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가계도 11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일삼 Mar 09. 2024

전장들

<가계도> 2일차 - 11

 나설 수 없었던 수많은 전쟁들이 떠오른다. 누군가는 비열하다 욕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한심하다 눈물을 흘릴 것이 분명한 장면들이 내 속을 뒤집어 놓는다. 나는 그 누군가들이며, 괴로워하는 속이다. 

 나는 그 모든 전장에서 피를 흘려보지조차 못하고 땅을 파 숨죽이고 있었다. 


#1.

 저녁 일곱 시 반, 기숙사 남자 사감이 정독실 한가운데에 선다. 정독실 자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적힌 종이들이 그의 손에 뭉텅이로 잡혀 있다. 각자 담임에게 확인을 받은 그 사유서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적혀 있다. 누군가는 두통, 누군가는 공식적인 동아리 활동으로 인한 면제,  누군가는 감기 몸살, 누군가는 근육통, 누군가는 다시 두통…. 그리고 용납되지 않는 종이들이 몇 개 있다. 기숙사 남자 사감은 이제 그걸 큰소리로 외칠 참이다. 정독실 한가운데서, 100여 개의 머리통이 잔뜩 수그리고 있는 방의 한가운데서 외칠 참이다. 

 생리통은 원래 곧잘 받아들여지는 사유다. 아랫배 근육이 뭉치고 허리가 쑤시고 허벅지가 말을 듣지 않는데도 하루종일 걷고, 말하고, 필기를 하고, 발표를 하느라 저녁 시간에 문제집을 풀 분량의 에너지가 남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저녁 시간까지도 약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통증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기숙사 남자 사감은 화를 낸다. 내가 바보인 줄 아냐고 화를 낸다. 한 달에 두 번 생리통이 사유인 놈들이 있는 게 말이 되냐고 화를 낸다. 생리통을 2주 전에 사유로 적어놓고 오늘 또 그걸 사유로 적어 들고 오는 너희들이 멍청한 건지, 나를 멍청이로 아는 건지, 아니면 니들이 새로운 사유를 적어낼 상상력조차 없는 놈들인 건지 모르겠다며 화를 낸다. 담임은 바빠서 그냥 넘길지 몰라도 도 내 망을 피할 수는 없을 거라며 거들먹거린다. 100여 개의 머리통은 정독실 책상을, 나무로 태어나 고작 이런 곳에 쓰일 책상으로 생을 끝낸 무언가들을 보고만 있다. 그 머리통 중 하나였던 나는 고함치는 기숙사 남자 사감의 옆모습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다. 그 자태는 아주 당당하다. 허리는 반듯하고 시선은 명확하다. 나는 그때 한 달에 한 번, 규칙적인 생리를 하는 열여덟이었고 다른 생리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열여덟이었다. 그러나 2주 전에도 오늘도 생리통을 자습 면제 사유로 쓴 여자애들이 치밀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할지 정하지 못해 오히려 그 안이 공백인 상태. 그러나 기숙사 남자 사감이 예리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생리를 떠드는 그 입이 불쾌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입시를 잘 치러내라는 사명을 부여받고 매일매일 한 명이라도 더 남을 밟아야 하는 또 다른 의미의 전쟁터를 살아낸 열아홉을 지나온 나, 그 전쟁터에서 몸을 ‘생존 모드’로 돌리느라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소중해져서 한 달에 한 번씩도 생리를 하지 않았던 나, 수능이 끝난 뒤에야 다시 피를 흘리게 된 지금의 내가 다시 그 정독실에 가 있다. 나 몇 개월 째 생리를 안 하고 있다는 말을 친구에게 하면, 그 친구가 나는 그러다가 한 달에 두세 번 한 적도 있다고 말하는 대화를 지나온 내가 다시 그 정독실에 서 있다. 나는 기숙사 남자 사감의 옆모습이 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다. 나는 한 달에 두 번 생리통을 자습 면제 사유서에 써넣은 그 여자애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다. 곧 소리를 지를 참이다. 생리 주기는 달이 차오르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말이 울음을 뚫고 나오느라 잔뜩 볼품없이 흔들린다. 그러나 고개를 처박고 있는 100여 개의 머리통이 만들어내고 있는 침묵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으므로, 그 침묵을 실제로 만들어낸 정독실 한가운데 서 있는 누군가의 권위란 실로 단단한 것이었으므로, 감히 반기를 들며 울고 있는 머리통 하나는 너무나 티가 나는 것일 테다. 28일이 월경 주기인 여성은 30퍼센트뿐이며 나머지 3분의 2는 23~35일로 다양하다고 합니다.”-라고 우아하게 받아칠 자신이 없는 나는, 2012년 8월 19일 일요일 잠에서 깨 화장실로 가 변기에 앉은 다음 목격한 피를 매달 다시 만나야 하는 일과 생리대를 들고 화장실에 가는 내 모습이 목격되는 것은 수치라고 배워서 따로 주머니를 만들어 다닌 일과 말해져서는 안 되는 금기를 내 몸에 품고 살아서 같은 것을 품고 사는 친구들과도 몸에 대해 솔직한 말을 주고받아본 적이 없는 일을 겪어본 적 없다면 입 닥치라고 소리를 지른다. 기숙사 남자 사감의 표정이 그려지지는 않는다. 어차피 그 장면은 뒤늦은 설분이다.


