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도> 2부 - 15
진창이다가 다시 웃어야 하는 훈련을 매일 거쳐온 사람답게 나는 다시 걷는다. 그러나 상처를 술 한 잔에 섞어 마실 전우가 없어 외롭다. 나는 혼자다. 나만을 목격하고 나만을 전부 쓸 수 있는 혼자. 그리하여 충실한 기록자. 외롭고 충만한 혼자. 걷다가 쓰다가 걷는 혼자.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 주인이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한 지 오래다. 오래된 절망만이 나를 따라붙는다.
내 고모와 고조할머니 하나는 죽은 지 오래다. 그리고 살아 있는 고조할머니들은 이 땅에 없다. 이 땅에 나만이 있고, 나는 혼자 걷는 중이다. 나는 나에게 말을 붙여보려는 시도에 매번 실패한다. 백 년 전 죽은 고모와 자화상 하나를 내게 유산으로 남기고 간 고조할머니에게 편지를 부치는 것이 더 쉬울 정도.
젊음은 이다지도 허름하다.
애초에 내가 무엇 때문에 가출을 결심했던가. 새 가계도를 찾으려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그냥-이라는 답은 믿지 않는다. 그래, 나는 새 뿌리를 찾는 걸 외에는 자아를 찾을 방법을 몰라서 여기에 왔다. 이유의 4할이 내 오래된 저주라면, 제사상과 그 파편이라면, 그러니까 분노라면. 나머지는. 나머지는 다 무어란 말인가.
나머지. 나머지.
…
나머지.
분노 말고,
내 나머지.
… 분노 말고.
그 어느 날부터, 모든 게 분노로만 설명이 되던 그날부터, 제사상과, 검은 양복과, 갈색 목기를 닦는 내 손과, 부산에서의 두 밤이, 모든 것들이 물 밀려오듯 자각이 된 그날부터, 그러니까 분노. 그 모두에 대한 내 오래된 저주를 빼면, 그게 없으면 나는 뭐지. 분노가 아니라도, 나는 뭐지. 전장을 누비는 전사가 아니면, 나는 뭐지.
나는 그 답을 찾아야 하는데.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지. 그 하나를 못 정하고 헤매는 게 쪽팔렸던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뭐고 싫어하는 건 뭔지, 그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시기. 그 시기는 내 분노 다음으로 나를 찾아왔다가, 아니, 내가 전사인 것과는 상관없다가, 아니, 가끔은 둘이 뒤섞여있다가.
…
나는 여전히 그렇다. 나는 여전히 그 지경이다. 파도는 여러 개가 아닌 적이 더 드물다. 겪어보니 사람이 어떤 시간을 통과하는 중에는 이 무아가 언제부터 시작이었는지를 너무 쉽게 잊게 되는 것 같다. 나 너무 힘들어, 나 너무 고통스러워, 하는 감각만 남고 돌파구를 찾아볼 생각과 수렁에 빠지게 된 이유를 원망(怨望)할 기력은 없다. 모든 게 억울한데 체념은 쉽다. ‘언제부터’를 원망(願望)하기는 이미 늦었다.
대학 하나가 목표인 인생이 길었다. 그리고 입시가 끝나고 스무 살에 내던져지면서부터 이 진창은 시작되었다. 솔직히 난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 학창 시절 내내 20대를 상상해 왔지만 이런 건 내 계획에 없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래, 아니래 아프면 환자래, 누가 청춘이래 확 씨… 그런 논쟁 아닌 논쟁들은 내겐 그저 소음이었던 긴 세월. 청춘이 늘 가난하고 배고프고 고단하든 말든, 그걸 기만하는 누군가에 청춘들이 단체로 화를 내든 말든, 나에게 청춘은 아직 멀었다. 무엇보다, 여느 오만한 청소년이 그렇듯 내 청춘은 또 다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이 토론하는 청춘에는 내 몫이 없다고, 내 청춘은 남들과는 다르게 특별하고 귀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스무 살에 도착하고 무작정 걸은 다음 돌아보니 나는 무엇을 이루었던가.
