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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가계도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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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삼 Mar 20. 2024

실수

<가계도> 2부 - 17

 <무심한 사람이라고 비추어지는 것에 개의치 않아합니다.>


 아니오. 


 …그래, 세심하지 못하다. 친구들의 생일을 잊고 지나가는 일이 종종 있고, 남이 머리를 자르거나 안경을 바꾸어도 잘 알아보지 못한다. 친구들이 전부 기억하고 있는 에피소드를 혼자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며, 매일 지나다니던 길에 어느 날 갑자기 큰 건물이 새로 지어져 있다며 놀라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리고 그 건물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고 옆에서 누가 정정해주면 더 놀라는 것까지가 공식 루틴. 이해와 사랑을 바라면서 노력조차 하지 않는 거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이것은 자수(自首). 


 내 발 밑 말고는 시야를 넓히지 않는 이기심이 시크함으로 읽히는 편리한 시대를 사는 호사를 누리고 있음을 영원히 깨닫지 못할 나. 오롯한 사랑을 바라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언제든 다시 떠들어댈 나. 


 비겁한 새끼. 커피를 홀짝이며, 단 커피만 찾는 입맛을 들키지 않으려 눈알을 굴리는 엉성한 어른이 된 나는, 조용히 읊조린다. 

 나는 단 커피가 든 커피잔을 내려놓고 H의 안부를 속으로 묻는다. 뚱뚱한 패딩을 입고 기숙사 외곽을 돌며 심각한 척 했던 우리 산책 길이 떠오른다. 네가 보고싶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무심하다는 말을 하자마자 운 적이 있다. 

 한 달이 지나 기억난 친구 생일을 어떻게든 챙겨주기 위해 사과와 선물을 함께 보내고, 다음부터는 까먹지 않기 위해 바짝 눈에 힘을 줘 보는 내 택도 없는 노력을 왜 몰라주냐고. 변명을 하고 싶다. 떼를 쓰고 징징거리고 싶다. 바닥을 기어다니면서 여러 사람을 귀찮게 하는 울음을 토하고 싶다.


 비겁한 새끼. 나는 다시 커피잔을 든다.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데 영 소질이 없습니다.>


 아니오. 

 설거지를 잘한다. 정리도 잘한다. 화장실 청소 고수다. 하지만

 사과를 깎을 줄 모른다. 머리 묶을 줄 모른다. 복숭아를 못 먹는다. 아차차, 이건 알레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까운 이들이 내 복숭아 알레르기를 기억하지 못하고 아이스티를 마시자고 하거나 딱복과 물복 중 무엇이 좋냐 물어올 때마다 실망을 갈무리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은 못한다.


 또 시작이다. 나를 설득하기도 이제는 지친다. 네가 복숭아를 못 먹든 잘 먹든 그건 누군가에게는 서랍 속에 들어가는 이야기라고 했잖아. 그걸 인정하기로 했잖아. 그래서 아침부터 슬프게 해를 마주봐놓고는 또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무슨 동굴 같은 데로 기어들어가 검은 그림자 쪽으로만 시선을 주고 있는 내 등 뒤에 대고 애원에 가까운 설명을 한다. 이기적인 거야, 난 어리잖아, 두 가지 말만이 동굴 내부를 울리다가 한 쪽이 뒤를 돌아 나온다.  

 아니, 

 가다말고 다시 동굴로 들어 가 다른 한쪽을 다그친다. 


 너. 

 너는 안부인사 전하는 것도 잘하지 못하지. 열네 살이었을 땐 할머니 할아버지가 ‘내가 죽으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자주 꺼내는 게 서러워서 베란다에 나가 훌쩍훌쩍 울어놓고는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옆의 사람이 언제고 있을 것처럼 여기다가 결국은 후회하게 되는 인류사의 오래된 레퍼토리와 닮았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그랬잖아. 너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데도 그랬잖아. 너는 벚꽃나무 아래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서로를 껴안은 채로 환하게 웃고 있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수능장에 챙겨갔었잖아. 교실 앞쪽에 내어놓은 가방의 앞주머니에 그 사진을 넣어두고는, 쉬는 시간마다 앞으로 달려가 사진을 꺼내 한참 살펴보기도 했잖아. 그건 네 부적이었잖아. 

