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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가계도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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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삼 Mar 07. 2024

전리품

<가계도> 2일차 - 10

 젊은 여자 혼자 하는 여행은 힘들다. 딱히 적어두지 않았다 뿐이지, 어젯밤부터 나는 계속 숙소로 향하는 골목으로 접어드는 순간부터 뒤를 돌아보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야 했다. 젊은 여자 둘이 하는 여행도 힘들다. 어제의 동행이었던 버지니아 울프, 아니 내 고모가 자신과 자신 일행 하나가 함께 스페인을 여행하는 중에 묵은 여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는데 아주 가관이었다. 아무도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기차역에서부터 어떤 노인이 여관까지의 길을 안내했었는데 방에 들어가자마자 불길한 기운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의도를 채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침대방에 다다른 것에 대해, 그가 오는 길 내내 그들의 짐을 들겠다고 집요한 고집을 부렸던 것에 대해, 극도의 불안을 느낀 둘은 하나뿐인 의자를 뒤로 돌려 문에 기대 두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새벽 4시 반에 그들을 깨운 소리가 들렸고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보았을 때.

 그녀가 발견한 사람은 농부의 아내뿐이었다고 했다. 바짝 긴장한 채 하루를 살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 감사해야 하는 현실이 억울해 맥이 탁 풀리는 순간을 나 역시 알고 있고 있다.


 아무튼 젊은 여자 혼자 하는 여행은 힘들다. 둘이 해도 힘들고. 하긴 동네 길을 혼자 걷는 일에도 상당한 에너지가 드니까, 뭐….


 오늘은 석굴암 안의 불교용품점에서 염주 팔찌를 살 때의 일이 문제였다. 골라 든 팔찌를 남자 점원에게 가 내밀었을 때 그는 대뜸 “포장해 드릴까?” 했다. 이게 지금 존댓말이야 반말이야. 대체 뭐야. 친근함의 표시야 아님 여자애는 만만하다 이거야… 짧은 순간에 내 마음은 여러 생각이 뒤엉킨 채로 엉망이 됐다. 존대도 아니고 반말도 아닌 희한한 말로 나를 응대한 그 남자가 나를 깔보려 했던 거라면, 포장을 거절하고 '여자애가 싸가지 없이' 한 손으로 카드를 내밀고 다시 카드를 돌려받고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뜨는 순간까지 만든 냉랭한 분위기는 물론 잘한 짓이다. 아니야, 괜한 자격지심일 뿐인가? 내가 과민반응을 하는 것인가? 내가 좀 심했나? 아니야, 왜 약하게 구는 거야? 만약 내가 아빠와 함께 여행하는 중이었다면, 그 아저씨가 내 염주 팔찌를 결제하는 아빠에게도 과연 똑같이 말했을 거 같애? 생각들이 서로 멱살을 움켜쥐고 땅바닥을 구르며 서로를 할퀴려 든다. 포장해 드릴까? 그 말은 그 광경을 쳐다보고만 있고 상처가 나는 그 모든 순간 속에 안전히 부피를 차지하고 있다. 이내 킥킥대는 소리가 들린다. 네가 냉랭한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웃기시네. 그 남자는 네가 꼬라지를 부린다거나 앙탈을 부린다고 생각했을 걸. 싸가지 없는 년. 애매한 모욕감으로 과연 네가 무엇을 떠들 수 있는데? 승패가 갈리지 않고 내 머리통과 내 힘과 내 시간만 갈려나간다. 흉이 진다. 이딴 전투들이 나를 전사로 기르고야 말았다. 문득 작년에 있던 전투 하나가 떠오른다. 마찬가지로 경주에서, 이곳 가까이에서 벌어진.


20XX년 6월 13일

 불국사에 다녀왔다. 대웅전에 기도를 올리고 내려오는 길에 염주 팔찌를 구경했다. 나와 동생은 둘 다 알록달록한 팔찌를 집어 들었는데 동생한테 맞는 사이즈가 없는 듯싶었다. 사장은 여자한텐 이런 아기자기한 게 어울리고 남자한텐 멋있는 게 맞다고 하며 동생한테 세 부처가 새겨진 갈색 팔찌를 추천했다. 그리고는 태그를 떼고 직접 동생의 팔에 팔찌를 끼워주며 ‘소원 성취하시고 건강하세요’ 했다. 나에게도 똑같이 했는데 이번에는 이뻐지세요, 덧붙였다. 사장님 알고 계세요? 사실은요, 저는 이런 모욕들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기를, 이런 식으로 망쳐지는 하루들이 더는 없기를 간절히 빌고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전쟁이 계속된다. 두 전투는 내게 다를 게 없다. 이제 팔찌는 두 개. 전리품이 쌓여간다. 나는 오늘 또 한 번, 조금 더, 전사인 채. 마음이 몹시 따갑고, 영광의 상처로 그런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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