 혼자 와서도 죽은 고모와 대화하고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 주인에게 기어코 말을 걸 정도로. 

 사실은 일방적으로 쏟아내고 아무에게나 공감을 바라는 습관이다. 그리고는 이해받지 못했다며, 아무도 나를 모른다며, 나는 혼자라며, 나는 외롭다며 우울해하는 뒤끝이 씁쓸한 일. 비틀즈 LP판에 눈물 짓는 아침이 나의 고독이라며 티 내고 싶어 안달내는 일. 


 그리고 가끔은 이기는 게 너무 중요한 일. 말싸움은 내가 끝내야 이기는 거라 믿는 어린애의 귀여운 심보 같은 수준은 아니다. 말에 대항해 말로 이기려고 아득바득 이를 갈고 툭 튀어나올 것 같은 눈알을 정제한 뒤에, 침을 뱉어버리고 싶은 심정을 세 번 정도 꿀꺽 삼킨 뒤에, 이빨 사이로는 침 아닌 말만 뱉어야 해서 어려운 일.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어른이 내게 여자는 치마를 입어야 예쁜데 너는 왜 치마를 입지 않느냐는 헛소리를 하면, ‘그렇게 예쁘면 직접 입으시라’고 대꾸하는 일. 말은 내게 전장을 위한 갑옷이고 칼이고 방패다. 누군가를 선의를 갖고 비판한 적 없다. 선의는, 내게 싸움을 걸어온 사람들 중 아무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말은 또 대부분 무서운 일. 

 스물한 살, 청소년기 내내 내 플레이리스트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테일러 스위프트’가 ‘할리우드 일진’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던 때였다. 10여 년을 하고 있던 오해가 무너지는 순간은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울어버린 순간과 함께 찾아왔다. 유튜브에는 그녀를 두고 애인이 매번 바뀌고 그도 모자라 친구도 매번 바뀌는 드센 여자라 소개하며 조회수를 벌어가는 채널들이 많았다. 테일러 스위프트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할리우드 일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그 싸고 간편한 말에 나는 무언가를 더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그 말을 믿어버리는 선택을 했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에서는 그가 그를 둘러싼 미소지닉한 말들에 늘 고통받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갖고 있는 것들로 있는 힘껏 목소리를 내는 선택을 하며, 그렇게 시대를 견뎌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를 죽여간 말들에 나 역시 한술을 보탠 것이 너무 부끄러워서, 그리고 그녀가 기어코 해내는 부활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벅차는 마음이 동시에 쏟아져 나오면서,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말하기를 좋아한 역사는 오래되었다. 꽤나 먼 과거의 장면에서도 말이 많은 나를 확인할 수 있다. 

 초등학교 1학년 수업시간에, 1살부터 8살까지의 얼마 안 되는 일대기를 A4 용지에 표현하라는 과제가 주어진 적이 있다. 나는 전날 집에서 챙겨 온 8장의 사진들을 자르고 붙인 다음 그 사진들을 설명하는 식으로 종이를 꾸며냈다. 몰입하던 아이들이 하나 둘 종이를 완성하며 만드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담임 선생님이 곧 중심을 잡았다. 나는 선생님이 말씀하는 와중에도 옆자리 친구와 속삭이며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 그래서 발표해 볼 사람?” 하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나는 순간적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어? 내 손이 왜 이러지?’하는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선생님이 나를 교실 앞으로 불러내는 대로 여러 책상을 가로질러 걷는 순간들이 프레임 단위로 기억난다. 

 나는 눈치껏 완성한 종이를 들고나가 친구들 앞에 섰다. “저는 이렇게 해봤는데요.” 하고 입을 열기 직전까지 이걸 발표하라는 말이 맞나 싶어 약간은 초조하기도 했다. 그래놓고 발표가 시작되는 순간 나는 흠뻑 빠져들어 헤엄치는 기분이 되었다. 무엇에 그랬던 건지도 모르는 채 나는 몰입했고, 무척 행복했다. 이것이 내가 ‘말’을 사랑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첫 순간이다. 


 나는 아직 말을 하고 싶다. 말은 이해받지 못하거나 싸울 때 필요한 것이 다인데도 말을 하고 싶다. 계속 싸워 승리를 만들고 싶기도 하고, 내 마음을 아무리 말해줘도 너는 끝까지 몰라, 치사한 태도로 일그러져 있는 다소 애절한 부탁이기도 하다. 나는 아직 말을 하고 싶다.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데도. 테일러 스위프트를 오해한 세월을 다 기억하는데도. 


 나는 내가 딛고 설 뿌리를 찾아서 여기에 왔다. 제삿상과, 검은 양복과, 갈색 목기를 닦는 내 손과, 부산에서의 두 밤, 그러니까 그 모두와 저주와 분노로 얼룩진 가계도가 아닌 새 가계도를 찾아야겠어서 여기에 왔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모두 필연이었다고 믿고 싶다. 막연한 후회로 짙어지는 창백을 굴곡에서 벗어나는 발길질로 삼고 싶다. 

 의연한 준비를 해두겠다는 다짐은 거짓이다. 그러나 나에겐 말이 필요하다. 질문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손을 번쩍 들어 답을 하겠다고 표시하는 어리석은 마음처럼. 나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나는 뭐라도 쏟아내야겠다. 내 가계도가 얼마나 수렁이었는지 당신을 붙잡고 말을 해야겠다. 새 가계도를 찾는 여정을 당신의 손에도 붙들려 줘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고 말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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