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도> 2일차 - 14
마침내 마주한 본존불상 앞에서. 나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보다 전생의 부모를 더 사랑한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오랜 세월 한 곳만 응시한 채 앉아있는 흰 빛의 불상. 나는 순간 압도되어 기도하는 것을 잊을 뻔했다. 앞줄의 사람들이 빠져나가며 시야가 바뀔 때가 돼서야 정신이 들었다.
내 기도는 말로 유려하게 흘러나오지 않았다. 내 속에 고이고 고인 말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준비를 하는 것처럼 엉거주춤하게 닫아놓은 문 앞에 바짝 다가와있을 뿐이었다. 오래된 소망이 단어 몇 개로 둥둥 떠다니고 있는 와중에 그 총체를 설명하기가 당최 힘들었다. 모욕, 세월, 사랑, 다음, 힘….
들리시죠?
그냥 그렇게 내 위쪽을 응시하는 눈빛에 미뤄두고 싶을 정도로 설명이 쉽지 않았다. 나는 꽤 오래 손을 맞대고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 사방이 조용해지고, 이내 닫지 않은 문 틈 사이로 말들이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나왔다.
묵은 세월이 멸망하게 해 주세요. 더 이상 ‘그런’ 모욕이 없는 세상에 살게 해 주세요. 나와 내 어제의 동행이었던 그녀의 모든 여행이 굳이 고되어야 한다면 일정이 빠듯하다는 이유만 남아있게 해 주세요. 내 몸은 내가 말하게 해 주세요. 진짜 삶을 가진 생명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다 깨닫게 해 주세요. 변화를 눈 감는 일에 맞설 힘을 주세요. 내가 여자애라는 사실이 티가 나지 않는 세상이 오게 해 주세요. 이다지도 많은 굴레 앞에 감히 보편을 떠드는 사람에게 사랑만이 답이 될 수 있다 말할 수 있는 배짱을 주세요. 내 몸을 기어 다니는 검은색들을 모두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오염되지 않은 새 단어들과 모두가 똑같이 버튼을 누르는 미래를 주세요. 내가 전사이지 않은 세상을 주세요. 만약 내가 전사여야 한다면, 내 전쟁이 우습지 않은 일이 되어 있는 다음을 주세요.
세상이 사랑으로 움직이게 해 주세요.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절망하기보다 다음을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세요. 들리시나요….
기도를 마치고 내려가는 길. 맞은편에서 공룡 피규어를 손에 쥔 여자아이가 올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그 아이가 ‘여자아이’인 줄 알았던 것은 그 애의 치마와 머리핀 때문이었지만, 그러니까, 세상이 완전히 내 뜻대로는 아니었지만, 그 공룡 피규어가 내게 말했다. 다음은 오고 있다고.
우리는 그대로 교차해 지나쳤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벌써 기도가 거기 닿았던가요.
그러자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전부터 그랬단다.
나는 당황하지도 않고, 어찌 공룡 피규어의 몸에 담겨 저를 찾으실 생각을 하셨나요, 물었으며, 그곳이 아니라는 듯 가슴께가 잠시 욱신거리다 말았다.
나는 다시 버스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왔다. 나뭇가지 사이로 눈물이 났던 풍경을 지나고, 파이프 도난 사고 목격자를 찾는 전단지를 지나고, 고랭지 계단식의 작은 논 몇 개와 비닐하우스를 지났다. 이제 버스에서 내려 땅에 발이 닿았고, 나는 다시 길을 걸어야 했다. 울다가도, 걸어야 했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