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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가계도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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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삼 Mar 05. 2024

위드 더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

<가계도> 2일차 - 9

 앞만 보고 걸어서 놓친 왼쪽과 오른쪽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던 걸까. 불국사 천왕문을 지나 펼쳐진 길 옆으로 ‘불국사 박물관’이 있었다. 나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거다. 혼자 길을 걸으니 세상을 더 두리번거릴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내 옆에는 이리로 가면 석가탑이 있다고 앞을 가리켜 일러주는 사람도 없고, 최단시간 최단거리를 검색한 화면을 보여주는 사람도 없다. 나는 표지판과 나만 믿고 걷고, 긴장과 들뜬 마음을 동시에 누르면서 최대한 의연하게 걷는다. 


 내가 간 시간대에 박물관을 방문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리고 누가 더 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람들이 앞만 보고 걸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고, 그 예감은 최소한 내가 박물관을 떠날 때까지는 들어맞았다.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건립했다’는 설명을 보는 순간에는 소름이 돋고야 말았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읽었던 책에서 본 내용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의식 저편에 잠들어있던 기억이 갑자기 자다 깬 사람처럼 허겁지겁 나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국사는 교통의 거점이 되기도 하는 유명 사찰이라 숙박 시설을 따로 운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곳에 머물던 사람들이 쓰던 유물이 땅에 갇혀 있다 나온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맑고 탁한 느낌을 둘 다 가진 오묘한 색을 띠는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깨져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아끼던 잔이었으면 어쩌지? 깨져서 많이 슬프겠다. 아니, 그보다 이렇게 전시해 둬도 되는 거야? 잔과 잔받침이 땅 깊숙이 박혀있던 그곳에 주인의 영혼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해? 아니면 혹시 자기 보물을 찾고 찾다가 끝내는 여기에 와 있는 거 아니야? 

 나는 슬쩍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이 놓여있는 옆쪽을 쳐다봤다. 투명막으로 보호되어 있는 잔과 잔받침을 도저히 손으로 잡을 수는 없어서, 그래서 아무런 차도 마실 수 없어서, 퀭한 눈이 된 누군가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고 우리는 함께 다음 설명이 적혀있는 벽으로 걸었다. 


 옛 지도 속에 나와있는 불국사래요. 신기하다. 그 옆에 첨성대를 그려놓은 것 좀 보세요. 술병같이 그려놨네. 다 조선 시대의 지도네요. 아, 그러네요. 신라나 조선이나 다 같은 과거가 아니네요. 암요, 그렇고 말고요. 

 천년은 오래전 끝났군요…. 


 신라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에게도 과거의 사람들이었다는 시간적 순차가 머쓱해진다. 조선 사람들에게도 이곳은 관광지였을까? 나처럼 알지 못하는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그때도 있었을까? 그는 무작정 짐을 싸 들고 경주의 거리를 홀로 걸으며 가슴이 서늘했다가 내려앉았다가를 반복하기도 했을까? 그도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견해 가며 김대성이 전생과 현세 중 어느 부모를 더 섬겼던 것인지를 괜히 가늠해 봤을까? 신라의 천년이 끝난 경주 땅에 사는 후손들은 어땠을까. 옛날엔 여기가 도읍이었대, 그 말을 처음 들은 날 당신은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조선의 폭군이 왜 관음보살상에 금을 입힌 거래? 그런 말들이 한때 동네를 떠돌다 죽은 적이 있었을까.


 우와. 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처음 봤어요. 이렇게 작고 긴 모양일 줄이야. 구슬은 왜 같이 넣어놓은 건가요? 나도 모르죠. 누가, 왜 넣었을까요. 사실 누군지는 몰라도 왜 넣은 지는 알아요. 다라니와 이걸 모두 탑에 넣으면 수명이 연장되고 모든 죄업이 없어질 수 있다고 했거든요. 다라니는 뭐예요? ‘신성한 글귀’라는 말이에요. 당신이 말한 작고 긴 그 종이요. 근데요, 이걸 왜 죄다 꺼내놓은 거죠? 탑에 넣어놔야 모든 죄업이 없어진다면서요. 오래 산다면서요. 혹시 효력을 다해서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건가요? 글쎄요. 하지만 내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도 꺼내놓은 자들에게 무얼 바랄 수 있을까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이다. 그 시기를 예측하는 데에는 측천무후가 개조한 한자들이 한몫을 했다. 측천무후 시대 동안만 쓰인 한자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적혀 있던 것이다.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처럼, 내 보물 3호인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잿더미 혹은 흙더미와 함께 그 언젠가 출토되는 날이 오면, 후세 사람들은 애먹을 것이 분명하다. 이 카메라 좀 이상해요! 만들어진 시기는 분명 20세기인데 손때 자국은 21세기에 만들어진 걸로 분석되고 있어요! 뭐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거죠? 옛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특정 시대에만 썼던 한자 덕분에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는 고대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카메라는 도대체 뭐죠? 