#2.

 낮 15시 40분경,  임신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묻는 설문지가 교실 안을 돌아다닌다. 나는 얼마 전 낙태죄 폐지의 찬성과 반대를 주제로 한 토론대회 결승전을 마친 상태다. 제비 뽑기에서 반대를 뽑은 내 손을 원망하며 지내길 며칠 반복한 상태이며, 토론 결과와 별개로 내 입장을 다시 전교생이 보는 앞에 해명하고 싶어 밤마다 꿈을 꾸길 반복한 상태이며,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 낙태 순간의 태아를 촬영했다는 동영상을 보며 마음을 다잡자는 어리석고 어린 결심이 실행에 옮겨졌던, 여자애들 셋이 모인 기숙사 방 안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어 뭐라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 간헐적으로 나를 찾아와 괴로운 상태이다. 나는 그 동영상을 보고도, 삶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에 이입해 실제 삶이 괴로운 한 인간을 기어코 괴롭게 만들자는 주장을 펼치는 데에 일말의 감정적 도움을 얻지 못했다. 나는 다만 꾹 참았을 뿐이다. 그냥 꾹 참고, 생명의 위대함을, 생명이라는 씨앗은 아름다운 꽃이 될 운명을 품고 있는 세상 가장 가치로운 것이라는 가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설문지가 돌아다닌다. 토론대회에서는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는 팀이 이겼어도, 생명의 위대함을 찬양한 내 마지막 변론은 인기를 얻어 회자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낳겠다는 대답을 고른다. 부모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아 낳겠다고 답한다. 내 인생이 어떻게 되든 아직 인생도 아닌 무언가를 고르겠다고 답한다. 말이 안 되는 선택을 한다. 설문지는 반장의 손으로 넘어간다. 번호대로 설문지를 취합하던 그 애가 너는 낙태를 고를 줄 알았다고 말을 건다.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물음이, 네가 토론에서 뱉은 말이 네  평소의 진심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며 느끼는 배신감인지, 아니면 다행이라는 말인지 헷갈린다.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서로의 마음을 모르고, 서로의 의견을 모르고, 서로가 든 패가 무엇인지 모르고, 가늠할 수 없어 색이 없는 말로 서로를 떠 보고. 나는 당황하고 균형을 잃고 무너진다. 동영상 얘기를 한다. 낙태 동영상 보니 좀 그렇더라고, 그런 말을 한다. 의미 없는 말로 대꾸를 하려다가 의미 없는 짓에 대한 후회를, 넘어졌다는 이유로 내 몸 안 생각들이 뒤섞이기라도 한 마냥 헷갈려 다르게 뱉는다. 낙태를 골랐을 때 교무실에 불려 갈 것 같다는 예감이 내 몸 깊숙한 곳에 공포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핑계를 대어 본다. 반장의 표정이 다시 그려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 설분 비스무리 한 것을 하기 위해 다시 그 교실에 가 있다. 나는 설문지를 찢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누르고 낙태가 적힌 칸에 체크 표시를 한다. 반장이 묻는다. 1) 네 토론 잘 봤는데 왜 이걸 골랐니? 대답한다. 그건 내가 뱉는 말이 아니었거든. 망할 제비 뽑기가 뱉은 말이지. 소문 좀 내 주라. 2) 네 마지막 변론이 유행해서 거지 같겠다. 그치? 대답한다. 맞아. 거지 같아. 웃는다. 

 무슨 답을 하든 나는 이미 그곳에 있지 않다. 나는 그 전장을 피하고 말았다. 맞서 싸우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그러나 의문은 아직 여기 남아있는 것이다. 그 설문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무엇을 구분하기 위한 질문이었던 걸까. 누구를 가려내기 위한 쇼였을까. 


 #3.

 오후 네 시 즈음 청소 시간이 대충 소강하고 있을 무렵, 한 남자 아이돌의 뮤직 비디오를 보는 아이의 노트북 주변으로 일곱 명이 우르르 몰려든다. 노트북 화면 안에는 망사 옷을 입고 배를 노출한 채인 남자 아이돌이 검고 붉은 조명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다. 어떤 애는 거북하다고 하고, 어떤 애는 거북하다는 말 대신 조금 더 순진한 말을 찾아보려는 노력 끝에 조금 과한 것 같다는 말을 던진다. 나는 가만히 있다. 일곱 명 중 다섯이 두 개의 같은 말을 조금씩만 변형해 결국은 똑같이 던지는 상황 속에, 나는 가만히 있다. 노트북으로 그걸 보고 있던 의자에 앉은 애도 가만히 있다. 고작 다섯 명과도 싸우지 못했다고 나와 그 애를 비난할 건가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억울한 물음이 공중을 떠돈다. 우리는 두 명이었다는 사실은 언제까지고 이해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간다. 여자 아이돌이 허벅지 전부와 골반부터 가슴 밑까지를 전부 맨살로 드러낸 다음 명확하지 않은 눈빛, 누가 시켜 만든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해야 하는 훈련을 받을 때도 똑같이 말해보라고  말한다. 말한다. ‘조금’과 ‘과하다’는 어울리지 않아서 네 말은 처음부터 우스워진다고 말한다. 청소 시간이 잦아드는 소음을 뚫어낼 만큼의 소리를 지르지는 않지만 낮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면 이제 다섯 명의 입이 닫히고 의자에 앉은 그 애는 뮤직비디오를 마저 본다. 섹시가 할당된 성의 전복이 일어나는 혁명의 장면을 마저 응시한다. 

