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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가계도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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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삼 Mar 04. 2024

한낮

<가계도> 2일차 - 8

2일차


 불국사로 가는 버스 안은 너무 시끄러웠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는 헤드셋을 가져올 걸 그랬다고 마스크 안으로 중얼거려 본다. 

 조금 달리고 나니, 알천 축구장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 길은 나도 아는 길이다. 가족들끼리 여행을 왔을 때 차를 타고 달리다 ‘알천’이라는 두 글자만 보고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내 눈에 보이는 건 초록색 잔디구장이 다지만, 나는 마치 여행 중 아는 사람을 마주친 것 같다고 느낀다. 


 내가 알천을 아는 것은 그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에 나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알천은 선덕여왕의 충직한 신하이자 능력 있는 무인이다. 주연 축에 속하는 캐릭터는 아니라서, 알천이라는 이름을 봤을 때 나는 친한 사람을 발견해 기뻤다기보다는 그냥 알고 지내는 지인을 만난 기분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이어도 혼자 온 여행길에서 마주치면 반갑고 애틋한 사람이 되는 가보다. 나는 그제야 드라마 속이 아닌 그의 진짜 일생이 궁금해 인터넷을 열었다.

 여기서 다 뵙네요. 어떻게 지내세요? 여왕 폐하는 잘 지내시나요?


 … 이럴 수가. 그는 선덕여왕과 그리 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실제의 그가 주로 활약한 시대는 진덕여왕 시기라고, 번쩍거리는 화면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생애를 드라마 하나로 어림짐작해 온 건 나인데 왠지 배신당한 기분이 든다. 

 괜찮아요. 그럼 전 그냥 미실과 얘기할게요. 처음부터 가짜일지도 모르는 그녀와.


 나는 10살 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사람들은 그녀를 ‘희대의 악녀’ 캐릭터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찬사가 아니라 멸칭이라는 것은 10년 뒤에나 알게 되었다. 

 신라의 진골 여자가 감히 왕좌를 탐하는 외로움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를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반란을 일으키며 마지막 춤을 춰 보지만, 그렇게 자신을 용이 아닌 이무기로 살게 하고 또 죽게 할 시대를 향한 분풀이를 해 보지만. 자신이 탐욕하고 사랑한 나라의 혼란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단 한 번도 자신의 야망을 인정해주지 않은 나라를 향한 절절한 외사랑을 이유로 반란을 스스로의 손으로 거두고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을. 굽힐 수가 없어 죽음을 선택하는 마음을. 마지막 비상이 단지 후회 없는 추락을 위할 뿐인 라스트 댄스를. 


 그녀를 떠올리며 밟는 경주의 땅은 묘하다. 이 땅을 당신도 밟았을까요? 걸으면서는 슬펐을까요? 물론 땅도 슬픔도 전부 헛소리에 불과할 지도 모름을 알고 있다. 당신 이름이 등장하는 역사서는 딱 하나, 필사본 <화랑세기>. 그리고 그것마저 진위 여부가 불투명하다. 

 <화랑세기> 속 미실 : 진흥왕의 총애를 받는다. 화랑 ‘원화’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진흥왕이 조정에서 업무를 볼 때 옆에서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진흥왕뿐만 아니라 동륜태자와 진평왕의 자식을 낳았으며, 또한 진지왕을 왕위에 올리고 다시 폐위시킬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 남편이었던 세종, 애인이었던 설원과도 자식을 낳았고 세종과 설원 모두 화랑의 풍월주를 지낸 사람들이며 그 자식들 또한 풍월주의 자리에 오른다. WOW! 비록 왕비인 적은 없었어도 그녀는 왕의 옆자리를 내내 차지하고 왕좌를 비틀어내는 권력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그게 다 무어란 말인가. 그녀의 권력은 그녀의 남자들과 그녀의 아들들에게는 지위를 갖다 주었지만 정작 그녀에게는 아무 이름도 주지 않았다. 


 왕좌에 오를 수 있었던 여자의 삶은 좀 나았을까? 당나라 황제로부터 모란꽃 그림을 받은 그 여자 말이다. 골품제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던 우리 역사 최초의 여왕이라고 소개되는, 사실은 여자인 주제에 성골이긴 해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비아냥이 천삼백 년을 살아 있는 꼴을 지하에서 목도할 그 여자 말이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지금은 한낮이다. 

 시내를 벗어나 달리는 버스 바깥의 풍경이 적나라하게 눈에 닿는 시간대에 슬픔이 녹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창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은 몇십 분간 쉬지 않고 아름답다. 하늘과 빛과 밭과 구름과 넝쿨이, 희기도 하고 파랗기도 하고 초록이기도 한 색감들로 한데 뭉쳐있다. 정류장의 이름은 마을, 마을, 그다음도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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