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도> 2일차 - 12
영화 <미성년>의 후기.
‘이곳을 출입하는 학생을 흡연자로 간주합니다.’ 씨알도 안 먹힐 통제, 어쭙잖은 보호를 명목으로 애들을 단정하고 단죄하길 편하게 해내는 세상. 우리는 그 세상에서 ‘인사 안 해?’ 따위의 서열을 배운다. 어른 세계를 다 아는데도 끼질 못하고, 우리 엄마를 지키려면 너네 엄마가 꽃뱀이라 이름 붙여져도 괜찮으며, 그런 것들. 낙태가 불법인지부터 인터넷에 묻고 헛웃음과 비웃음을 지어 보이는 걸 최대의 방어자세로 삼으며, 그런 줄 알고 믿으며 사는 애들은 너무 많다. 편의점 안에서 담배 피우는 나쁜 짓은 지가 하는데 남의 생계를 빌미 잡아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빛 감당은 내가 해야 하는 세계. ‘여자애.’ 우리는 너무 쉽게 티가 나고 너무 쉽게 슬퍼진다. 저 여자는 그 남자의 아기를 가졌고 나는 빵꾸 난 스타킹을 신고 있다는 것에 슬퍼야 하는 어른이 될지도 모르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이런 세상에 태어난 이상 그럴 가능성을 품고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빚지고는 못 산다는 애가 하는 빚을 꼭 갚겠다는 말에 눈물을 닦으며 알겠다고 확답을 주는 어른, 너희들이 왜 싸우냐는 여상한 한마디를 던질 시야 정도는 가진 어른, 그것도 될 수 있다, 우리는. ‘너 가출한 거 아니지? 힘내’ 하는 손쉬운 위로를 택하는 어른 말고.
조용히 하라는 말에 최후통첩 대사를 진짜로 조용히 하는 ‘윤아’는, 박차고 나가려는데 교사의 앉으라는 말에 바로 앉아버리는 윤아는, 어떤 어른이 될까.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하는 걸까, 이 세상은. 회의 중이라는 말의 차단력이 유효하며 전부가 되어 돌아가는 세상에서, 윤아는 아기에게 힘내라는 말을 한다. 이때의 이 말은 어려운 말이다.
이미 폐장한 놀이공원에서 소리 지르며 뛰어노는 것. 그것이 청소년기이며 어른들 역시 갈 곳이 없어 그곳을 찾게 된다. 어떤 기이한 우정은 기이한 방법으로 몸속에 저장되며 태초의 연결고리가 끊어져도 세상에 남는다. 무엇이 죽어도, 폐장한 놀이공원에서 어떤 사랑은 살아남는다.
영화 <벌새>의 후기.
A반과 B반을 가르고 날라리를 색출하는 세계의 이도저도 아닌 존재. 똑같은 단발머리들에 파묻혀 사랑을 원하는 눈을 해 보이는 애. 수업시간엔 매번 쪽지를 쓰고 낄낄거리고, 그게 유일한 반항. 내가 자살해서 그 새끼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걸 복수일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애. 내 모든 만남과 관계가 중계되는 것이 불편하고 그에 대한 차단마저 지들끼리 할 얘기가 있나 보다-하는 귀엽다는 듯 뱉어지는 말로 중계가 되는 일. 은희와 나의 차이가 있다면, 모두가 다 아파서 함부로 서로를 동정하지 않는 병원의 세계를 은희는 사랑했다는 것이고, 나는 더 뻣뻣하게 굴었을 거라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같다. 폭력은 거즈로 덮이고 흉터는 가려진 채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서, 곧장 쓰레기통으로 향한 혹 대신이라도 챙길 전리품 따위를 고개 숙여 찾아내는 일. 노래를 크게 틀고 손짓과 발짓으로 주변의 공기만을 힘껏 때리는 일. 파출부, 썅년, 개 같은 년, 씨발 니네 사귀냐 하는 말이 굴러다니는 꼴에 파묻혀 의심도 없이 그걸 따라 뱉어놓고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어쩔 줄 모르는 애. ‘김은희 씨 댁’이라는 말에 한껏 당황하고 마는. ‘쟤가 날 때렸어요-싸우지 좀 마’의 이상한 굴레 안에서 맞은편의 언니와 눈을 마주치곤 불현듯 더 슬퍼지는 은희. 친구와 도둑질을 하고 욕을 한 뒤 나란히 서서 벌을 기다리는 장면에서 나는 벌을 받을 때마다 내가 여자애인 게 제일 잘 느껴지곤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차로 우릴 칠 뻔해놓고 손가락 욕으로 뒤에서 몰래 대항한 우릴 기어코 보고는 차를 멈춰 세운 뒤 우리에게 와 ‘죽여버린다’, ‘싸가지 없는 것들’, ‘지랄하네’라고 했던 어떤 ‘인간’과 그 인간의 차가 학원 앞에 세워져 있던 걸 보고는 허겁지겁 친구와 교복 마이를 바꿔 입었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나는 그날 비참했고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축축한 기분이 되어버리곤 했다. 나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아무렇게나 화풀이하는 게 아니라 당해야 맞는 존재. 그걸 피해보려고 엉망진창으로 멋없는 발버둥을 쳐야 하는 존재. 손가락을 움직여보자. 손가락을 움직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