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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가계도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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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삼 Mar 11. 2024

니체의 여자는 암소다

<가계도> 2일차 - 13

 내가 나간 전장은 더 있다. 이번엔 숨어서 벌벌 떨기만 해 놓고 살아남았다는 하나를 훈장 삼아 회고하는 전쟁이 아니라, 승패를 알 수 없어 회고하기조차 버거운 싸움들이다. 지고 나서 설분하는 낡은 자존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확실한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개 괴롭다. 

 상관없이 씬 넘버는 매일 쓰인다. 


#5. 

 밤 9시 35분경, 맥주캔이 우리 주변으로 4개 정도가 퍼져 있다. 나는 취하지 않았고 너는 취한 듯 보인다. 우리는 각자 여기에 온 이유를 말하는 중이었다. 젠더 문제를 공부하고 싶어서 왔어! 약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거야! 나는 아주 푸른 대답을 내놓는다. 너는 이제 잔뜩 꼬부라진 발음으로 페미니즘은 이대로 망할 거라고 훈수를 둔다. 너도 n명의 여자가 있으면 n개의 페미니즘이 있다는 말을 너의 기준으로 삼느냐고 묻는다. 규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로 통합된 강령이 있어야 한다고. 이 여자는 이 말을 하고 저 여자는 저 말을 하면 세상은 아무것도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너는 남자다.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정말 그게 맞는지를 고민한다. 지금껏 인류가 일으켜 온 변혁의 운동의 역사를 생각한다. 강력한 단결과 하나의 일치된 의견으로 세상에 고함을 지르는 남자들과 그것이 마침내 받아들여진 순간을 기억한다. 내부에서 터져오는 고름은, 파도가 오는데 조개를 줍는 게 말이 되냐는 말이 바람처럼 불어와 가려지던 역사를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강요된 하나는 폭력이라고 대충 둘러대고 맥주캔에 입을 갖다 대기를 선택한다. 

 이것은 나의 승리가 아니다. 


 나는 다시 그 술자리로 돌아가고 싶다. 너는 입을 금방 닫았지만, 그것은 더 싸워봤자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너의 취한 무의식이 네 입에 내린 명령이었지, 내 말을 이해해서가 아니다. 그러니 이것은 나의 승리가 아니다. 나의 승리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 술자리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야 한다. 


… 우아한 표정으로 우아한 손짓으로 노트를 펼치는 상상을 해야 한다. 

 “재현해야 한다는 페미니즘 스스로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가부장제에 대한 어떤 보편적 위상을 세워야 한다는 급박한 요구는 종종 지배구조의 범주적이거나 허구적인 보편성을 손쉬운 지름길로 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피지배 경험이라는 여성의 공통성을 만들었다. 90쪽.”

 나는 스르륵 다음 장을 넘긴다.

 “나는 페미니즘 주체에 전제된 보편성과 통일성이, 주체가 작동되는 담론의 구속력 때문에 상당히 훼손되었다고 주장하려 한다. 91쪽” 

 평온한 톤과 눈빛을 잃지 않은 채, 나는 다음 장을 넘긴다. 너는 취기가 가시고 있다. 

 “페미니즘 비평은 남성적 의미화 경제의 전체화된 주장도 탐구해야 하지만, 페미니즘 자체의 전체화 동향에 대해서도 자기비판적이어야 한다. 적을 단일한 형태로 규명하려는 노력은, 일군의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대신 억압자의 전략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하는 하나의 역담론(reverse-discourse)이다. 109쪽 끝부분에서 시작해서 110쪽 첫 문장으로 끝남.”

 지금 뭐 하는 거냐는 너의 물음에도, 나는 묵묵히 다음 장을 넘긴다. 너의 취기는 완전히 너를 떠났다. 

 “분명히 말하건대, 연합정치의 가치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되지만, 연합이라는 바로 그 형식, 새롭게 생겨나는 예측 불가능한 입장들의 조합이라는 그 형식은 미리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연합 형성을 자극하는 분명한 민주적 충동에도 불구하고, 연합론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를 그 과정의 권위자로 세울 수 있다. 미리 연합구조의 이상적 방식을 주장함으로써, 즉 그 결과 효과적으로 통일성을 보장하게 될 어떤 것을 주장함으로써 말이다. 111쪽.”