·대학교 입학.
·친구들 20명 정도와 지인 15명쯤.
·얼마 전 쪽지 시험 90점
·설문조사 참여해서 얻은 스타벅스 기프티콘 하나.
…
…
…
젊음이 이렇게 허름한 줄 알았다면 가지려고 하지 않았을 거다. 고작 여기에 닿으려고 잠에 들었던 하루들이 무색해진다.
TV의 연예인들은 목표를 이루고 난 다음의 허망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가난하고 지난한 시절을 뚫고 커리어의 정점을 찍고 나니 모든 게 나른하더라는 이야기. 그 공허가 참 견디기 힘들더라는 이야기. 누군가의 상실감에 대해 내가 감히 말을 얹을 자격은 없지만 사실 나는 그것마저도 부러워 어쩔 줄을 몰랐었다. 목표를 이루는 것만 생각했지 그다음 단계를 제대로 그려본 적 없었던 나는, 당장의 성취에만 초점을 맞춘 채 그 반짝거리고 초라한 사람들을 가득 선망하고만 있었다.
지금의 내가 느끼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던 감정과 닮았다. 그들에겐 내게 없는 돈이 X나게 많지만.
이다음이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는 공포.
남들 앞에 의연한 표정을 지어낼 순 있어도 당황한 기색을 스스로에게 숨기는 것은 어렵다. 나는 다급해진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출발하면 될 것이다. 리스트를 만들어보기로 한다.
> 좋아하는 것
· 햄버거
· 영상 편집
> 싫어하는 것
· 너무 길어지는 영상 편집
· 과한 참견
· 가지나물
X 됐다. 이래선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결정할 힌트들을 줍기란 불가능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과거마저도 흐려진다. 스물에 닿기 전의 내가 어땠는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분노 전의 내가 그려지지 않는다. 그때의 나는 책에 낙서하길 좋아했던가? 매일 갖고 다니던 플래너 쓰기를 사실은 귀찮아했던가? 틈이 날 때마다 읽던 책의 제목은 뭐였지? 파도를 만난 모래성마냥 내가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 아니, 애초에 모래로라도 뭉쳐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하도 ‘대학에 가면’으로 시작하는 말들을 듣고 자라서 그런지 지금 내 20대는 청소년기와는 아무런 연속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시대. 0에서부터 시작해 내 손으로 내가 일구고 내가 가꿔야 하는 시절. 그런데 무슨 씨앗을 심으면 좋을지 어떤 꽃을 피우고 싶은지, 그런 양분들이 전혀 없는 채로 무작정 시작되어버리고 말았다. 기껏 잡은 터가 황폐할 수밖에 없는 조건.
언젠가 K 선배와 4시간 가까이 통화한 적이 있다. 선배가 추천해 줬던 영화가 내 마음에 쏙 들었다는 얘기를 하며 영화의 어떤 장면이 좋았는지, 두 주인공이 왜 이어질 수 없었는지, 또 이어지지 않은 것이 좋았던 이유는 뭔지, 그런 말들을 한참 주고받았다. 그리고 조연 캐릭터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우리의 의견이 달랐다. 좋았다.
영화 얘기가 끝난 후 나는 선배에게 나를 잘 모르겠어요-하는 처음엔 불쌍하다가 나중엔 질리고야 마는 고민을 꺼내놓았다. 10대의 나와 20대의 나 사이에 연속성이 전혀 느껴지질 않고, 10대의 나는 자꾸 ‘걔’처럼 느껴진다고. 그래서 ‘나’를 떠올릴 때 나는 늘 2살이고, 너무 많은 것을 모르겠다고. ‘걔’가 자꾸 불쌍하다고. 꼴랑 ‘나’에 닿겠다고 열심히 달려온 건가 싶다고. 나는 우울을 뱉었다.
mbti 검사를 해봤다.