 …신기하다는 이유로 만약 그 카메라가 미래의 어느 박물관에 전시되게 된다면, 나도 잔과 잔받침 주인처럼 그 옆을 슬프게 맴돌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 내 옆에는 날짜가 적혀 있어 정확한 시기를 단언할 수 있는 착한 유물들-여러 장의 인생네컷 사진들-이 쌓여있을 것이다. 

 이 사진들은 21세기를 살던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보이며, 초기에는 가로로 이어지는 4컷 양식이 성행했으나 이후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가로 6컷, 세로로 4컷 등의 다양한 양식들이 후반기에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상상은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 주인에게 맡겨둔 채로, ‘다음에는 거기서 봐요’ 하는 마지막 인사도 남겨둔 채로.


 나는 박물관을 나와 부지런히 걸었다. 열심히 걷는 중에도, 연식이 느껴지는 주홍빛의 문들을 넘으려면 다리를 훌쩍 들어 올려 높게 솟아있는 문턱을 건너야 했다. 갑자기, 어릴 적 내가 관광하러 간 궁의 문턱들을 넘는 것을 좋아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 시대의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석가탑의 그림자를 봤을 때는 맥이 탁 풀렸다. 아사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연못에 석가탑의 그림자가 떠오르지 않아서 죽었다고 했다. 탑을 만들라는 명령에 동원된 남편 아사달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결국은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아사달을 만나지 못한 이유 자체를 떠올리며, 아사녀의 죽음에는, 남자가 탑을 만드는 동안 여자를 만나면 부정 탄다는 그 말을 홀로는 부술 수 없다는 뼈저린 괴로움 역시 섞여 있었을 거라는 사족을 달고 싶어 진다. 나는 아사달과 아사녀보다 오래 살아남은 설화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은 뒤, 쨍한 태양 아래로 뻔뻔히 고개를 든 석가탑의 그림자를 품 안에 넣은 다음, 그걸 당장 아사녀에게 가져다 바치고 싶었다. 


 대웅전 뒤로 무설전, 비로전, 관음전, 그리고 그 아래의 극락전까지 전부 기웃거려 본다. 어린아이들은 법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빗면을 타고 다니고, 법전 안에는 만원에 기도를 파는 사람이 앉아있다. 문득 하늘을 보니, 까마귀가 소리도 없이 날고 있다. 깍깍대지 않는 까마귀들. 

 새를 보며 휘청휘청 걷다가 극락전 지붕에 눈이 닿았다. 지워진 얼굴이 있었다. 다른 얼굴들은 괜찮은데 유독 그 얼굴만 벗겨진 듯했다. 

 나는 허겁지겁 사방을 돌아 그려진 얼굴들을 전부 확인한다. 마침내 마지막 면을 확인했을 때, 거기에 새로 그려 넣은 듯 진하고 밝은 색으로 칠해진 그 얼굴이 있었다. 얼굴뿐 아니라 몸통까지도 보수 작업을 거친 후 새 옷을 입고 있었다. 순간 안도의 한숨이 입술 틈으로 새어 나왔고, 나는 왜 갑자기 ‘사라진 얼굴’에 겁을 먹었던 것인지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감이 좋지 않다. 전에도 이런 기분은 수없이 많이 찾아왔다. 매 편지마다 주구장창 이야기하는 그곳. 그곳이 고마웠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학교 강당 무대 옆 방이 내 고향인 것 같고 그 옆에 있던 너는 나를 태초부터 아는 사람 같고. 그래, 이 말은, 이 무거운 고백은 결국 편지에 쓰지 못했는 걸. 혼자 처박혀서 울던 나를 굳이 찾아와 문을 열고 등을 안아주던 그 애는 벌써 나와 멀어진 지 몇 광년인 걸. 나는 혼자다. 가계도에 써넣을 사람을 이제 한 명 찾은 게 다인 혼자. 내 곁에 있다 사라진 얼굴들이 이미 너무 많은 혼자.