 “ ‘통일성’은 효과적인 정치 행동에 꼭 필요한 것인가? 통일성이라는 목표에 대한 성급한 고집이 훨씬 더 심각한 위계 간의 파편화를 가져오는 바로 그 원인은 아닌가?”

 나는 잠깐 숨을 들이쉬고 이어서 말한다. 너는 테이블의 생긴 모양새를 관찰하는 척하고 있다. 

 “항상 개념적 층위에서 제도화되는 ‘통일성’의 전제나 목표가 없다면, 일시적인 통일성은 정체성의 명확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구체적 행동들의 맥락에서 등장하게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의 행동은 안정되고 통일되고 합의된 정체성으로부터 설정되어야 한다는 강압적 기대만 없다면, 이러한 행동들은 더 빨리 출발할 것이고, 여성이라는 범주의 의미가 영원히 고정되지 않는 수많은 ‘여성들’에게도 더 적합한 것이 될 것이다. 113쪽.”

 “보편 범주로서의 ‘여성’이 없다고 정치적 실천 주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본질적’ 의미의 보편성이 없다고 의미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성은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우연적 토대 위에서 잠정적 일시성으로 소환되었다가 다시 흩어진다. 보편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각 특수성이 경합하는 ‘구성된 보편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옮긴 이 해제 중에서….”

 … 노트를 덮고 난 다음 나는 너의 눈을 가만히 응시한다. 15초 간 바라보았다가 가방에 노트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맥주캔에 입을 갖다 댄다. 너는 아무 말을 더 하지 않는다. 술자리는 어색하게 끝이 난다. 맥주는 그날 밤바람만큼이나 시원하다. 


#6.

 오전 9시 55분경, 나는 잔뜩 화가 나 있다. 그러나 이 화의 이유인 사람에게는 그 자리에서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나는 잘못한 것 하나 없는 메모장에게 씩씩거리며 화를 푼다.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목사고 교수인 그는 성폭력 위험군에 목사가 있으니 나에게서 2미터 정도 떨어지라 말했다. 그러면서 웃었다. 강의실에 앉아있던 몇 명도 이 불쾌한 농담에 같이 웃었다. 끈적끈적한 검은색 덩어리가 내 몸을 한참 기어 다녔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의 남성중심적 배타주의를 얘기한 뒤였고 목회자 윤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이게 우습니? 그 많은 사람들은 위험하데도 불구하고 가까이 다가가서 피해자가 되어버린 거니? 그래서 그들이 잘못한 거니? 당신이 방금 그렇게 만들었어. 이게 농담조로 해석될 수 있는 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게 힘들다. 또 기운이 빠진다. 제일 씩씩한 날이 되고 싶었는데.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나는 4개월 정도를 더 기다렸다가 이 말을 다시 수강평가 칸에 쓴다. 내 움직이는 손가락들은 결의에 차 있으며 하나 둘 차오르는 화면 속 글자들을 따라 내 동공은 오른쪽으로 그리고 또 아래로 움직인다. 이것은 나만의 전투다. 무언가 바뀔 거라는 기대를 했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만약 그런 기대를 했었다면 나는 그때의 내가 불쌍하다. 그가 반성을 했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패배를 인정했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말, 나만의 전투였던 것이다. 

 어쩌면. 

 …

 어쩌면 나의 패배다. 

 들고일어나지 못한 나의 패배. 그러므로 이것 또한 나의 승리가 아니다. 


#7.

 낮 4시경. 나는 그를 ‘형’으로 부르는 것을 중단하기로 마음먹는다. 매상 선배라 불렀던 그가 어느 날 자신을 형이라 부르라 했다. 선배라는 호칭이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오빠라는 호칭은 네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다는 이유로.

 ‘오빠~’하며 아양 떠는 여성성을 벗긴 여자는 남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여자는 아양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존재가 된다. 나는 기분이 잡치고 형이라는 단어를 지운다. 다시 그를 선배라 부른다. 


#8.