 너는 친가의 할머니에게도 전화를 드린 적이 있어. 할머니가 문자로 왜 전화를 받지 않느냐고 물어오신 걸 몇 시간이 지나서야 확인을 한 뒤였어. 너는 급하게 전화를 걸어 대화를 나누었고, 할머니는 그 전에도 문자를 몇 번이나 보냈다고 말씀하셨어. 너는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리고 메시지함을 뒤져 확인을 했는데, 온 것이 없었어. 그래서 너는 그런 건 없다고 말했고 할머니는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화를 냈지. 그리고 너는 그때 웃음이 샜어. 어렸을 적부터 자주 보고 살지 않아 아직도 조금은 어려운 이 어른을, 내가 많이 닮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지. 네 동생은 애살맞게 먼저 전화해온다고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몇 번이고 문자와 전화를 했었다는 어딘가 수상한 증언, 온몸이 쑤셔서 죽겠지만 너 큰사람 되는 건 보고 죽어야 돼서 기도하듯 살고 있다는, 어딘가 다정하고 어딘가 쓸쓸한 일상의 고백이, 참을 수 없이 슬퍼졌지. 피하는 일 없이 불만을 터놓는 화법과 짜증 나고 속상한 일은 과장해서 표현하는 버릇, 그리고 고되어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상시리 곧은 신념. 전부 그녀에게서 물려받은 것들이었구나, 너는 확신을 했어. 너는 마지막에, 앞으로는 동생이 하는 것만큼 자주 전화를 드리겠다고 어색한 약속을 했고 할머니는 그 약속을 끝까지 믿지 못하는 눈치였어. 너는 그런 것까지 닮은 것이 우습고 서글펐지. 

 너에겐 가설이 몇 가지 있어. 마음이 가는 일에만 매진하는 습관이라는 핑계와, 공부 때문에 바쁘다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명절이나 주말에만 보던 일상이 습관이 아직 남아 인생의 중요한 사람들을 ‘이벤트’ 취급하며 사는 것이 네 인생이 되고 말았다는 변명 말이야. 그리고 너는 둘 모두가 답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 인정해. 

 인정하라고 이 새끼야. 

 너는 계기가 있어야만 네 잘못을 아는 멍청이야. 너는 누군가와 주고받는 인사와 안부와 대화와 눈짓을 놓친 채로, 너는 딴짓만 해왔던 거야. 돌아보지 않은 건 너고, 이해하지 않은 건 너고, 비틀즈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비틀즈를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선물을 준비한 사람으로, 분실물 수거함에 착실히 물건을 갖다놓는 사람으로, 딱 그 정도의 사람으로 남겨둔 너의 모든 인연은 너의 선택이었지. 그게 오판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게 실수든 아니든 너는 돌아보면 안됐어. 다시 사랑해달라고 빌어선 안됐어. 

 너한텐 너만 중요해서, 네가 잘 되는 것만 중요해서, 너는 열 번도 더 건넬 수 있었던 인사를 놓쳐버렸고, 백 번도 더 물을 수 있었던 안부를 묻지 않았고, 천 번도 더 맞출 수 있었던 눈짓을 피해버렸고, 만 번도 더 나눌 수 있었던 대화를 흘려보냈어. 넌 남이 깎아준 사과를 먹고, 남이 묶어주는 머리로 다니면서도, 남이 네 복숭아 알레르기를 기억해주지 못하는 것 따위로 실망하는 이기적인 새끼지. 원래 그렇다는 말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고 떠벌려놓고 너는 편리한 설명을 선택했어. 너는 그 누구의 눈물도 제대로 응시한 적 없으면서 네 슬픔을 안아달라고 징징거리는 비겁한 새끼야. 그리고 너는 눈을 뜬 채 소원을 비는 이상한 짓을 해. 


 앞으로는 잘하겠다는 다짐이 감히 영생을 얻는다면. 오, 신이시여. 


 너는 또 실수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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