  석굴암으로 가는 버스는 산을 타고 위로 달렸다. 고랭지 계단식의 작은 논 몇 개와 비닐하우스를 지나고, 파이프 도난 사고 목격자를 찾는 전단지를 지나서, 나뭇가지 사이로 어떤 풍경이 보였다. 탁한 초록의 논밭과 낮은 건물과 조금 높은 건물들이 서로의 사이와 사이에 끼여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코끝이 찡해져 오더니 눈에 눈물이 차기 시작한 것이다. 

 아…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 주인을 데려올 걸 그랬나… 



 석굴암 본존불상을 보려면 입구에서 10분 정도 더 걸어야 한다. 예전에 가족들과 관광을 했을 때, 기념으로 산 작은 칼 모양 피규어를 들고 동생이 그 길에서 잔뜩 설쳐대던 게 생각이 났다. 동생은 자신이 칼을 든 무사라며 길 옆에 모여있는 돌들을 딛고 점프를 하는 걸 지겹게 반복했었는데, 어쩌다 한 번은 돌에 발을 딛는 순간 앞에서 어떤 무리가 나타나는 바람에 머쓱한 표정으로 땅에 닿은 적이 있었다. 그게 생각이 나서 혼자 킬킬 대다가, ‘그때 걔가 짚은 돌이 뭐였지?’ 하는 생각이 들어 느낌이 가는 대로 하나를 골라 사진 한 장을 찍어두었다. 


 정말로, 외로운 게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는 정말. 정말, 이제는. 비틀즈 LP 판을 품에 안은 채 복도에 서 있던 첫사랑이 정말로 비틀즈를 좋아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읽은 그 아침에 대해 말을 할 때인 것 같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하루 중 가장 신선한 공기를 맡으며 읽는 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슬펐던 글에 대해, 정말로, 이제는, 말을 할 때인 것이다. 

 그날 아침. 내가 읽은 그 글은, 인생에서 딱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그건 어떤 시절을 감싸고 있던 노래들일뿐이라고 했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불분명의 영역으로, 아니, 서랍 속으로 들어가고 마는 것이라고. *

 그 애가 정말로 비틀즈를 좋아했던 건지, 아니면 비틀즈를 정말로 좋아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 LP 판을 준비했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비틀즈를 정말로 좋아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분실물을 주워 그걸 분실물 수거함에 갖다 놓는 길이었던 건지, 그런 것들은 그냥 서랍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분실물 수거함 속의,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낡아빠진 장갑 한 짝과 같은 게 되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기억을 서랍에 넣어두고, 대부분의 기억에 대해서, 그들을 다시는 꺼내지 않기를 선택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선천적으로 기억을 잃은 채 산다. 



.

.

.


 아, 우리는 서로를 모르는군요. 

 아무도 나를 모르는군요. 

 나는 누군가에게는 비틀즈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틀즈를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선물을 준비한 사람이었다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분실물 수거함에 착실히 물건을 갖다 놓는 사람인 거군요. 

 그것이 비틀즈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아는 척하고 싶어서, 말을 좀 하고 싶어서, 방에 숨어 혼자 들어보려 한 내 첫 발악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군요. 

 내가 누군가에게 온전히 이해받을 날은 영원히 올 수가 없는 거군요. 

 끝의 끝까지 그런 거군요. 

 S도 내가 느낀 전부를 똑같이 느낄 수 없는 거군요. 

 강당 무대 옆에서 내 등을 끌어안던 그 애도 내 슬픔까지는 안지 못했던 거군요. 

 나는 재연 배우처럼 애를 써 봐도 내 슬픔을 오롯이 전할 수가 없는 거군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는 아주 충실한 기록자가 되어야 하는 거군요. 

 나는 나만을 모두 목격하고 나는 나만을 전부 쓸 수 있군요. … 그렇군요. 

 그렇군요. 

 나는 써야 하는군요. 

 나. 

 나. 

 외로운 나. 

 외롭고 충만한 나. 나. 

 나는 걷고, 걷다가 써야 하는군요….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 주인이 내 옆에서 걸음을 걷고 있는 것처럼 중얼거려 본다. 우리는 모두 외롭군요. 외롭군요. 외롭고 충만한 거군요. 외롭고 충만해서, 써야 하는군요…. 

 그 역시 내 말을 전부 껴안을 수 없을 텐데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일인칭 단수> 중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 

 그리 좋아하지 않는 작가의 책을 선물 받아 어쩔 수 없이 읽다, 딱 이 이야기에서 모든 게 멈춰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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