 오후 1시 44분,  나는 1월의 운세를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켠다. 태어난 연월시를 차례대로 체크하고 결과를 확인한다. 여러 과목을 번갈아 공부하라는 말이 나오고, 노력 끝에 취업에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난다는 말이 나온다. 애정운이 상당히 순조롭게 흘러가는 시기라는 말이 나온다. 아, 그런데 성별 체크를 해 두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남성을 여성으로 바꾸고 다시 확인한다. 애정운 이야기는 ‘여성스러운 매력이 잘 드러나는 시기이기 때문에 주변의 이성으로부터 호감을 받을 수 있다’는 말로 바뀌어 있다. 애정운이 순조롭다는 말만으로도 전할 수 있던 의미들은 두 번씩이나 뭉개져있다. 

 애초에 왜 내가 이 바뀐 말을 마주해야 했던 건지를 생각해 본다. ‘기본형’ 남성을 여성으로 바꿔놓지 않아서다. 나는 기본형이 아니라서 나를 설명하려면 버튼을 몇 번씩 더 눌러야 한다. 우리가 평생 누르는 버튼의 횟수를 세어보면 균형은 절대로 맞지 않을 거다. 버튼을 누르고 체크 표시가 제대로 먹혔는지 다시 확인하는 일. 나는 이걸 인생의 매분매초마다 해. 내 엄지는 이제 경련을 해. 

 그리고 누군가는 버튼을 누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 주어진 선택지에 자신의 몫이 없음을 확인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나는 이제 운세를 믿지 않는다. 


#9. 

저녁 8시 13분경 깨달은 사실. 니체의 여자는 암소다. 세계는 깊고, 낮에 생각한 것보다 더 깊다는 천명을 듣고 싶어 나는 책을 펼친 참이었다.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자신의 내면에는 아직 혼돈이 있다. 슬프구나! 인간이 더 이상 별을 낳지 못하는 때가 오다니. 슬프구나!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경멸할 수 없는 더없이 경멸스러운 인간의 시대가 오다니. 보라! 그대들에게 최후의 인간을 보여주겠다. “사랑이 무엇인가? 창조가 무엇인가? 동경이 무엇인가? 별이 무엇인가?”-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묻고서 눈을 껌벅인다.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노트를 펼쳐 이 문장을 옮겨 적는다. 그러나 이내 내 뜨거워지는 가슴은 니체에겐 그저 젖가슴일 뿐이라는 사실을 마주한다. 니체가 말한다. 아, 내가 어두운 밤이라면! 빛의 젖을 얼마나 빨려고 할까. 니체가 또 말한다. 대지에는 여자의 가슴처럼 유용한 동시에 기분을 즐겁게 하는 것이 적지 않다. 니체가 그렇게 내 몸을 떠든다. 

 니체가 여자 노파를 등장시킨다. 노파는 니체가 여자에 대해서 말해주길 기다려왔다고 말한다. 니체가 부르던 ‘그대들 인간들이여’에는 내 자리가 없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내 뜨거워진 ‘젖가슴’은 이내 식어버린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계속 말한다. 여자의 모든 것이 수수께끼이고, 그 모든 것엔 하나의 해결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임신이라고. 남자는 전투를 하도록, 여자는 전사의 피로를 풀도록 교육을 받아야 하며, 다른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내가 해 온 전투는, 당신 니체하고 싸우려 드는 모든 시도는 처음부터 성립 불가한 것이 되어버린다. 

 나는 니체가 유일하게 청혼했던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다. 거절당한 니체의 상심이 컸다는 해설을 읽는다. 그리고 다시 눈을 책으로 돌린다. 니체는 말한다. 뻔뻔한 여자인 삶은 이렇게 말한다고 설명한다-“그대는 나를 사랑하나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지금은 그대에게 내줄 시간이 없어요.” 청혼을 거절당했을 때의 대사를 여기다 숨겨두고 ‘뻔뻔한’ 여자에 대해 정의하는 찌질한 남자를 떠올려본다. 그래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주먹을 꽉 쥐고 도착한 책의 마지막 장에서 두두와 줄라이카라는 이름이 나온다. 책의 마지막 미주, 62번 미주이기도 한 그 이름들의 의미를 따라가 본다. 

