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도> 2부 - 18
<임기응변에 능합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앞섭니다. >
동굴 안쪽 그림자만 보고 있던 내가 갑자기 뒤를 돈다. 내 눈알은 희번득하게 빛나고 묘하게 시선을 맞추지 못한다. 나는 소원 다 빌었냐고 이죽댄다. 그 말을 들은 내가 허공에다 발길질을 하고, 그 꼴을 지켜보는 나는 이제부터 질긴 반론이 시작될 것을 직감한다. 죽어도 이루어지지 않을 소원을 비는 내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이젠 화가 나기 보다는 슬퍼온다.
잠만 자고 몸 숨기는 달팽이로 살다가 급할 때만 힘을 쓰는 고릴라가 되는 건 자랑할 일이 아니야. 넌 고릴라일 수 있으면서 달팽이로 사니까.
넌 기도를 해. 앞으로는 잘하겠다고 신께 말해. 하지만 그건 말만 나불대고 침대에 누워있는 네 또 다른 위선이야. 사실은 너도 알잖아. 응? 알잖아. 알고 있잖아.
너는. 너는 그냥 비겁한 새끼야.
<자기애가 강합니다.>
그냥. 그냥 좀 안아주면 안돼?
나는 아마 세상에 나 혼자 살았어도 내가 예뻐 죽었을 거잖아. 그렇게 인류가 사라지고 지구가 멸망하고, 이 다음에 누가 살지 몰라도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글을 남기고 죽었을 거잖아. 내가 나인데 내가 나를 잘 모르겠다며 징징거리는 와중에도 나는 내가 사랑스럽잖아. 물론 잘 몰라도 사랑할 수 있지. 세상에 그 많은 연애들이 시작되는 이유가 연인들이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그런 것이 아니듯이. 아무튼 그냥 좀 안아주면 안돼? 내가 나를 사랑한 역사도 오래 되었는데, 그냥 그래주면 안돼?
내가 나에게 일기장 수십 권을 건넨다. 얄밉고 얄팍한 웃음과 함께. 나는 동굴 입구에 주저앉아 하나를 펼쳐본다.
>2009년 날짜 미상,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오늘 운동회를 하였다. 운동회는 졌어도 즐거웠다. 운동회에 엄마, 이모,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셨다. 우리 3학년은 하늘과 땅 사이, 구슬을 꿰어라, 저학년 릴레이 계주를 한다. 난 릴레이 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저학년 릴레이 계주에서는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다. 구슬을 꿰어라에선 공을 뒤로 넘기고, 왼쪽으로 넘기고, 밑으로 넘기고, 오른쪽으로 넘기는 것을 두 번 했는데 백군이 지고 말았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는 청군 3명과 백군 3명씩 6명이 출발선에 서서 달리다가 위에는 그물, 밑에는 매트가 있는 장애물이 나오면 그 사이를 기어서 결승점까지 가면 된다. 그런데 거기서 내가 1등을 해서 기분이 좋았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속한 백군이 졌다. 하지만 정말정말 기분이 좋았고 재밌었던 운동회였다. 다음에는 내가 속한 팀이 이겼으면 좋겠다.
아, 너무 웃기네. ‘다음에는 내가 속한 팀이 이겼으면 좋겠다’고 써놓았지만 사실은 아무 상관 없다는 게 느껴져. 이 일기의 가장 핵심적인 문장은 ‘내가 1등을 해서 기분이 좋았다’이지. 운동회를 했고, 즐거웠고, 누가누가 왔고, 무슨무슨 경기를 했고, 그 경기는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데 뭐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모든 설명이 ‘내가 1등을 해서 기분이 좋았다’를 말하기 위한 빌드업. ‘결과적으로는 내가 속한 백군이 졌’지만 ‘정말정말 기분이 좋았고 재밌었던 운동회’일 수 있었던 이유는 딱 하나. 내가 1등을 했기 때문이잖아. 다음 운동회가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백군이든 청군이든 또 내가 속한 팀이 졌어도, 내가 활약한 종목이 있었다면 나는 별 상관 없어했을 거야.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나머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어하는 우리 오랜 기원. 그런 것일까, 이것도? 뭐가 됐든, 스스로가 자랑스럽다는 사실을 일기 속 딱 한 문장으로 꼭꼭 감춰놓은 어린 나의 고뇌가 느껴져 우습고 귀엽다. 그렇지?
왜 울어? 내가 사랑해서 그래?
아니.
그럼?
후져서.
뭐가?
이런 게 다 싫다고 꺽꺽 우는 어른이 된 게 다 후져.
아니야. 이렇게 우는 건, 내가 너무 애틋해서라고, 사랑해서라고, 그걸 기억해야 해.
….
이 사랑이 나를 지켜줄 거라고 믿어야 해. 끝까지. 결국 우리는 똑같은 외로움을 토하는 거야. 응?
그래.
응.
….
….
….
….
근데 넌 너만 사랑해.
동굴에는 하나만 남는다. 자리를 뜨는 누군가.
3일차
어젯밤 꿈자리가 사나웠다. 아니, 사나웠던 것 같다. 카페에 앉아 인터넷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4박 5일의 짧은 가출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숙소에 돌아와 잠에 들었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을 떠보니 협탁에는 조각 케이크 하나도 보이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다. 꿈에서는 무슨 동굴이 나왔던 것 같다. 아직 ‘레아’라는 두 글자를 해결하지도 못했는데 이번엔 동굴이라는 단서를 또 메모장을 켜 적어두어야 한다. 레아가 동굴에 사는 누군가인가. 모르겠다. 아.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나는 딱 중간점에 든 가출을 더 즐기기로 한다.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