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뜯자!
공장에서는 애니메이션 작업도 하지만, 다른 일도 한다.
다른 일...
공장의 주 업무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이다. 애니메이션 회사이니까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지 빵을 굽거나 이삿짐을 나르거나 하지 않는다. 보통은 그렇지 않을까.
동화지에 애니메이터가 그린 그림이 스캐너를 통해 디지털 파일로 변환되고, 그 변환된 검은선에 색을 입히면 그다음 공정이 바로 내가 할 일이다. 낱장의 그림을 합쳐 하나의 완성된 장면으로 만드는 기술. 낱장의 그림이 하나의 프레임이 되고, 그 프레임 24장이 합쳐 1초 분량의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우리 보고 즐기는 애니메이션 한 편 만들려면 수십 만장의 그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회사에서 주어진 나의 업무는 이런 작업이다. 애니메이션을 완성시키는 일.
"알지? 내일 이사다."
이삿짐센터 인부에게나 할 말을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 던지는 팀장.
우리가 이삿짐센터 직원이야 뭐야!
내일은 옆 건물로 이사하는 날이다. 그런데 마음이 무거운 이유는 무얼까. 짐을 옮기고 파티션을 재조립하고 정리하는 일까지 모두 우리의 몫이다. 거기에 최악인 것은 100Kg는 충분히 넘는 UPS를 옮겨야 한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에서 말이다. 이삿짐센터는 오지 않는다는 사실.
UPS가 무엇이냐고?
무정전 전원장치. 영어로는 Uninterruptible Power Supply라고 쓴다. 전기가 나가도 컴퓨터에 전원을 공급할 수 있는 장치이다. 책상 의자 컴퓨터 모니터, 애니메이션 씬 봉투(전부 종이라서 엄청 무겁다) 등등. 뭐 이런 것까지는 이해한다. 남자 둘이면 책상 하나는 옮길 수 있으니까. 이것도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가정하에. 오늘 옮겨야 할 책상은 대략 30개. 책상만 있는 건 아니니 다른 물품도 그만큼 존재하는 상황. 대형 복사기도 여러 개. 날라야 할 짐이 산더미다. 이것들을 옮기다가 허리라도 삐끗하는 날엔. 회사가 책임져줄 것도 아니면서. 왜 이런 일이 직원에게 할당되는 것일까.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3층에서 옆 건물 지하로. 직원들의 손에는 목장갑이 끼워지고 모두는 인부가 된다. 몇 안 되는 남자 직원들 앞에 거대한 골칫거리가 남아 있다.
UPS
이 거대한 장치를 쳐다보는 순간 숨이 컥 막혀온다. 최근에야 기술 발전으로 UPS 사이즈도 많이 작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40KW UPS 장비는 가로 세로 깊이가 1.5m는 넘어가는 사이즈. 무게는 말할 필요도 없이 무겁다. 이런 장비를 3층에서 나선형 곡선의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 내려가야 한다. 심지어 계단도 폭도 좁다. UPS가 계단에 진입하면 양옆 공간이 남지 않아 앞뒤에서만 장비를 잡아야 하는 상황. 힘쓰는 일은 남자가 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 때문에 무거운 장비 앞에 수컷들만 모여있다. 과연 얼마나 힘을 쓸 수 있을지.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현실은 금방 다가왔다. 이런 악조건에 UPS를 통째로 옮길 수 없다는 남자 직원들의 불만 썩인 소리에 팀장은 잠시 생각을 한다.
'아! 좋은 해결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삿짐 보조 장비는 아무것도 없다. 흔한 지게 카트도 없이 이 물건을 옆 건물 지하로 이동해야 한다.
팀장의 장고는 점점 시간이 흐르고. 바둑에서 수가 막혀 한참을 고민하는 기사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나를 비롯해 남자 직원들은 이미 힘이 빠진 상태. 현관 계단까지 끌고 오는 것만으로도 이미 땀범벅이 돼버렸다.
"팀장님 어떡할까요?"
"도저히 내려갈 수가 없어요"
"일단 잡을 곳도 없고 공간도 없고"
"이게 너무 크고 무거워서 계단으로는 무리예요."
팀장의 말버릇이 입에서 튀어나온다.