 ‘두두와 줄라이카는 니체가 쾰른의 유곽에서 만나게 된 소녀들이다.’ 

 무엇을 위해 이 많은 글자들을 헤쳐왔던 걸까. 

 사실 니체가 홀로 사악한 상관을 가진 이는 아니다. 니체든 누구든 세상이 세계문학, 고전문학, 죽기 전 필독 도서로 이름하는 것들은 다 이런 식이다. 나는 그 많은 글자들을 삼켜왔지만 얼마 안 가 토하고 만다. 그 모든 것들은 다 여자를 암소 취급한다. 

 그럴 때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나는 암소인가? 다른 암소들과는 다르다고 자위하는 약간 똑똑한 암소인가? 나는 모른 체하고, 남자들에게 고하는 남자의 말을, 지금은 내가 적어도 명목상  인간일 수 있는 세상에 산다는 이유로 적당히 골라내어 받아 적어야 한다. 남자들의 독서가 궁금해진다. 적어도 이런 혼란은 없겠지. 

 세계는 깊다. 낮에 생각한 것보다 더 깊다. 그러나 그 말을 한 남자마저 자신이 얼마나 얕은 세상을 보는지 알지 못했다. 누군가의 독서는 자위와 거름망을 바꿔 써 가며 진행되는 복잡한 과정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거기까지는 보지 못했다. 독서가 투쟁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나는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세상에 없어도 여전히 위대한 당신에게 싸움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당신은 이 싸움을 알지 못했다. 당신에게 나는 끝까지 전사가 아니므로.  내가 전사라는 사실을, 당신은 알지 못한 채로, 그런 채로 죽었다. 


애초에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는 싸움이 아닐까. 아무도 나를 전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가 시작한 싸움은 하나도 없다는 아이러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대에게 갑자기 규칙이 있어야 한다고 떠든 건 내가 아니고, 성희롱을 아무렇지 않게 강의실에 싸지르고 간 건 내가 아니고, 오빠라는 호칭을 더럽힌 것도 내가 아니고, 세상의 기준을 남자로 맞춰놓은 것도 내가 아니고, 여자를 암소라고 부른 건 내가 아니라 니체다. 그들이 내 평화에 침략했으니 나는 선제공격 같은 것은 처음부터 꿈꿀 수도 없다. 막아내는 것밖엔 할 수 없는 싸움. 그런 싸움에서 이기기까지 할 수가 있는 걸까. 이기지 못했다고 자멸하며, 나는 무슨 싸움을 하고 있는 걸까. 


  분노와 울적함이 서로의 몸에 뒤섞여 만든 기괴한 형상이 마음을 채워가고 있을 때. 

 기막힌 타이밍으로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는 지금 어디인지, 무얼 했는지, 밥은 먹었는지를 물었다. 나는 지금 석굴암에 왔고, 아까는 불국사에 다녀왔고 밥은 먹었다고 대답했다. 그 짧은 통화. 그 짧은 통화로 괴물은 금방 물러간다. 괴물은 그 짧은 통화로 무찔러졌고, 나에겐 비장한 기운만이 남는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고? 너는 묻지 말 것. 맥주를 마시든 입을 닥치든, 둘 중 하나를 할 것. 괴로움과 전장과 전투와 전사 얘기는 다 거짓이 아니냐고 감히 의심 말 것. 

 몇 전 몇 패 몇 승인지를 세고 사느라 피곤한 삶을 살다 보면 그 우울을 빨리 헤쳐 나오는 방법 같은 것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엄마와 내가 피부가 아니라도, 귀 모양이 아니라도 여전히 닮아있다는 것에 안도를 얻는 쪽을 특화시켰고. 그러니 너는 묻지 말 것. 

 잔뜩 싸워야지.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소원을 빌겠다는 순수를, 그 마음을 지켜야지. 엿같이 살다 보면 싸우다가도 소원을 비는 순수를 재빨리 만들 수 있는 종류의 강함이 내 것임을 느끼는 날이 온다. 엿같게도. 그러니 소원을 빌어보자. 영원히 소원을 빌겠다는 소원을. 계속 기도할 용기를 달라는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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