논쟁에서 이기는 걸 좋아한댄다.
…오, 맞는 거 같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물러나 있기를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이랜다.
… 이거 나인 것 같다.
가족이나 친구가 하는 말에 조목조목 따져서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댄다.
… 맞다. 이거 나다.
대충 이런 패턴을 반복하며 사이트에 나와 있는 내용을 정독하고 각종 SNS에서 변형해 분석한 내용들도 훑고 나니 나는 이제 더 이상 내가 누군지 몰라 떠도는 사람이 아니었다. 말할 거리가 있었다.
…
그런데 그 만족감이 오래갈 수 있었겠는가. 고작 알파벳 네 개가 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심리학자들도 더 이상 쓰지 않는다는 검사지를 붙들고 무엇을 더 할 수 있었겠는가.
굶주림이 심해져도 상한 음식을 먹었다가 체하고 싶지는 않은 것처럼, 나는 몇몇 문장만을 가지고 지도를 만들기는 싫다. 나는 햄버거와 영상 편집 말고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더 찾아야 하고, 과한 참견을 싫어하게 된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러니 나의 울며 걸음은 이제 약간 방향을 튼다.
그래야겠다.
나는 지금, 맞고, 틀리고, 아직은 잘 모르겠는 답들을 잔뜩 만들어보아야겠다. 그렇게 메모장을 엉망으로 놀려먹어야겠다. 막막하다는 감상만 손에 쥐고 세상을 탓하느라 퍼질러 앉아 있던 시간들을 돌이켜보아야겠다. 알파벳 몇 음절로 내가 누구인지를 이리도 편리하게 정해주는 세상에 반기를 들어야겠다. 그래야겠다.
어쩌면 조금만 돌아봐도 금방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내 목에는 티 나게 큰 점 세 개가 박혀있는데 내가 그걸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걸 두고 왜 점을 빼지 않냐고 묻거나 점이 따라 크지 않아 다행이라는 감상을 남기는데, 내가 그걸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사실도 같이 떠올려보는 것이다. 나는 이 점들이 늘 자랑스러웠고, 별자리처럼 생긴 이 점들이 내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의미의 독특한 표식 같아서 아주 사랑스러웠다는 사실을. 그렇게 나는 내 목의 점을 태초부터 지금까지 홀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하나의 점을 두고 양쪽으로 펼쳐지는 직선과 같음을. 단지 그뿐임을. 그러니 앞으로의 문답(問答)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미리 되뇌며, 나는 이제 몸을 오른쪽으로 약간 튼 채여야겠다. 팔을 뻗은 뒤 사랑스러운 목을 더듬어 점들을 확인하고, 앞을 향해 걸어보아야겠다. 별들을 보고 여정을 헤쳐나가는 사람들처럼 전진.
…
카페에 앉아 글자들을 하나하나 뜯어본다.
그리고 드라마 속 미실의 여느 대사처럼.
나는 화면을 노려보고 말한다.
네가 뭘 알아….
… 조금 씩씩거리다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힌다.
내가 A로 설명될 수 있다는 말에 대고, A는 무엇이고 A’는 무엇이며, a는 무엇인지까지 생각해 본다. 곧 내가 나를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구름처럼 시야를 막고 있던 지난 시간들은 한순간에 증발하게 되겠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절망하는지가 아주 쉽게 드러나겠지.
A와 A’와 a와 관련된 경험과 추억과 슬픔을 줄줄이 꺼내놓는다. 때로 B를 이야기하느라 잠시 다른 길로 새는 일을 반복한다. 그러면서 나는 수많은 가지들이 내 안에서 뻗아나가 있었음을 확인하고 안도할 것이며 동시에 뿌리로 향하기 위해 애를 쓰겠지. 겨울을 기다리는 계절에 분노가 아닌 나머지를 찾겠다는 여정은 그런 얼굴이겠지. 그렇겠지.
나머지.
나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