"짜쳐!"
팀장은 열 받는 일이 생기거나 짜증 나면 항상 "짜쳐"를 내뱉는다. 옆에 재떨이라도 있었다면 바로 가레침부터 캭하고 내뱉었을 것이다. 지금이 바로 짜친 상황이다. 그만큼 자신도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상태. 나와 동료들은 팀장 눈치만 살피며 팀장이 포기하기만 기다린다.
이삿짐 전문 인력이 날라야 할 일을 애니메이션 만드는 사람들이 하고 있으니. 비유하자면 이삿짐센터 인부가 고도의 스킬이 필요한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전문 적인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거늘. 안 되는 일을 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붙잡고 있으니 잘될 턱이 없다. 차라리 안되길 바라는 우리.
장고 끝에 팀장의 한 마디.
"야! 뜯자"
순간 모두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허탈해한다. 보통 이 정도 했으면 못한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을. UPS가 도대체 어떤 장비인 줄도 모르면서 이걸 해체하겠다고 선언했다. 계단 폭보다 넓어서 진입 자체가 안되니 뜯어서 해체해서 내려가자는 팀장의 말. 모두 그냥 포기하기만을 바랐다. 포기하고 인부를 부르기를. 그러나 팀장은 우리를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지. 우리의 기대와 바람은 송두리째 날아갔다. 그런 팀장을 모두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모두의 속마음은 이랬다.
"아니! 저걸 왜!"
"왜... 왜..."
"왜 우리가 해야 하는 거야!"
"미친 거 아냐!"
속마음은 그랬지만, 우리는 어느새 UPS를 뜯고 있었다. 신속하게 앞뒤 좌우 그리고 상판을 뜯어냈다. UPS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생각보다 구조는 단순했다. 드디어 커다란 육면체의 프레임이 노출되었다. 잡기에는 더 수월해졌다. 이제 모두가 프레임을 붙잡고 계단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남자 여섯으로도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함을 모두가 깨닫는다.
다시 팀장의 장고가 시작됐다.
겨우 나선형 계단 초입인데 움직일 수 없이 무거운 UPS.
지금 이 순간 모두의 속마음은 이렇다.
'이제 그만 하지'
'이 정도 했으면 잘한 거야'
'여기서 포기하자고 팀장 xx야!'
'왜 우리가 이걸 날라야 하는데!'
장고 끝에 팀장은 말한다.
"야! 뜯자"
'뭐!?'
'뜯으라고?'
'여기서 멀 더 뜯어?'
허탈해하면서 우리는 다시 이 무거운 장비를 해체하고 있다. UPS 하단부에 구리로 엄청 감긴 코일 덩어리가 보였다. 그걸 뜯어내면 된다는 팀장의 말. 참 어이없는 순간의 연속이다. 저걸 어떻게 뜯어내냐고. 당연히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전문 기술자도 아닌데 저걸 뜯으라니.
'미쳤어 미쳤어'
우리는 다시 모두가 그렇듯 구리 코일 덩어리를 큰 몸체에서 분리하고 있었다. 전문 기술 지식도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해체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UPS는 이제 분해되었다. 구리 코일 덩어리를 남자 넷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꿈적이지 않았다. 작아 보여도 무게는 만만치 않다는 것. 남자 두 명이 더 달라붙었다. 겨우겨우 여섯 명이 코일 덩어리를 부여잡고 계단 한 칸씩 내려갔다. 한 칸 내려가고 허리 피고 한 칸 내려가고 허리 피고. 경사 높은 계단을 남자 여섯 명이 작은 코일 덩어리를 들고 내려가는 그림은 정말로 웃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다. 전부 어정쩡한 자세가 되어 힘들다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끙차 끙차 소리를 내며 1층 바닥으로 코일 하나 내리는 데 1시간이 넘게 소요됐다.
아! 머리가 핑 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회사에 들어가면 이런 일도 하는 건지. 모두가 의아해하면서 서로가 잘했다는 격려를 하고 있다. 아직 본체는 3층 계단에 남아 있거늘.
이 모든 일들이 당연시되는 하청공장.
이사는 이삿짐센터로.......
제발.
뜯자는 말만 하지 말아 주세요.