 잠깐. 내가 두 명이었을까? 다섯이었을까. 


#4. 

  내가 남자애였어도 당신은 내게 규칙을 가르쳤을까. 내가 남자애였다면, 아니 이 동아리의 장이 남자애였다면 우리 동아리는 이다지도 많은 간섭을 받지 않았을 텐데. 당신은 이 동아리와 상관이 조금도 없는데, 내가 명령을 내리고 다른 애들은 그 말을 듣고 빠릿빠릿 움직이는 조직이 될 것을 요구한다. 내게 권위적이고 수직적이 될 것을 요구한다. 당신은 그게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모습이라고 떠들며, 실제로 도 많은 자리들이 ‘그런’ 남자들에게 위를 허락했고 또는 위에 있는 남자들을 ‘그렇게’ 만들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여자애라서 나와 함께 하는 친구들 모두가 함께 무시를 당한다. 우리가 함께 세운 규칙과 함께 합의한 결론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지워도 되는 것이 되어버리고.

 나는 그런 모멸감을 왜 벌써 느껴야 했는지 이제 와 억울하다. 한 인간이 완성되는 데에 너무나도 결정적인 순간에 위치해 있는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곧 권력이 됨을 알지 못한다. 아니, 너무 잘 알아서 그랬을지도. 

 나는 그 장면에 다시 가서는 소리를 지르지도, 조용하지만 분명한 말을 내뱉지도 못한다. 나는 어버버 하고, 돌아서서만 가끔 운다. 


 젊은 여자인 것은 엿같다. 여자애인 것도 엿같다. 조르주 페렉의 말과 윌리엄의 말을 정언명령 삼고 살며 그것이 모두 백인 남자의 말이라는 것에 종종 빡쳐야 하는 삶. 이내 그것이 과잉일까 봐 마음 졸이며 있지도 않은 옆을 눈치 봐야 하는 삶. 나는 외롭고 충만하며, 완전하지 않다는 말로 자주 정의된다. 젊은 여자, 내가 그거라서. 내가, 여자애였다가 아가씨가 되는 삶을 기어코 받아들이고 말아서. 내가 여자애임을 알았을 때부터. 어쩌면 나는 그때부터 벌써 혼자임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그때부터. 벌써부터 가계도를 찾아 나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그때 만든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오래된 상자에서 꺼낸 이리저리 찢기고 먼지가 내려앉아 엉망이지만 적힌 이름은 알아볼 수 있는 종이 하나. 누렇게 색이 변해 처음의 색을 상상으로만 볼 수 있는 종이 하나.

 리베카 솔닛과 록산 게이와 유디트 레이스터르. 그들은 내 고조할머니들이다. 

 그들은 명랑과 우울이 뒤섞인 이상한 청소년기를 버티게 해 준 사람들이며 나는 나의 오랜 기원이 거기 있다고 믿고 싶다. 물론 리베카 솔닛의 내한 인터뷰는 기숙사 방 침대에서 몰래 읽었고, 록산 게이의 책에 대한 독후감을 제출할 때는 벌벌 떨었으며, 유디트 레이스터르의 자화상을 노트북 배경화면으로 해놓고도 누가 볼까 봐 황급히 인터넷 창을 열어 가리긴 했지만. 

 부끄러워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그냥…. … 맞을까 봐 그랬어요. 내가 맞아서, 맞을까 봐 그랬어요. 죄송해요. 숨어서라도 당신들과 말을 해야 살 것 같아서 그랬어요. 그 시간이라도 없으면 나는 벌써 죽었을 거예요. 그랬다면 오늘 나는 걷지도 못했겠죠. 하늘을 보고 울지도 못했겠죠. 나는 제사 지내는 방 안으로는 한 발 자국도 들지 못하게 하는 그 가계도에 내내 갇혀 진작 죽었겠죠. 그러니까 나를 구해준 가계도는 벌써 옷장 안에 처박아둔 오래된 가방 안쪽 주머니에 있었던 거예요. 나는 살았어요. 나는 살아있죠. 나는 살아남았어요. 살아남아서, 걷는 것과 우는 것을 모두 할 수 있어요. 나도 모르게 써내려 간 태초의 가계도를, 나도 잊고 살았던 최초의 종이를 나는 이제 다시 꺼내봐요. 손가락을 움직여 펼쳐봐요. 걷고, 그리고 울면서.

이전 10화 전리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